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패러다임-생물학적 세계관>
-세계관은 있다-
세계관이 없을 수는 없다. 세계관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발상법이다. 세계관의 문제가 주요한 것은, 아무런 세계관이 없는 사람도 나름대로 유치한 형태의 발상법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 잘못된 발상법이 혼란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문제는 그 과학적, 합리적 사고라는 것도 알고보면 하나의 미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고로 세계관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원시적인 세계관-
과학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소멸과 발생으로 이해하려든다. 둔갑과 변신 및 갑작스런 출현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발생했다는 식이다. 이런 원시적인 사고가 귀신이나 주술,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낳는다.
비가 오는 이유는 비의 신에 의해 비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이유는 질투의 신에 의해 질투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의 신에 의해 사랑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발생한 것이며 둔갑, 혹은 변신하기도 한다. 우주는 발생과 소멸, 둔갑, 느닷없는 출현으로하여 존재한다고 믿는다. 과학과 대립하는 원시적 세계관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류의 유치한 발상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도 결과가 존재한다는 식의 사고이다. 이 시대에도 무지한 자들에 의해 만연되어 있다.
-합리주의의 출발은 수학적 세계관-
석가모니에 의해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석가모니는 인도에서 발달한 수학의 영향을 받았다) 비로소 합리주의의 출발이다. 저절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원인이 있다.
수학원리에 의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알갱이(원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학의 기본은 알갱이의 결합과 분해이다. 덧셈과 뺄셈이다. 凹+凸=□이다. 모든 존재는 어떤 기본적인 알갱이들의 분리와 조립에 의해 생성되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근대의 뉴튼-기계론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주류와 비주류의 변증법-
학문의 역사는 자연발생을 믿는 고대인의 세계관과 자연발생을 부정하는 근대인의 수학적세계관이 변증법적으로 대결하는 역사이다. 수학-합리주의는 주류적 세계관을 형성하였고, 자연발생론은 비주류-신비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근대인의 세계관-
합리주의-수학적 세계관이 뉴튼의 물리학 및 서구의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더 구체화 된 것이 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뉴튼에 의해 우주는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 생각되었다. 우주가 존재하는 기초는 凹+凸=□라는 식이다. 결합과 분리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하다. 많은 것들은 凹+凸=□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하겠다며 나온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곧 상대성의 세계관 혹은 불확정성의 세계관이다.
아인시타인-상대성의 세계관은 한때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졸지에 하이젠베르그-불확적성의 세계관에 밀려버렸다. 허나 둘다 불완전하다. 상대성이니 불확정성이니 하는 주의들이 기계론적 세계관을 일부 비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한다.
상대성 및 불확정성의 원리는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잘 모르겠다는 거다. 이건 대안제시가 아니다. 이 에 대안이 필요하다. 말하려는 바 생물학적 세계관은 그 대안이 된다.
또 잡다한 것이 몇가지 더 있다. 카오스이론에 기초한 카오스적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 게임이론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된다. 허나 역시 논리가 취약한 즉 틈새시장이다.
-동, 서양의 철학적 전통-
동양의 경우는 유가적 합리주의와 도가적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유가-합리주의가 우세하여 주류를 형성하였고 도가-상대주의는 일종의 이단취급을 받았다. 도가-상대주의는 고대인들의 자연발생론적 세계관을 일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며 한계가 있다.
서구의 경우는 플라톤 이래의 수학적 세계관-합리주의의 전통을 뉴튼-마르크스의 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이 계승하는 가운데 니이체-실존주의를 비롯하여 일부 비주류의 안다리걸기가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다.
-현대인들의 번민-
현대인들은 예의 두갈래의 세계관을 적당히 타협하며 불분명한 세계관에 안주하고 있다. 기본적 얼개를 제공하는 것은 뉴튼-기계론적 세계관 뿐이다. 그러나 오류가 너무 명백하다. 하여 기본적인 발상법은 뉴튼-기계론을 따르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조시켜 실존주의(비판적 뉴튼주의다)-포스트모더니즘 하며 모색하는데 그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인들은 뚜렷하게 정립된 세계관이 없다. 결론 유보다. 어떤 고착된 세계관에 얽매여서 안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언제 새로운 이론물리학적 성과가 나올지 모르므로 결론을 유보하는게 안전하다.
뉴튼-기계론은 사정없이 비판되지만 누구도 그 기본적인 얼개를 버리지는 못한다. 결정론의 비판은 곧 고대인의 자연발생론으로 퇴행하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가 자신있게 뉴튼-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고대인의 자연발생론-도가류의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대안의 세계관-
게놈연구의 성과로 기존의 이러한 뉴튼-기계-상대성-불확정성의 모든 모색은 폐기되어야 함이 명백해졌다.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존재는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다.
생물학적 세계관은
1) 자기복제의 개념이 적용됨-질
2) 집적의 개념이 적용됨-입자
3) 구조의 개념이 적용됨-힘
4) 극한의 개념이 적용됨-운동
5) 확률의 개념이 적용됨-량
생물학적 세계관은 하나의 문제를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요철(凹凸)식 1 대 1의 대응이 아니라, 즉 기계론에서 볼트와 너트가 결합하듯이,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이, 시계초침을 정확히 맞추듯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공간에 확률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凹+凸=□의 물리적 대응이 아니라 시간 상에서의 무한 확대이다. 즉 기계론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은 공간의 구조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장에서 답을 찾는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세계관은 시스템-패러다임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존재는 수직구조의 기계가 아니라 병렬구조의 시스템이다. 여기서 본질은 그 원자 알갱이가 아니라 그 원자를 담는 그릇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즉 凹+凸이라는 두 개의 원자가 □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凹와 凸을 담고있는 그릇이 □를 결정하는 것이다. 고로 凹와 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기초소자가 되는 凹凸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주는 어떤 알갱이의 구조적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알갱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凹+凸은 없다. 凹+凸=□이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안에서 凹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凹가 되기도 하고 凸이 되기도 한다.
-생물학적 세계관-
우주는 하나의 생물이다. 존재도 하나의 생물이다. 역사도 하나의 생물이다. 생물(유기체)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생물에 대비되는 것은 무생물(무기체)은 곧 기계다. 두 개의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살아있는 유기체(생물)로 보는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죽은 무기체(기계)로 보는 관점이다.
우주도 움직인다(팽창한다) 역사도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생물이요 하나는 기계다. 고로 우주는 기계이거나 아니면 생물이다. 고로 우리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생물학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근래의 생물학적 연구성과가 증명하는 것은 존재는 어떤 알갱이들의 조립이 아니라 그 알갱이와 그 알갱이를 담는 그릇과의 관계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알갱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관은 있다-
세계관이 없을 수는 없다. 세계관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발상법이다. 세계관의 문제가 주요한 것은, 아무런 세계관이 없는 사람도 나름대로 유치한 형태의 발상법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 잘못된 발상법이 혼란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문제는 그 과학적, 합리적 사고라는 것도 알고보면 하나의 미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고로 세계관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원시적인 세계관-
과학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소멸과 발생으로 이해하려든다. 둔갑과 변신 및 갑작스런 출현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발생했다는 식이다. 이런 원시적인 사고가 귀신이나 주술,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낳는다.
비가 오는 이유는 비의 신에 의해 비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이유는 질투의 신에 의해 질투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의 신에 의해 사랑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발생한 것이며 둔갑, 혹은 변신하기도 한다. 우주는 발생과 소멸, 둔갑, 느닷없는 출현으로하여 존재한다고 믿는다. 과학과 대립하는 원시적 세계관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류의 유치한 발상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도 결과가 존재한다는 식의 사고이다. 이 시대에도 무지한 자들에 의해 만연되어 있다.
-합리주의의 출발은 수학적 세계관-
석가모니에 의해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석가모니는 인도에서 발달한 수학의 영향을 받았다) 비로소 합리주의의 출발이다. 저절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원인이 있다.
수학원리에 의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알갱이(원자)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학의 기본은 알갱이의 결합과 분해이다. 덧셈과 뺄셈이다. 凹+凸=□이다. 모든 존재는 어떤 기본적인 알갱이들의 분리와 조립에 의해 생성되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근대의 뉴튼-기계론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주류와 비주류의 변증법-
학문의 역사는 자연발생을 믿는 고대인의 세계관과 자연발생을 부정하는 근대인의 수학적세계관이 변증법적으로 대결하는 역사이다. 수학-합리주의는 주류적 세계관을 형성하였고, 자연발생론은 비주류-신비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근대인의 세계관-
합리주의-수학적 세계관이 뉴튼의 물리학 및 서구의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더 구체화 된 것이 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뉴튼에 의해 우주는 하나의 정밀한 기계로 생각되었다. 우주가 존재하는 기초는 凹+凸=□라는 식이다. 결합과 분리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이 틀렸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하다. 많은 것들은 凹+凸=□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하겠다며 나온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곧 상대성의 세계관 혹은 불확정성의 세계관이다.
아인시타인-상대성의 세계관은 한때 기계론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졸지에 하이젠베르그-불확적성의 세계관에 밀려버렸다. 허나 둘다 불완전하다. 상대성이니 불확정성이니 하는 주의들이 기계론적 세계관을 일부 비판할 수는 있어도 결코 대체하지는 못한다.
상대성 및 불확정성의 원리는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잘 모르겠다는 거다. 이건 대안제시가 아니다. 이 에 대안이 필요하다. 말하려는 바 생물학적 세계관은 그 대안이 된다.
또 잡다한 것이 몇가지 더 있다. 카오스이론에 기초한 카오스적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 게임이론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된다. 허나 역시 논리가 취약한 즉 틈새시장이다.
-동, 서양의 철학적 전통-
동양의 경우는 유가적 합리주의와 도가적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유가-합리주의가 우세하여 주류를 형성하였고 도가-상대주의는 일종의 이단취급을 받았다. 도가-상대주의는 고대인들의 자연발생론적 세계관을 일부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며 한계가 있다.
서구의 경우는 플라톤 이래의 수학적 세계관-합리주의의 전통을 뉴튼-마르크스의 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이 계승하는 가운데 니이체-실존주의를 비롯하여 일부 비주류의 안다리걸기가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다.
-현대인들의 번민-
현대인들은 예의 두갈래의 세계관을 적당히 타협하며 불분명한 세계관에 안주하고 있다. 기본적 얼개를 제공하는 것은 뉴튼-기계론적 세계관 뿐이다. 그러나 오류가 너무 명백하다. 하여 기본적인 발상법은 뉴튼-기계론을 따르면서도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조시켜 실존주의(비판적 뉴튼주의다)-포스트모더니즘 하며 모색하는데 그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인들은 뚜렷하게 정립된 세계관이 없다. 결론 유보다. 어떤 고착된 세계관에 얽매여서 안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언제 새로운 이론물리학적 성과가 나올지 모르므로 결론을 유보하는게 안전하다.
뉴튼-기계론은 사정없이 비판되지만 누구도 그 기본적인 얼개를 버리지는 못한다. 결정론의 비판은 곧 고대인의 자연발생론으로 퇴행하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가 자신있게 뉴튼-기계-결정론적 세계관을 반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고대인의 자연발생론-도가류의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대안의 세계관-
게놈연구의 성과로 기존의 이러한 뉴튼-기계-상대성-불확정성의 모든 모색은 폐기되어야 함이 명백해졌다.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존재는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다.
생물학적 세계관은
1) 자기복제의 개념이 적용됨-질
2) 집적의 개념이 적용됨-입자
3) 구조의 개념이 적용됨-힘
4) 극한의 개념이 적용됨-운동
5) 확률의 개념이 적용됨-량
생물학적 세계관은 하나의 문제를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요철(凹凸)식 1 대 1의 대응이 아니라, 즉 기계론에서 볼트와 너트가 결합하듯이,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이, 시계초침을 정확히 맞추듯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공간에 확률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凹+凸=□의 물리적 대응이 아니라 시간 상에서의 무한 확대이다. 즉 기계론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은 공간의 구조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장에서 답을 찾는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세계관은 시스템-패러다임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존재는 수직구조의 기계가 아니라 병렬구조의 시스템이다. 여기서 본질은 그 원자 알갱이가 아니라 그 원자를 담는 그릇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즉 凹+凸이라는 두 개의 원자가 □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凹와 凸을 담고있는 그릇이 □를 결정하는 것이다. 고로 凹와 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기초소자가 되는 凹凸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주는 어떤 알갱이의 구조적 결합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알갱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凹+凸은 없다. 凹+凸=□이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안에서 凹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凹가 되기도 하고 凸이 되기도 한다.
-생물학적 세계관-
우주는 하나의 생물이다. 존재도 하나의 생물이다. 역사도 하나의 생물이다. 생물(유기체)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생물에 대비되는 것은 무생물(무기체)은 곧 기계다. 두 개의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살아있는 유기체(생물)로 보는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죽은 무기체(기계)로 보는 관점이다.
우주도 움직인다(팽창한다) 역사도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생물이요 하나는 기계다. 고로 우주는 기계이거나 아니면 생물이다. 고로 우리는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생물학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근래의 생물학적 연구성과가 증명하는 것은 존재는 어떤 알갱이들의 조립이 아니라 그 알갱이와 그 알갱이를 담는 그릇과의 관계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알갱이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