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어 ‘막장’을 떠올릴 수 있다. 분청사기를 보면 이건 정말 막장에서 살아 돌아온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가 추구할 수 있는 최후의 세계. 그래서 막장이다.
도자기는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었다. 그 당시는 그랬다. 도공은 자기 자신을 예술가로 인식하지 못했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 그런 걸작은 가마를 헐면 100에 한 개나 나오는 건데 그 내막을 보르는 귀족이 좋은 것으로만 100개를 주문하고 그대로 조달을 못하면 매질을 하려드니 귀족의 주의를 끄는 좋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중국제 도자기는 크고 화려하고 느끼하다.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지방 졸부의 허세가 반영되어 있다. ‘어떤 걸 원하세요? 뭐든 원하는 대로 제작해 드립니다. 우리 살람 못만드는게 없어요. 하오하오!’ 하는 제조업 종사자의 비굴한 태도가 엿보인다.
일본 꽃병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확실히 주문자의 기호에 영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가 좋아할까 참 세심하게도 고려했다. 고려청자도 귀족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조선 백자에는 확실히 양반의 기호가 반영되어 있다.
요즘 나오는 도자기도 그렇다. 예쁜 것도 많고 특이한 것도 많고 세련된 것도 많은데 대략 소비자의 눈길을 끌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값을 올려받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느낌이다. 그건 상품이다. 도자기가 아니다. 장식품이다.
분청사기는 어느날 도자기 산업이 망해서 귀족들의 주문이 끊어지자 도공이 ‘에라이 막장이다’ 하며 그냥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게 느껴진다. 도자기산업이 무너지면서 산업에서 예술로 변형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정말이지 누구 눈치 안 보고 만든 것이다. 성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려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논리의 지극한 경지에 닿아있다.
주문자의 기호와 취향과 신분과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분청사기에는 그것이 없다. 고려 귀족문화가 막을 내리고 조선 양반사회가 유교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부리기 전에 잠시 순수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의 통제도 귀족의 통제도 이데올로기의 통제도 없이 그냥 마음대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되는 것이다.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인위가 배제되고 자연의 본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수석과도 같다. 내가 원하는 형태의 돌은 자연에 없다. 다만 자연이 원하는 형태의 돌이 굴러다닐 뿐이다. 나의 기호와 자연의 본래가 우연히 일치하는 지점이 발견된다. 본래 있던 것이 저절로 배어나오는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찾아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