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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537 vote 0 2007.12.06 (22:58:48)

구조는 프레임≫컨셉≫제어다.

척 보고 아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실을 제시했을 때 거기서 1초만에 프레임과 컨셉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모든 외연의 프레임 속에 내포를 통일하는 컨셉이 있다.

그리고 그 컨셉 속에 제어라는 이름의 안테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완성에 가까운 사람이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조직이든 상품이든 도구이든 물체든 물질이든 시스템이든 그러하다.

반드시 밖으로 문을 열어주는 프레임과 안으로 내부를 결속하는 컨셉과 직접 대상과 접촉하는 안테나가 있다. 날이 있다. 촉이 있다. 칼날이 있다. 더듬이가 있다. 전축의 바늘이 있다. 아찔하고 짜릿한 거시기가 있다. 꼭 있다.

만약 당신이 자동차를 보았을 때, 직관적으로 자동차가 마차의 진화한 형태임을 알아챈다면 당신은 프레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 안에 엔진이 있음을 구태여 보닛을 열어보지 않고도 안다면 당신은 컨셉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엔진이 실은 작은 마차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은 제어를 아는 사람이다. 구조는 바로 그러한 맥락을 아는 것이다. 자동차 엔진 속에는 작은 마차가 숨어 있다. 그 마차는 피스톤과 플라이휠이다.

피스톤이라는 말이 플라이휠이라는 마차를 끄는 것이다. 반드시 안테나가 있다. 촉이 있다. 접촉점이 있다. 링크가 있다. 폭발이 있다. 방아쇠와 공이가 있다. 소통이 있다. 수꽃의 꽃가루와 암술이 접촉하는 접촉점이 있다.

거기서 모든 흐름이 일어나고 그 흐름이 증폭되어 존재의 온갖 다양성이 꽃피우는 것이다. 그러한 전개의 연속적 과정을 아는 것이 구조를 아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직관하여 프레임과 컨셉을 찾고 제어를 찾을 수 있다.

 

 

[이다] ●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 -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
[있다] ● 인간, 실존, 자아, 일상, 인생 - 공동체, 국가, 권력, 투쟁, 사회
[낫다] ● 정신, 깨달음, 가치, 의미, 마음 - 윤리, 이상, 미학, 규범, 도덕
[하다] ● 이성, 인권, 사랑, 자유, 욕망 - 사상, 지혜, 소통, 지식, 언어
[남다] ● 생존, 소유, 이익, 쾌락, 행복 - 생산, 자본, 신뢰, 효율, 문화

 

제 2장 주요개념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에 집착해서 안 된다. 여기서 신(神)의 개념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존재 개념의 근거로서의 신이다. 마찬가지로 존재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생명 개념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근거와 사실간의 연쇄구조 안에서 개념들은 맥락을 얻어 유의미하게 자리매김된다. 근거로부터 사실이 유도된다. 어떤 사실이든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자연과 접촉하여 인지하는 것은 이러한 근거와 사실의 전개들에서 맨 마지막에 오는 물질 개념이다. 인간은 다만 물질을 인지할 뿐이며 그로부터 근거를 쫓아 자연과 생명과 존재와 신의 개념을 추론한다.

우리가 실제로 인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은 물질의 영역에 있다. 그 물질의 근거는 자연이고, 그 자연의 근거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근거는 존재이고 그 존재의 근거는 신이다. 그렇다면 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연쇄적인 트리구조 그 자체의 정합성이 신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신은 최종적인 외연이며 외연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그 외연의 반대편에서 작용하는 내포의 존재에 의해 증명된다.

자식의 근거는 부모다. 부모의 근거는 자식이다. 여기서 자식이 1대라면 순환논리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대 3대로 이어진다면 비가역성, 비순환성이 성립하므로 순환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모의 근거는 자식이다. 자식의 근거는 부모다.’ 라는 두 진술이 있다면 둘은 모순이므로 두 진술 중 하나는 오류다. 진술은 전제를 필요로 하고 순환논리는 전제를 다치므로 불성립이다.

손가락의 근거는 손이고 손의 근거는 팔이고 팔의 근거는 몸이다. 몸의 근거는 손가락과 손과 팔의 집합이다. 이렇듯 전제와 진술 사이에서 방향성이 존재할 때 전제를 다치지 않으므로 논리는 성립한다.

결론적으로 신의 근거는 존재≫생명≫자연≫물질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구조의 정합성 그 자체다. 병의 근거는 분대, 분대의 근거는 소대, 소대의 근거는 중대다. 최종적인 근거는 군이며 군의 근거는 중대≫소대≫분대≫병의 구조다.

이러한 전개의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신≫존재≫생명≫자연≫물질로 이어지는 논리구조의 정합성이다. 신은 존재의 근거로 쓰였으므로 설사 신이 부정된다 해도 존재의 근거가 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물질을 보고 자연을 추상한다. 물질은 그저 있는 것이며 자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다. 물질은 다만 공간에 펼쳐질 뿐이지만 자연은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물질이지만 그 물질이 시간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자연을 개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존재=생명=자연=물질은 본래 같은 것이다. 모두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여러 얼굴들이다.

물질이 설명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연 개념을 제시하며 자연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생명개념이 제시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므로 존재 개념이 제시되며 존재로 부족하므로 신의 개념이 제시되는 것이다.

물질은 공간을 나타낼 뿐이지만 자연은 시간까지 나타낸다. 생명은 그 자연의 질서까지 나타낸다. 즉 패턴을 설명하는 것이다. 존재는 그 자연의 다양한 전개 속에 숨은 하나의 통일성을 설명한다.

신은 그 존재의 완전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전개에서 가장 구체적인 물질이고 자연은 추상이며 생명은 보다 높은 추상 개념이다. 존재를 거쳐 신이 최고의 추상 개념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을 의미한다.

맥락의 이해가 중요하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인 물질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점차 추상하여 그 물질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도달한 본질의 존재에 신(神)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중요한건 포지션이다. 종교의 신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존재의 궁극적 근거가 될 그 무언가의 포지션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궁극의 근원은 ‘있다’가 아닌 ‘이다’의 영역에 속한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현상이고 빛은 실재이며 그 빛을 탄생시키는 것은 본질이다. 우리가 ‘있다’로 말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나 실제로 존재하는 빛과 그 빛의 본질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빛은 있어도 그림자는 없다. 단지 그림자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림자는 광원과 피사체와 스크린의 3자가 일정한 질서를 가질 때 성립하는 특수한 현상이다. 이는 존재에 포함되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이렇듯 존재는 빛처럼 실재하는 것과 그림자처럼 딸린 것이 있다. 신의 개념은 존재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있다’가 아니라 ‘이다’에 속한다. 신은 이곳이나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거나 혹은 신이 아닌 것이다.

시은 존재와 생명과 자연과 물질을 포괄하는 큰 그릇이다. 그러한 전개의 내적 정합성을 담보할 근원의 완전성 그 자체다. 어쨌든 신에 대한 부정은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된다. 존재의 부정은 생명의 부정이 된다.

생명의 부정은 자연의 부정이 되고 자연의 부정은 물질의 부정이 된다. 이러한 전개의 맥락이 전부 부정되면 존재론의 부정이 되며 존재론의 부정은 존재론을 복제한 인식론의 부정으로 확대된다.

신≫존재≫생명≫자연≫물질의 부정은 진리≫세계≫진보≫역사≫문명의 부정이 된다. 빛이 없는데 그림자가 있을리 없다. 이들은 연쇄적인 고리로 하여 얽혀 있으므로 하나가 부정되면 모두 부정되는 것이다.

빛이 있으므로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가 있으므로 빛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칼라다. 빛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신경과 접촉하여 만들어낸 전기신호인 칼라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라는 그림자와 같다. 빛이 피사체와 접촉하여 그림자를 만들듯이 빛이 피사체와 접촉하여 칼라를 만든다. 즉 우리가 직접 보았다고 믿는 것은 모두 넓은 의미에서의 그림자인 것이다.

무엇인가? 빛이 존재론이면 칼라는 인식론이다. 인간은 인식론을 통해 존재론을 파악한다. 우리는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이라는 인식론을 통해서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의 존재론을 추론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과 자연을 이해함은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다. 관찰과 실험에 의한 지식의 축적이 그 자체로 문명에 속한다. 인간에게 문명이 없다면 인간은 물질을, 자연을, 생명을, 존재를, 신을 인식할 수 없다.

신(神)≫존재≫생명≫자연≫물질로 전개하는 근거와 사실간의 맥락은 진리≫세계≫진보≫역사≫문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존재론에서 존재의 근거가 신이듯이 인식론에서 세계의 근거는 진리다.

자연 개념이 물질 개념에 빈곤한 존재의 시간성을 보완하듯이 역사 개념은 문명 개념에 빈곤한 세계의 시간성을 보완한다. 진보가 그 역사 개념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세계가 보충하며 진리가 최후에 완전하다.

하나의 명제는 전제와 진술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전제가 주어가 되고 진술은 술어가 된다. 전제가 근거가 되고 진술은 사실이 된다. 논리의 추론은 사실을 토대로 근거를 파악하는 것이다. 결과를 토대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 주어 ≫ 술어 (언어)
● 전제 ≫ 진술 (명제)
● 존재 ≫ 인식 (구조)
● 원인 ≫ 결과 (존재론)
● 근거 ≫ 사실 (인식론)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첫째 프레임을 알고 둘째 컨셉을 안다는 것이다. 프레임이 주어이면 컨셉이 술어이다. 이것이 명제에서는 전제와 진술을 이루고 구조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이루어 근거와 사실이 된다.

자동차를 안다면 프레임과 컨셉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인간이 만든 탈것이며 마차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프레임을 아는 것이고 휘발류로 엔진을 구동시켜 가는 원리를 아는 것이 컨셉을 아는 것이다.

인식론은 존재론을 복제한다. 이는 자동차의 컨셉인 엔진의 구조가 마차를 복제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마차라면 말이 바퀴를 끌듯이 자동차라면 피스톤이 플라이휠을 회전시킨다.

자동차 엔진 속에는 작은 마차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인식론 속에는 존재론이 숨어 있다. 진리에는 신이 숨어 있고 세계에는 존재가 숨어 있고 진보에는 생명이 숨어 있다. 역사에는 자연이 문명에는 물질이 숨어 있다.

선풍기 속에는 작은 부채가 숨어 있다. 씨앗 속에는 배아의 형태로 작은 나무가 숨어 있다. 모든 컨셉 속에는 작은 프레임이 숨어 있다. 모든 인식론 속에는 작은 존재론이 숨어 있다. 이 원리를 알면 술술 풀려서 저절로 알게 된다.

존재론의 신을 복제한 것이 인식론의 진리다. 존재론은 자연의 영역이고 인식론은 인간의 영역이다. 자연의 존재를 복제한 것이 인간의 세계다. 이렇게 존재론과 인식론은 다이렉트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공동체, 국가, 권력, 투쟁, 사회를 모르겠거든 그 왼쪽의 인간, 실존, 자아, 일상, 인생를 보면 된다. 공동체 속에는 인간이 숨어 있고 국가 속에는 실존이 권력 속에는 자아가 숨어 있다.

‘신≫존재≫생명≫자연≫물질’이 세트를 이루고 패키지를 이루어 인간 세계에 반영된 것이 ‘진리≫세계≫진보≫역사≫문명’이다. 그러므로 짝이 있다. 신과 진리, 존재와 세계, 생명과 진보, 자연과 역사, 물질과 문명은 서로가 짝이다.

인간, 실존, 자아, 일상, 인생
공동체, 국가, 권력, 투쟁, 사회

‘이다’가 커다란 울타리라면 ‘있다’는 그 울타리 안에 지어진 집이다. ‘이다’가 프레임이면 ‘있다’는 컨셉이다. 그 집에는 자아와 일상과 인생이라는 식구들이 살고 있다. 인생의 장면들이 모여서 일상을 이룬다.

존재론의 자아에 해당하는 인식론의 개념이 권력이다. 둘은 짝이다. 자아(自我)란 곧 인간 내부의 권력인 거다. 내 안에 나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이 있다. 그것이 자아다. 자아란 곧 자기결정권이다.

인간에게 자아라는 권력이 있듯이 공동체에는 권력이라는 자아가 있다. 권력은 국가라 불리는 인격체의 자아인 거다. 존재론의 인간이 복제되어 인식론의 사회로 모여 투쟁을 낳고, 투쟁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국가를 낳는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공동체가 국가라는 단위로 집단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낳듯이 인간은 실존이라는 단위로 자아의 의사결정을 낳는다. 집단에서의 국가가 개인에서의 실존인 거다.

원시 부족사회에는 국가가 불명하다.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공동체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특정하듯이 원시 부족사회에도 그러한 역할이 있다. 마찬가지로 실존은 자아가 미치는 범위를 특정한다.

프레임과 컨셉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존의 정확한 개념은 인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컨셉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생을 관통하는 테마다. 인생이라는 그림의 주제가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는 거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고 한 편의 드라마와 같고 한 곡의 연주와도 같다. 마땅히 주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무너지고 만다. 조각나고 만다.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일관성을 잃고 안정감을 잃는다. 불안해진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기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오직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역반응을 통해서만 자기를 드러낸다. 그것은 자아가 미약한 것이다.

자아가 미성숙하면 일상이 위태로워진다. 아침과 저녁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하루가 완성되지 않고 일이 마무리되지 않고 산만해진다. 인생의 항로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서성거리는 것이다.

정신, 깨달음, 가치, 의미, 마음
윤리, 이상, 미학, 규범, 도덕

개인의 정신이 공동체의 윤리다. 개인의 깨달음이 공동체의 이상이 되고 개인의 추구하는 바 가치가 사회의 추구하는 바 미학이고 개인의 의미가 사회의 규범이고 개인의 마음이 사회의 도덕이 된다.  

정신이라는 도로에 깨달음이라는 자동차의 가치라는 엔진이 구동되어 의미라는 질주로 마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윤리라는 도로에 이상이라는 차가 미학의 엔진을 달고 규범으로 질주하여 도덕이라는 정거장에 도달한다.

이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패키지를 이루고 맥락을 이룬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 세트 안에는 각각 하나의 엔진이 있고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드시 심장이 있다. 엔진이 있다. 개인은 가치가 심장이고 공동체는 미학이 심장이다. 식물은 광합성이 심장이고 국가는 권력이 심장이고 세계는 진보가 심장이고 존재는 생명이 심장이고 인간은 자아가 심장이다.

이성은 사랑이 심장이다. 사상은 소통이 심장이고 생존은 이익이 심장이고 생산은 신뢰가 심장이다. 존재론은 정신≫깨달음≫가치≫의미≫마음이 심장이고 인식론은 윤리≫이상≫미학≫규범≫도덕이 심장이다.  

어떤 사실이 주어져 있을 때 먼저 프레임과 컨셉부터 찾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구조론을 직관한 것이다. 프레임 안에 컨셉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좋다.

그리고 그 컨셉 안에 제어개념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완성에 가깝다. 제어는 전축의 바늘과 같고, 라디오의 안테나와 같고, 검의 칼날과 같고, 연필의 촉과 같은 접촉부분이다. 구조가 있는 것은 반드시 접촉부분이 있다.

구조의 핵심이 프레임과 컨셉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라디오는 안테나와 증폭장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직관한다. 그냥 직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정신≫깨달음≫가치≫의미≫마음은 존재의 안테나이고 윤리≫이상≫미학≫규범≫도덕은 인식의 안테나다. 안테나를 찾으면 그 안테나를 둘러싼 증폭장치를 발겨할 수 있고 전부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프레임과 컨셉, 증폭장치와 안테나, 방아쇠와 공이, 손잡이와 칼날, 양초와 심지로 되어 있다. 예외는 없다. 이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는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다. 있을 수 없다.   

프레임은 바깥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이고 컨셉은 그 울타리 안의 요소들을 하나의 기준 아래 묶어주는 것이다. 소설이라면 추리소설인가 범죄소설인가 애정소설인가 판타지 소설인가 하는 장르가 그 프레임이 된다.

장르를 정하면 기본적인 스토리 구조가 나와주는 것이다. 에피소드들을 묶어 통일성을 부여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극이 바라보는 바가 있고 나아가는 방향성이 있다. 반드시 있다.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는가? 아니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만약 그대가 어떤 사물, 혹은 조직, 혹은 대상, 혹은 사건, 혹은 진술이든 간에 거기서 프레임과 컨셉을 찾고 작동원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깨달음이다.

핵심은 제어다. 제어는 두 갈래 갈림길 앞에서 이쪽으로 갈것인지 저쪽으로 갈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반도체와 같다. 정신≫깨달음≫가치≫의미≫마음과 윤리≫이상≫미학≫규범≫도덕의 의미는 결국 제어에 있다.

프레임 안에 컨셉이 있고 컨셉 안에 제어가 있다. 안테나가 있다. 촉수가 있다. 더듬이가 있다. 눈이 있다. 날이 있다. 방아쇠가 있다. 스위치가 있다. 그러므로 통제할 수 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

인간은 정신≫깨달음≫가치≫의미≫마음이라는 안테나에 의해 컨트롤 되고 사회는 윤리≫이상≫미학≫규범≫도덕라는 안테나에 의해 컨트롤 된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게 조절한다.

이성, 인권, 사랑, 자유, 욕망
사상, 지혜, 소통, 지식, 언어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의 밀도를 나타낸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통하되 겉으로가 아닌 속으로, 형식으로가 아닌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통하는 것이다. 나의 전부로 상대의 전부를 끌어내기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자유를 관계망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자유는 사랑할 자유다. 자유없이 사랑할 수 없다. 노예는 사랑할 수 없다. 자유가 없는 천민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변학도는 자유없는 성춘향을 억압한다.

성춘향의 사랑은 성춘향의 자유에 의해 담보된다. 자유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 없는 자유는 허무다. 사랑과 자유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이렇듯 서로 얽혀 있다. 마찬가지로 인권은 그 안에 사랑과 자유를 담고 있다.

사랑은 이성의 안테나이고 소통은 사상의 안테나이다. 조속기와 같다. 넘치고 모자라지 않게 조절한다. 차가운 이성이라는 표현은 틀린 말이다. 그 안에 사랑과 자유와 욕망을 담지 않을 때 이성은 죽는다.

이성이 차가운 이유는 능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고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내부에 인권과 사랑과 자유와 욕망이라는 조절장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자유가 통제하고 자유는 사랑이 통제한다.

사랑은 인권이 통제하고 인권은 이성이 통제한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지식이, 지식은 소통이, 소통은 지혜가, 지혜는 사상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지혜없는 소통은 실패한다.   

인권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 내부에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테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로 그 인간의 삶 전체를 통일시키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인간의 행동은 상대방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무관하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원숭이를 때리면 화를 낸다. 이때 원숭이의 화내기는 원숭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원숭이를 괴롭혀 화나게 한 것이다. 만약 이렇듯이 인간이 단지 외부에서의 작용에 반작용할 뿐이라면 인간은 조종된다. 인간은 돈으로, 폭력으로, 사탕발림으로 꾀어서 조종할 수 있다.

인권이란 그러한 외부에서의 작용으로 인한 조종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라. 좋은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나쁜 일이 있으면 슬퍼한다. 그렇다면 좋거나 나쁜 소식을 주는 방법으로 당신을 조종할 수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러한 조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권이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권리다. 권리는 특허권, 소유권과 같아서 절대적이다. 특허를 주지 않으면 발명가는 발명하지 않고 작가는 창조하지 않는다.

소유권이 없으면 생산하지 않는다. 인간의 권을 부정하면 사회는 실패로 돌아간다. 인간은 밖에서 조종할 수 없고 내부의 것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것이 인권이기 때문이다. 소유권, 특허권 같은 권들이 모여서 인권을 이룬다.

인간의 존엄하다. 인권이 있기 때문이다. 소유권, 특허권, 참정권, 생존권, 행복추구권 같은 권들이 있어서 외부에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권들의 지향을 따라 그것을 완성시키려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인간은 행복이나 쾌락이나 소유나 생존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지향하며 완성은 이야기의 완성이며 이야기는 그 권의 발휘로 성립하는 것이다. 내 안에 권을 완성할 때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무엇인가? 인간은 사랑과 자유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사랑의 완성, 자유의 완성, 욕망의 완성을 지향하므로 외부에서 작용하여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소통하여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동의를 구해야 하므로 사상과 지혜와 소통과 지식과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개는 그렇지 않다. 먹이를 주어 길들일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 이성과 인권과 사랑과 자유와 욕망은 하나의 패키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의 하나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는 충분히 통제할 수 없다. 개는 식욕을 이용하여 통제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욕망한다. 언뜻 보기에는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인간을 조종할 수 있을듯 하지만 욕망을 충족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 자유를 주지 않으면 인간은 욕망하지 않으므로 자유없이 욕망의 충족은 불가능하다.

자유를 주려면 사랑을 허용해야 한다. 사랑을 주려면 인권을 인정해야 한다. 인권을 주려면 이성을 각성시켜야 한다. 결국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욕망 하나를 충족시키려 하다가 자유와 사랑과 인권과 이성까지 주게 되는 것이다.

반면 그것이 없이 단지 욕망만을 충족시켜 주어도 좋다는 인간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노예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이성이 없다. 이성이 없으므로 인권이 없고 인권이 없으므로 사랑이 없고 자유가 없다.

그들에게 이성을 주는 방법은 사상과 지혜와 소통과 지식과 언어를 허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가 사랑할 자유이듯이 지식은 소통할 지식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허무다. 지식없는 소통은 죽은 소통이다.

지식의 크기는 자유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랑의 크기는 소통의 크기에 비례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파트너와 온전하게 소통하지 못한다면 서로의 대화가 겉돌고 있다면 그대의 사랑은 밀도가 낮은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인권의 크기는 지혜의 크기에 비례한다. 지혜가 없을 때 권리도 없다. 맞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권과 지혜는 정밀하게 얽혀있다. 사상이 없고 지혜가 없고 소통하지 못할 때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생존, 소유, 이익, 쾌락, 행복
생산, 자본, 신뢰, 효율, 문화

이다≫있다≫낫다≫하다의 전개를 거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생존과 소유와 이익과 쾌락과 행복이 남는다. 사회라 생산과 자본과 신뢰와 효율과 문화가 남는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이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과정을 거치며 한 바퀴 돌아서 원을 그린다. 동그라미가 된다. 존재론은 신≫인간≫정신≫이성≫생존으로 전개되고 인식론의 생산과 연결된다. 그리고 사상≫윤리≫공동체≫를 거쳐 최종적으로 진리에 도달한다.

무엇인가? 처음과 끝은 다시 만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돈을 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돈으로 집을 사려는 것이다. 즉 생존≫소유≫이익≫쾌락≫행복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신,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을 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생산≫자본≫신뢰≫효율≫문화를 원하지만 본질에서는 진리≫세계≫진보≫역사≫문명을 원한다. 진보주의자는 생산≫자본≫신뢰≫효율≫문화을 주장하고 보수주의자는 생산≫자본≫신뢰≫효율≫문화를 원한다.

그리고 그 둘은 연결된다. 생산은 진리로, 자본은 세계로, 신뢰는 진보로, 효율은 역사로, 문화는 문명으로 귀결된다. 다만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 진보가 진짜 진보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은 생존, 소유, 이익, 쾌락, 행복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을 원한다. 다만 생존이 구체적인데 비해 神(신)은 추상개념이므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수한다.

그 신이 그 신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심하고 부정하고 반대하고 등을 돌리고 비웃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다. 생존, 소유, 이익, 쾌락, 행복이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로 환원될 때 허무를 극복한다.

신뢰의 개념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어떤 드러난 사실을 믿느냐 안믿느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상대방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상대가 어떻게 하든 나는 일관되게 내 길을 간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상대방이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나쁜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두렵기 때문에 이쪽을 떠보려 한다. 떠보는 방법은 해꼬지를 하는 것이다.

해꼬지 한 다음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알아내려 든다. 그 방법으로 정보를 획득한다. 모든 나쁜 사람은 내 안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잘못된 방법으로 대응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그러한 해꼬지를을 무력화 시킨다.

해꼬지의 진짜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있다. 작용을 가하여 반작용의 크기를 체크하기다. 이때 상대가 어떻게 해꼬지하든 이쪽의 대응은 언제나 같다는 일관된 신호를 보냄으로써 무력화시킬 수 있다.

상대방이 이쪽을 해꼬지 할 필요를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일관된 정보를 주어 상대방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무엇인가? 결국 믿음은 사회에 예측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믿음이 이익을 만들듯이 개인에게는 이익이 신뢰를 만든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쫓아간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지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이익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

여기서 이익이 금전적 이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익은 곧 합리성이다. 합리성이라는 단어가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므로 직관적 이해를 돕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이익이라는 표현을 쓸 뿐이다.

인간이 합리성을 추구하므로 신뢰할 수 있다. 합리성이란 길을 갈 때 최단거리로 가고, 일을 할 때 최고능률로 하고, 놀이를 할 때 가장 즐겁게 놀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능률을 쫓는 것이다.

이때 최적화된 코스는 하나 뿐이다. 모로 가도 서울에서 부산을 갈 수 있지만 지상에서 가장 빠른 길은 고속도로다. 신뢰도 이와 같다. 상대방이 선택지를 무력화 시켜 하나만 남겨두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고도의 합리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선택지가 여럿이 되어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사회는 붕괴된다. 물론 이러한 합리성의 추구가 사회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익을 기준으로 생존으로 갈수록 획일화 되고 행복으로 갈수록 다양화 된다. 생존의 길은 하나 뿐이지만 행복의 길은 너무나 많은 것이다. 경쟁의 승자는 하나뿐이지만 잔치는 손님은 많을수록 좋다.

마찬가지로 신뢰를 기준으로 생산으로 갈수록 획일화 되고 문화로 갈수록 다양화 된다. 생산은 최고의 효율을 쫓으므로 하나의 정답이 있을 뿐이지만 문화는 그 길이 많을수록 성원의 만족도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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