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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879 vote 0 2007.04.10 (17:03:13)

'거짓 부적 쓰는 자칭 지식인들'

한국화가 한경혜(30)씨. 그는 뇌성마비 4급 장애인이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지만 집안형편 탓에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7살 때 큰 고비가 왔다. 몸이 화석처럼 굳어가고 밥은 커녕 물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의사도 가망없다며 손을 놓았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술로 연명했고, 가족을 때리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한씨와 한씨의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희망이 사라진 모녀는 마지막으로 성철스님이 있던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다.

삼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다는 성철 스님을 뵙기 위해 아이와 엄마는 사흘에 걸쳐 삼천배를 올렸다. 어렵사리 절을 끝낸 뒤, 아이는 기다시피 성철 스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스님, 저는 언제 죽어요?”
“오늘 저녁에 죽어라.”
“어디서 죽을까요?”
“느거 집에 가서 죽어야지!”

그 때부터 아이는 물을 넘기기 시작했다.[옛 한겨레 기사 발췌 - 원문에는 번다한 뒷이야기가 있으나 필자는 군더더기로 본다. 원문이 이해를 도울 수도 있으나 종교적 관점에 기울어 있어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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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삼천배가 건강에 이롭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오자병법의 섬뜩한 교훈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사를 읽을 때..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점에 주의를 둔다. 기사 원문도 그 점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그러나 잘못이다. 살든 죽든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해인사 백련암을 찾은 무수한 환자들 중 과연 몇이나 이같이 살아났을까. 성철은 의사가 아니다. 그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그 높은 산꼭대기 작은 암자에서 해마다 추운 겨울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올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결국은 죽는다. 다 죽는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사람을 살리고자 했다면 먼저 의사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맞다. 살고죽는 것 보다 더 상위의 가치가 있다.

‘오늘 저녁에 죽어라’.. 아이가 이 말을 듣고 죽었다면 사람들은 성철을 비난할 것이다. 죽어라 해서 죽었으니 비난할만도 하다. 성철은 그러한 비난까지를 감수한 것이다. 비난을 감수하고 그가 얻으려 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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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죽어라’.. 이 말을 우리당에 들려주고 싶다. 오늘 저녁에 죽지 못하면 내일 아침에 살아나지도 못할 것이다. 일찍이 유시민도 말한 바 있다. 우리당이 살아날 가능성은 1프로 밖에 안 된다고.

‘느그 집에 가서 죽어야지’.. 이 말 한번 가혹하다. 잔인하다. 그렇다. 죽든 살든 그것은 너의 문제다. 어리광 부리지 말라. 도움을 구하지 말라. 누구도 너를 살려줄 수는 없다. 그 자세 한 번 냉철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체면치레용, 알리바이용, 성의표시용 거짓을 발표하고 있다. 농민들에게 택도 없는 ‘부적쪼가리’나 써주면서 ‘요 부적을 허리춤에 딱 넣고 있으면 FTA 물리치고 살 수 있다’고 거짓말 한다.

적어도 성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만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자. 많은 환자들이 성철을 찾아왔을 것이고 그 환자들 다수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저녁에 죽어라’.. 그 순간 아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했다. 성철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성철에게 도움을 얻어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담대한 아이가 드물게 성철을 만난 것이다.

성철 자신은 오래 전부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었다. 죽음을 극복한, 혹은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한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 산꼭대기에서 만난 것이다. 그 순간 둘은 통했다. 소통한 것이다.

둘은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 서로를 알아보았으니까. 노인과 꼬마라는 나이차이를 넘어, 성직자와 신도라는 신분차이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것이다. 그렇게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전부로 너의 전부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삼천배는 중요하지 않다. 종교도 중요하지 않다. 믿음도 중요하지 않다. 삶과 죽음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만남이 중요하다. 그 만남은 거룩한 만남이어야 한다.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끝을 보고 온 그런 만남이어야 한다.

성철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당차고 기개있는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높은 곳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이다.

뜻 밖에 그 사람은 7살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너털웃음 한 번. 그것이 전부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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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지식인들이 원로병에 걸려 있다. 강준만이 처음부터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다. 김지하가 처음부터 율려병 환자였던 것도 아니다. 황석영이라서 다르겠는가. 언제부터인가 겁 많고 걱정도 많은 뒷방늙은이로 퇴행해 버렸다.

소인배가 과도하게 책임있는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박근혜가 원래부터 수구꼴통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정일과 대화할 정도로 생각있었다. 대통령이라는 책임있는 자리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바보가 되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 평범한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 정치가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스트레스 많이 받는 직업이다. 평범한 사람이 책임있는 위치에 오르면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신체와 정신의 작용에 의해 그렇게 된다.

멋쟁이 시인 김춘수도 전두환 앞에서 바보가 되었다. 미당 서정주도 전두환 앞에서는 말당선생으로 퇴행해 버렸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된다. 바보가 된다.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선수는 극소수다.

‘저 가엾은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이 내 말 한마디에 달렸다’고 착각하는 순간 돌팔이 의사는 부적을 쓰게 된다. ‘이 부적을 허리춤에 넣고 자면 살아날 수 있다’고 거짓말 하게 된다. 냉철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들이 부적을 쓴다. 김지하가 부적을 쓰고 강준만이 부적을 쓰고 황석영이 부적을 쓴다. 손학규 부적을 쓴다. 정운찬 부적도 쓴다. 고건부적은 시효가 지났다. 중도통합 부적도 있다. 신당부적도 있다. 얼씨구 잘하는 짓이다.

다 죽어가는 우리당이 부적 쪼가리 한 장으로 살아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거짓희망 주지 마라. 적어도 성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당은 언제 죽는가?’ ‘오늘 저녁에 죽어라.’ ‘우리당이 어디서 죽을까?’ ‘너그 집에서 죽어라’ 우리당이 죽든 살든 그것은 너희 정치꾼들의 집안문제일 뿐이다. 노무현이라면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만약 산다면, 만약에 우리당이 극적으로 살아난다면 그것은 네가 네 스스로 너의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이지 다른 그 무엇의 덕분이 아니다. 누구의 덕분도 아니다. 누구도 밖에서 개입하여 우리당을 살릴 수는 없다.

만약 우리당 너희가 죽는다면 네가 네 스스로 너의 생사의 문제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밖에서 개입하여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너는 살아도 너 스스로 살고 죽어도 너 스스로 죽는다. 나는 단지 진실을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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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난국이다. 난국은 돌파에 의해 타개될 뿐 결코 결코 봉합되지 않는다. 미봉책은 없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더 쳐내야 한다. 더 솎아내야 한다. 김근태 정동영부터.

만약 우리당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범개혁세력의 집단지성, 집단인격, 집단이성, 그 집단지능의 IQ가 상승한 때문이지 다른 그 무엇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네 스스로 너의 내부에서 끌어내야 할 '그 무엇'이다. 만약 너의 내부에 너를 살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면 너는 희망이 없다.  

성철은 도무지 무엇을 믿고 간 크게도 ‘너는 오늘 죽어라’ 하고 단호하게 말했을까? 참으로 겁대가리 없는 말이다. 원로답지 않은 말이다. 할아버지 답지 않은 말이다. 성직자 답지 않은 말이다.

원로가 되면 외로워진다. 혼자가 된다. 그 ‘믿는 것’이 없어진다. 범개혁세력의 집단지능을 믿지 않고 국민의 균형감각을 믿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의 생사가 달렸다고 착각한다. 반드시 수구화 된다.

소인배가 책임있는 자리에 오르면 노파심 때문에 소심해져서 망하고 패기를 잃어서 망하고 기개를 잃어서 망한다. 소인배가 책임없는 자리에 있으면 네탓이야 책임전가로 어리광 부리다 망한다. 역할게임 중독이다. 벗어나야 한다.

일곱살 소녀는 살아났다. 체력단련 삼천배 효과가 아니다. 종교적 믿음 때문도 아니고 신비주의 기적 때문도 아니다.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더는 어리광 부리지 않았다는 거다. 원래 그런 아이가 그 산꼭대기에서 그 성철을 만났다.

죽어가는 일곱살 아이의 목숨 앞에서 성철은 소심해지지 않았다. 조바심내지 않았다. 아이가 죽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아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 부적 쓰지 않았다. 그런 자세가 일곱살 아이 내부의 감추어진 '그 무엇'을 끌어낸 것이다.

성철은 자신이 아이를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 솔직했다. 그 솔직함이 그 아이 내부의 숭고함과 통했다. 통해야 한다. 진정 누구와 통해야 하는가? 국민과 통해야 한다.

지금 국민의 마음은 그 일곱 살 아이의 마음과 같다. 국민은 스스로 비관하여 말한다. 어리광으로 말한다. ‘나는 언제 죽나요?’ ‘너는 오늘 죽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아이 내부의 숭고함을 십분 끌어낼 수 있다.

우리 국민 내부의 드러나지 않은 위대함을, 우리 유권자들 내부의 드러나지 않은 숭고함을 끌어낼 수 있는 이가 자격이 있다. 그 숭고함과 소통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그 위대한 스위치를 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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