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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954 vote 0 2007.02.16 (10:57:51)

<개인적인 글입니다>

구조의 탄생

태초에 두 우주가 충돌하여 빅뱅을 일으키며 밀도가 탄생했다. 밀도가 증가하자 공간의 약한 부분이 찌그러져서 별이 탄생했다.

별은 공간의 상처다. 우유를 막대로 휘저으면 버터가 생긴다. 별의 탄생도 이와 같다. 빅뱅에 의해 공간은 크게 휘저어졌다.

풍선을 물속 깊이 가져가면 쪼그라든다. 탁구공만큼 작아질 수도 있다. 풍선 속의 입자들은 수심이 깊어질수록 더 적은 자유도를 누리게 된다.

자유도를 잃은 만큼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공간이용의 효율성은 둘이 하나를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 2가 1을 공유할 때 효율이 얻어진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두 어린이가 하나의 책상을 공유하는 것과 같다. 빅뱅에 의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된 것이 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때 하나의 책상이 두 사람의 행동반경을 통제한다. 통제자와 통제대상이 구분된다. 책상이 벼리면 두 어린이는 갈피다. 벼리가 갈피를 통제한다.

흥부아들 두 사람이 하나의 옷을 공유함과 같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다른 사람도 함께 화장실을 가야한다. 2인 삼각 달리기와 같다.

닫힌계에 밀도가 부여되면 내부의 구성인자들은 구조적으로 최적화된다. 그 최적화의 방법은 2가 1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때 1이 2를 통제한다.

여기서 밸런스가 성립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1이 2를 통제하면서 방향성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통제는 구조가 크게 성장해도 그대로 이어진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 종은 암컷과 수컷의 수정과정에서 두 세포핵이 하나의 세포벽을 공유하는 통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모든 경쟁자들은 시장원리라는 통제자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시장 그 자체를 확대하지 않는 한 시장 안에서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

일본경제가 최근 주춤한 이유는 시장을 확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라는 파이가 커지지 않는 한 내부경쟁은 제로섬게임이 될 뿐이다.  

구조는 1에 의한 2의 통제다. 지구상의 모든 건축은 중력이라는 통제자에 지배된다. 그러한 통제과정에서 질서가 성립한다. 세상은 질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제구조가 질적으로 고도화 된 것이 ‘질’이다. 존재의 구조는 질≫입자≫힘≫운동≫량의 5가지 갈피에 의해 단계적으로 고도화 된다.

여기서 질에 갈수록 집적되며 량에 갈수록 계는 해체된다.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통제자와 통제대상의 상호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 벼리 1 - 통제자  
● 갈피 2 - 통제대상

하나의 운동이 두 양을 통제한다. 하나의 힘이 두 운동을 통제한다. 하나의 입자가 두 힘을 통제한다. 하나의 질이 두 입자를 통제한다.

질이 벼리면 입자가 갈피다. 입자가 벼리면 힘이 갈피다. 힘이 벼리면 운동이 갈피다. 운동이 벼리면 양이 갈피다. 벼리는 항상 1이고 갈피는 항상 2다.

● 벼리(통제자) ≪≫ 갈피(통제대상)
● 질≫입자≫힘≫운동≫량

콜더의 모빌과 같다. 수직 벼리면 수평이 갈피다. 수직구조 하나에 수평막대 둘로 정렬한다. 천칭저울과도 같다. 축 하나에 접시 둘이 밸런스를 이룬다.

⊥로 나타낼 수 있다. 수직 1이 좌우로 나누어진 수평 2를 통제하고 있다. 하나의 벼리와 두 갈피가 하나의 모듈을 이룬다. 존재는 모듈의 집적이다.

기존의 이론에서 존재의 구조를 설명할 때 쉽게 동원되는 것이 원자와 힘이다. 그러나 원자는 근거가 없는 가설에 불과함이 증명되고 있다.

반면 힘은 확실히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대신 모호하다. 원자는 뚜렷하나 근거가 불명하고 힘은 확실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질은 입자도 아니고 힘도 아니다. 물질은 벼리와 갈피로 되어 있다. 벼리는 입자의 성질을 드러내고 갈피는 파동의 성질을 나타낸다.

존재는 모듈이며 하나의 모듈 안에 둘이 공존한다. 하나의 질 안에 두 입자가 있고 하나의 입자 안에 두 힘이 있고 하나의 힘 안에 두 운동이 있다.

물리학에서 입자를 위주로 한 입론은 양자이론, 초끈이론에 의하여 거의 붕괴되어 가고 있다. 입자관념은 인간의 눈이 만들어낸 착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힘을 위주로 한 입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를 인력과 척력, 원심력과 구심력, 강력과 약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함은 타당하지 않다.

그 힘들은 하나의 벼리에 붙잡힌 두 갈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그래서 뉴튼은 만유인력이라고 했다.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인력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구조론으로 볼 때 논리적 모순이다. 끌어당긴다는 말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풍선이 물에 뜨는 이유는 수압이 풍선을 밀어내기 때문이지 수면이 풍선을 잡아당겨서가 아니다. 잡아당긴다는 표현은 잡다+당기다로 너무 복잡하다.

인력은 끌어당기는 것이다. 먼저 상대를 붙잡아서 고정시켜 놓고 다음 거기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여 그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 과정의 복잡함이 문제로 된다. 인력은 정지시키기+방향성을 부여하기+진행시키기의 세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붙잡는 것은 벼리다. 벼리 하나에 갈피 둘이 있으므로 어떤 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미는 힘과 당기는 힘 사이의 교착이 성립해야 한다.

인력이 성립하려면 먼저 붙잡아야 하고 붙잡으려면 미는힘과 당기는 힘을 교착시켜야 하는데 이를 당기는 힘 하나로 설명하면 벌써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만유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힘은 당기는 힘이 아니다. 닫힌계 안에 밀도가 증가하여 구성소들이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찾는 것이 만유인력이다.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달이 지구 주위의 나선형 회전궤도를 선택할 때 가장 최적화된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달성되는 것이다.

만원버스 안에서 승객은 되도록 벽쪽으로 붙으려 한다. 가운데 있으면 양쪽에서 압박을 받지만 벽에 기대서면 한쪽으로만 압박을 받기 때문이다.

이때 승객은 갈피가 되고 버스의 벽이나 손잡이는 벼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달은 지구주위의 회전궤도를 따라갈 때 가장 압박을 덜 받는다.

벨로드롬을 도는 사이클이 비탈을 올라탈 때 훨씬 더 먼 거리를 돌지만 역학적으로는 최적화된 코스다. 오히려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누가 사이클 선수를 잡아당겨서 벨로드롬을 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에너지 이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길이기 때문에 비스듬한 경사를 타는 것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시켜서 설명해야 한다. 인력은 붙잡기, 방향지시, 당기기의 3단계 구조로 되어있어서 너무 복잡하다. 더 쉬운 논리로 설명해야 한다.

태양과 지구가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인력 때문이 아니라 공간에 밀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입자들이 한곳에 모이지 않으면 안되는 속사정이 있었다.

팽이가 회전할 때 축을 중심으로 구심력이 성립하는 이유는 몸체의 회전반경이 짧을수록 에너지 이용의 효율성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팽이가 비틀비틀 쓰러지지 않고 발딱 일어서서 중심을 잡는 것이 더 효율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중력의 압박이 그 효율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하나가 둘을 공유하는 벼리와 갈피의 원리에 의해 지름길을 가는 특성을 발휘한 결과 구심력이 성립하고 있다. 원심력은 구심력의 반작용에 불과하다.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돌아가는 팽이의 벼리가 된다면 원심력과 구심력은 갈피다. 두 갈피는 서로 교착되어 팽이의 비틀거림을 차단한다.

● 원심력과 구심력의 교착에 의해 팽이의 비틀거림 중지
● 중력에 의해 축을 중심으로 지구중심을 향하여 방향성 획득
● 팽이의 촉부분이 팽이전체를 대표하여 지구와 결합

“사과가 왜 떨어지지?”
“그야 사과가 무겁기 때문이지.”
“아 그렇군. 잘 알겠어.”

그러나 과연 이해한 것일까? 뉴튼이 만유인력이라는 한 마디로 해결함은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는 질문에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대답함과 같다.

사과는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거움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

물 속의 풍선은 쪼그라든다. 수압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풍선이 쪼그라든다는 것은 풍선 안에 있는 공기 입자들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다는 것이다.

수압에 의해 자유도가 줄어든 입자들은 자신이 차지한 공간을 조금씩 손실한다. 이때 손실당하지 않는 방법은? 그것은 풍선의 표면에 달라붙는 것이다.

만원버스의 가장자리에 서는 것이 안전한 것과 같다. 가운데 있으면 양쪽으로 밀리지만 가장자리에 있으면 한쪽으로만 밀린다. 그만큼 이득이다.

풍선의 혹은 만원버스의 가장자리부터 차곡차곡 정렬한다. 정렬하면서 2가 1을 공유할 때 얻어지는 차익에 의해 공간사용의 효율성을 달성한다.

먼저 버스의 벽이 벼리가 되고 벽에 기대서는 사람이 갈피가 된다. 다음 먼저 정렬한 가장자리 사람이 벼리가 되고 그 안쪽 사람이 갈피가 된다.

이러한 질서화 과정은 맞은편에서 진행되는 질서와 버스 가운데서 마주칠 때 까지 반복된다. 2가 1을 공유하는 이득들이 수렴되어 질서가 성립한다.

처음 입자들은 풍선 안에서 차지한 넉넉한 공간의 자유도에 의해 자유로왔지만 다음에는 질서화된 상태에서 외부의 압박에 대응하여 자유로와진다.

처음 버스의 승객들은 넉넉한 공간에 의해 자유로왔지만 다음 만원버스의 승객들은 그러한 차곡차곡 정렬됨에 의해 버스 자체의 흔들림에서 자유로와진다.

개인이 가진 자유를 반납하고 그 반납된 자유들이 수렴되어 그 집단 전체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구조다.  

● 개별입자의 자유도 - 버스의 승객은 차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 집단전체의 자유도 - 만원버스의 승객들은 버스가 흔들려도 안전하다.

질서는 반드시 방향성을 가진다. 벼리가 갈피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는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사회의 진보 역시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생태계는 제멋대로 진화한 것이 아니며 역사는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 때는 개인이 자유로왔지만 지금은 인류전체가 자유로워야 한다.

역사는 개인의 자유에서 가족의 자유, 시민의 자유, 국가의 자유, 인류전체의 자유로 나아가며 스스로를 재질서화 하고 그 질서의 질을 고도화 한다.

시골사람은 자유롭지만 그 가꾸어진 정원 안에서 자유로울 뿐이다. 도시에서는 자유가 없지만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

국가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함도 아니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 국가의 자유를 희생함도 아니다. 피드백에 의해 양자간에 밸런스를 이룬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길을 내었다면 그 옆에 집을 짓는 사람은 이미 닦여있는 길을 이용하므로 이득을 본다. 여기서 질서의 방향성이 성립한다.

나중 집을 짓는 사람은 그 먼저 닦은 길의 이용이라는 벼리에 잡혀버리는 것이다. 그 이득을 쫓다가 자기도 모르게 제어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담장을 둘러쳤다면 그 옆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한쪽에는 담장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이익을 본다. 이익 때문에 길들여진다.

이득을 포기하고 넓은 공터에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이득을 취하여 이미 지어진 집 옆에 집을 지을 것인가 사이에 밸런스를 추구함이 역사의 진보다.  

풍선에 밀도가 걸려 풍선이 쪼그라들면 모두가 이득을 보려고 하므로 질서가 생긴다. 이렇게 이득의 연속성이 쭉 이어지는 것이 동식물의 생장이다.

한 인간의 몸은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득을 꾀하다가 100조 명의 시민이 모여 거대한 세계를 구축한 것이 인간이다.

생물의 진화 역시 이러한 밸런스의 원리에 의해 일어났다. 그것이 유전정보의 집이다. 밸런스는 유전정보를 통제하는 3D게임의 저작툴이다.

3D가 2D보다 제작하기 쉽다. 이득을 제공하는 세포벽(풍선의 벽, 버스의 벽, 건물의 담장)이 통제자로 벼리가 되어 공간이용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벼리와 갈피 사이에 방향성이 있다. 벼리 1과 갈피 2의 모듈에 공간이용의 효율성이 있다. 먼저온 자가 나중온 자를 통제하며 연쇄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이 구조다. 통제자와 통제대상의 지배종속 관계가 성립하면서 질서가 성립한다. 반면 갈피 2의 서로간에 성립하는 대칭성에서 가치가 성립한다.

존재는 질서와 가치로 설명할 수 있다. 벼리 1이 갈피 2를 통제함은 수직적 질서다. 갈피 1이 짝이 되는 갈피 1을 찾아서 모듈을 구성함은 수평적 가치다.

인간이 결혼하여 가족을 구성함은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 효율성의 추구가 질서다. 그런데 가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짝을 만나야 한다.

그 짝을 만나는 과정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는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하여 애타게 서로를 부르는 그 비효율적인 과정이 가치다.

사랑은 비효율적이다. 분배는 비효율적이다. 정의는 비효율적이다. 선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을 통과하지 않고는 효율을 달성할 수 없다.

질서는 짝을 찾은 사람이 서로를 통제하며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다. 가치는 짝이 없는 사람이 짝을 찾는 비효율적인 과정이다.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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