명상록
관용은 강자의 주도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약자의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관용이야 말로 어느 면에서 가장 비타협적일 수 있다.

어느 면에서 관용은 동시에 지배를 의미할 수 있다.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누구를 전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일 수 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원수보다 힘의 우위에 서지 않고는 사랑하기가 불능이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있을 수 없다. 과거의 범죄를 관용할 수 있어도 미래의 예비된 범죄를 관용할 수는 없다. 불관용은 미래에 대응하고 있으므로 결코 관용할 수 없다.

관용은 철저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또 기왕에 이루어진 과거의 일을 상대하여 힘의 우위에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포섭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회는 관용도 불관용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다. 용서할 필요도 없고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에 의존하지도, 타인을 지배하지도 않는 독립적인 개인들의 대등한 관계에서 우리는 관용을 넘어 사랑할 수 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10 깨달음은 소통이다 김동렬 2006-10-05 5196
309 깨달음은 소통이다 김동렬 2006-10-01 5152
308 닮은 나무 이야기 image 김동렬 2006-10-01 5237
307 맞물려 있다 김동렬 2006-09-23 5382
306 인생이란 것은 김동렬 2006-04-29 8616
305 관광객과 순례자의 차이 김동렬 2006-02-02 6824
304 나는 무엇을 믿는가? 김동렬 2006-01-26 6849
303 조영남씨의 실패담 김동렬 2006-01-23 7674
302 깨달음의 의미는 김동렬 2005-12-20 6888
301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김동렬 2005-10-31 6736
300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김동렬 2005-10-04 10816
299 이런 날 술 한잔 하고 싶은 이유 김동렬 2005-10-01 6645
298 새로운 약속을 위하여 김동렬 2005-09-30 5187
297 인문학 2004-09-29 5976
296 행복은 인간에게 도달 불가능 한 것인가? 2004-09-29 6516
295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2004-09-29 6784
294 여보게 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가? 2004-09-21 5406
293 사랑이 의무일 수있는가? 2004-09-15 6877
»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2004-09-15 5875
291 지금의 나는 과거의 총합인가? 2004-09-15 6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