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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993 vote 0 2007.12.10 (22:37:54)

● 존재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말 ‘있’과 영어 ‘is’는 모두 이(齒)를 어원으로 한다. 이(齒)가 드러나 보이게 아래턱을 내밀어 앞에 있는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있다는 것은 어떤 ‘이것’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는 것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응하여 있는 것이다. 맞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타낼 수 있고 부를 수 있고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연락할 수 있는 것, 전달할 수 있는 것, 상대할 수 있는 것,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어떻게도 해볼 수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있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어떻게든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반작용의 메아리가 돌아오는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도 없고 어떠한 반응도 없다면? 상상도 못한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있음의 어원이 아래턱으로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데 있다는 사실이 존재라는 개념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있음의 근본된 의미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바 어떤 장소에 위치하고 있음을 넘어선 것이다.

무엇인가? 존재는 매커니즘적인 것이다. 빛처럼 입자로 있는 것도 존재요 그림자처럼 거기에 딸리어 있는 것도 존재다. 질료와 형상이 둘 다 존재에 속한다. 공(空)과 색(色)이 모두 존재다.

명목 상의 존재도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를 철학함은 그 명목상의 존재들 중에서 본질적인 존재를 찾자는 것이다. 왜인가? 그 아래턱으로 가리키기에 있어서 가장 적은 비용을 들이고 가장 큰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세상을 모두 움직이려면 큰 그물의 벼리를 당겨야 한다. 여러사람이 서 있는 자리의 카펫을 잡아당기면 모두가 한꺼번에 움찔하게 된다. 모두에게 동시에 신호를 보내려면 본질을 움켜쥐어야 한다.

우리가 존재를 궁구함은 결국 많은 존재들 중에서 잎 보다는 가지, 가지 보다는 줄기, 줄기 보다는 뿌리를 찾아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보려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정보를 전하려면?

한자어로 말하면 空(공), 存(존), 在(재), 事(사), 像(상)의 개념들이 있다. 存在(존재)는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다. 空(공)은 불교개념이요 여기에 반대되는 色(색)은 像(상)과 같다. 事(사)는 사건이다.

● 空(공) - 추상적 場(장)의 존재.
● 存(존) - 명목을 가지며 다른 많은 것들을 아우른다.
● 在(재) - 형태를 가지며 시공간 상의 장소에 존재한다.
● 事(사) - 현재 진행되는 시간 상의 사건의 존재, 무형의 존재이다.
● 像(상) - 색깔과 냄새, 소리처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예컨대 자본주의 시장의 존재는 우리가 통상 말하는 존재와 다르다. 시장은 남대문에도 있지만 증권시장처럼 인간의 추상적 약속들 속에 모호하게 존재하기도 한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이 空(공)의 존재이다.

存(존)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가문의 존재나 국가의 존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역시 인간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추상적 존재이지만 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하여 없앨 수는 없다.

存(존)은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형태를 바꾸더라도 보존된다. 가문의 구성원이 일시에 모두 죽어도 한 명의 후손이 살아있으면 명맥이 보존된다. 국가가 멸망해도 왕조가 교체될 뿐 나라들은 국명을 바꾸어 보존된다.

在(재)는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형태를 가지며 항상 어떤 시공간적인 장소에 있다. 여기에 있거나 아니면 저기에 있다. 쟁여져 있다. 파괴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事(사)는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 상에서 진행한다. 사건이 완료되면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새로 시작된다. 오늘은 매일 아침에 생겨나고 저녁에 사라져서 어제가 된다. 많은 존재들이 그러하다.  

像(상)은 곧 눈에 보이는 형상이다. 색깔이나 냄새, 소리 등으로 존재한다. 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다른 것에 빌붙어 있다. 옷처럼 입혀지는 것이다. 옷은 갈아입을 수 있으므로 상은 언제라도 변한다.

像(상)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금방 변하고 事(사)는 유지되지만 언젠가 완결되고 만다. 在(재)는 파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약한 존재들이다. 가을이면 잎이 지듯이 사라져 버리는 약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다른 것에 빌붙어 있다. 강한 것은 명목이 있는 것이다. 이름이 있는 것이다. 존이 강하다. 존에 재가 종속되고 재에 사가 종속되며 사에 상이 종속된다. 우리가 흔히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존의 존재이다.   

본질에서 존재란 인간이 대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진정한 존재는 최고수준의 대응이 가능한 존재이다. 단 하나의 스위치를 눌러서 단 한 번에 전부 통제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머지는 그 하나가 만든 거품과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존재를 철학하는가? 그 하나를 찾아내어 단 한 번의 스위치를 켜서, 단 한 번 부싯돌을 쳐서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단 한번 양초 심지에 불을 당겨서 요원의 들불을 일으키기 위해서이다.

실존이란 바로 그러한 개념이다. 묻노니 당신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단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당신의 실존이다. 단 한 마디로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면? 한번에 나의 모든 것을 바꾼다면? 내 인생의 승부수는?

● 생명

존재는 매커니즘을 가진다. 그것이 구조다. 그 구조는 진화한다. 구조적으로 집적된 정도에 따라 질적인 고도화가 일어난다. 어떤 하나의 계는 1이거나 아니면 5이거나 25, 혹은 125, 625, 3125의 구성소로 이루어진다.

자동차의 계기판은 질(연료계), 입자(수온계), 힘(RPM), 운동(속도계), 량(적산거리계)의 5로 구조화 된다.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로 이루어지고 컴퓨터는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5로 이루어진다.

물질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가지 성질로 이루어진다. 머리카락을 한 개 뽑는다 해도 찾기, 잡기, 당기기, 옮기기, 버리기의 5회에 걸쳐 각 단계에 어떻게 할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먼저 새치를 찾고, 다음 그것을 손에 쥐고, 다음 힘주어 당기고, 다음 뽑힌 머리카락을 머리에서 이탈시키고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연필로 글을 쓰거나 혹은 돌을 던지거나 마찬가지다.

돌을 던지더라도 찾기, 쥐기, 팔을 뒤로 젖혀 힘을 가하기, 팔을 뿌리기, 손에서 놓기의 다섯 단계를 거쳐야 한다. 무엇인가? 생명의 의미는 존재가 어떤 특정한 질서의 조건을 만족시켜 주어야만 기능함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일정한 주어진 조건에서 스스로 자라고, 성장하고 진화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움직일 수 없는 절대의 질서를 가진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생명체 뿐만 아니라 무생물에도 생명성이 있다.

주식시장이 성장한다든가 혹은 건물이 점점 지어진다든가 하는 경우에도 일정한 조건의 충족, 불연속적인 층위의 진화가 있다. 1,2,3,4로 늘어나는 산술급수적 증가가 아니라 게가 허물을 벗듯 비약적으로 진화한다.

역사는 살아있다. 생명이 있다. 이는 역사가 일정한 질서의 조건 하에서 작동함을 의미한다. 그 조건이 충족될 때 역사는 스스로 움직인다. 어떤 권력자도 움직일 수 없는 절대의 질서가 숨어 있다.

식물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고도의 기계와도 같다. 식물과 기계의 차이점은 전혀 없다. 언젠가 인공적으로 생물을 발명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 논리를 연장하면 동물도 역시 하나의 고도화된 자동기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반드시 동식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식물도 태초에 물질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하는 모든 것은 절대의 질서를 가진다는 점이다.

생명은 계를 가지며 계의 완전성을 가진다. 생태계는 평형을 지향하고 종은 종족보존을 지향한다. 생태계는 평형이 완전이고 종은 보존이 완전이다. 모든 증가하고 발전하는 것은 내부에 그러한 균형추를 가진다.

물질의 구조, 기계나 조직의 구조는 일의 1 사이클의 완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생명성은 물질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고 국가에도 있다. 외부의 간여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생명성이 있다.

모든 조직, 모든 집단, 모든 시스템, 패러다임에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지배하며 통제하고 장악하며 일정한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생명과 구조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1 사이클이 있다. 삶과 죽음이 있다.

왜 생명인가? 완전하기 때문이다. 자율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의 개입이 없더라도 스스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그 완전성의 핵심은 제어개념이다. 그것이 구조다.

● 자연

우리는 자연을 관철하여 팩트를 얻을 수 있고 거기서 동일한 사건의 반복을 의미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팩트≫패턴≫로직≫매커니즘≫패러다임이 있다. 패러다임이 완전한 것이며 팩트는 거기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다.

우리는 팩트를 보지만 비교하여 패턴을 찾고 둘 이상의 패턴에서 로직을 찾고 로직에서 숨은 매커니즘을 찾을 때 거기서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시야가 넓어지고 다른 적용과 응용의 대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때 우물 안의 개고리들 처럼 아웅다웅 싸울 이유가 없어지며 새로운 신대륙을 찾아 떠나게 되고 인간들 사이의 간격은 넓어지며 서로는 마찰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지평의 의미다.

자연은 그러한 흐름을 의미한다. 계곡의 물이 우당탕퉁탕 다투다가 이윽고 넓은 강을 만나서는 조용히 흐르는 이치와 같다. 마침내 큰 바다를 만나서는 고요히 머무름과 같다.

계곡 물이 팩트라면 강의 지류가 패턴이고 그 지류와 지류가 만나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로직이면 도도히 흐르는 큰 강이 매커니즘이고 고요히 머무르는 큰 바다가 패러다임이다. 모든 소란은 팩트의 계곡에서 일어난다.

강물이 계곡에서 지류로, 강으로, 바다로 갈수록 조용해지며 갈수록 마찰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란 자연히 해소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문제의 답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원인에서 해소된 것이다.

도둑을 잡아서 문제를 해결함이 아니라 곡식이 넉넉해져서 도둑이 없어지는 것이다. 후진국에서는 범죄자를 사형에 처해도 범죄는 늘어날 뿐이다. 선진국에서는 사형제를 폐지해도 범죄는 소멸할 뿐이다.

마리화나를 단속하지 않는 나라도 많다. 그래도 말썽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이다. 무엇인가? 자연은 자연히 진보한다. 작은 나무는 큰 나무로 자란다. 발전한다. 자연은 어떻게든 또다른 평형을 찾아낸다.

진보의 의미, 발전의 의미가 없는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나아감이 없고 상승함이 없는 자연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진보하며 날마다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자연에 道(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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