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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400 vote 0 2006.12.27 (00:48:25)

(서프라이즈에 기고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 하나의 기준은 관점이다. 관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다. 주인의 시선으로 보는가 노예의 시선으로 보는가다.

철학은 관(觀)을 얻는 것이다. 견(見)이나 시(視)와 다르다. 관은 보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서 보는 것이다. 약자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고 강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다.

관(觀)은 관계로 본다. 관계는 연동되어 있어서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뀐다. 세계관이 바뀌면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도 바뀐다. 내 인격이 성숙할수록, 사회에서 내 지위가 올라갈수록 관(觀)은 변한다.

관(觀)은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설정이다. 관계는 세상과 사회의 체계 안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어떤 체계가 있는가? 세상에는 질서의 체계가 있고 인간의 사회에는 가치의 체계가 있다.

● 세계관 - 세상은 이렇다.
● 가치관 -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산다.

질서의 체계와 가치의 체계가 있다. 질서의 관(觀)이 있고 가치의 관(觀)이 있다. 질서는 세상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본래 그러함이다. 가치는 내가 그 세상에 맞서 일어섬이다. 전자는 세계관이요 후자는 가치관이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있다. 두 관점은 맞물려 있다. 하나가 변하면 다른 하나도 변한다. 둘이 맞물린 정도에 따라 둘의 관계는 긴밀해진다. 거기서 관점의 이동이 있다. 어느 수준으로 맞물려 있는가이다.

세상과 내가 정밀하게 맞물릴수록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인생관이다. 인생관은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밀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사이에서 내 위치를 찾는 것이다. 내 포지션을 찾는 것이다.

철학이란 간단히 말하면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거다. 모진 세상 살아가려면 ‘너희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이런 식으로 맞서겠다’는 심중에 품은 논리 하나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주류와 비주류, 굴종과 저항, 주도와 종속, 지배와 복종, 참여와 방관, 주인과 노예, 메인스트림과 아웃사이더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는 것이 인생관이다.

자연의 질서로 말하는 세계관과 사회의 가치로 말하는 가치관 사이에 나의 포지션인 인생관이 있다. 세계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다. 인생관은 그 세계 앞에 나의 위치다. 가치관은 세계와 나의 맞물리는 수준(value)이다.  

● 세계관은 자연의 질서다.
● 인생관은 세계 앞에서 나의 포지션이다.
● 가치관은 나의 포지션과 세계가 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수준이다.

철학의 결론은 가치관이다. 철학은 가치관으로 완성된다. 세계관과 인생관은 가치관을 유도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가치관은 세계관과 인생관의 정립에 따라 연동되어 움직이는 가치체계(value system)다.

이것이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이 별개가 아니다. 하나가 변하면 모두 변한다. 결론은 가치관이며 시스템 내부의 구조에 깊숙히 맞물려 들어가는 정도에 따라 그 가치의 수준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둘째 당신은 어느 지점에서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는가? 셋째 당신은 어느 수준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는가?


공자의 이순(耳順)

세상은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체계다. 질서의 체계와 가치의 체계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질서라면 그의 국가론은 가치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 세계의 질서라면 그의 혁명이론은 인간의 추구하여야 할 가치다.

철학은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둘째 내가 그 세상에 어떻게 맞서는가이다. 전자는 세계관이고 후자는 가치관이다. 그 사이에 나의 포지션이라 할 인생관이 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의 삶을 어떻게 창조하여 갈지가 결정된다. 여기서 문제는 관점의 이동이다.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가치는 대화한다. 혹은 대결한다. 그 결과로 심화된다.  

자동차를 능숙하게 운전할수록 자동차의 가치에 대한 기준이 바뀐다. 초보운전자는 조작하기 편한 일본산 자동차를 높이 평가하고 숙련된 운전자는 성능이 좋은 독일산 자동차를 높이 평가한다.

● 세계관 - 자동차를 운전한다.
● 인생관 - 나는 초보 혹은 숙련 운전자다.
● 가치관 - 나는 일본산 혹은 독일산 자동차가 낫다.

마찬가지로 삶의 깊이가 더해갈수록 가치관은 변한다. 세상이라는 자동차를 잘 운전하게 될수록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게 된다. 더 깊숙하게 세상과 맞물려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60세에 귀가 순해졌으며 70세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도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진위의 관점, 선악의 관점에서 벗어나 미학의 관점으로 상승했다는 뜻이다.

세상 앞에서 나의 포지션은 변한다. 포지션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은 ‘진위≫ 선악≫ 미추≫ 완성≫ 소통’의 관점으로 점차 상승한다. 뒤의 소통으로 갈수록 더 깊숙히 존재의 본질과 맞물린다. 세상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

● 가치관의 변화 - 진위≫선악≫미추≫완성≫소통
● 포지션의 변화 - 세계관≫인생관≫가치관

진위의 관점은 처음 만난 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을 겨우 판별한 정도이다. 선악의 관점은 좋은 여자 혹은 남자인지를 판별한 정도이고, 미추의 관점은 상대가 자기와 어울리는지를 판별한 정도이다.

완성의 관점은 마침내 둘이 한 편이 된 것이며 소통은 서로 사귐에 있어 서로의 잠재한 가치를 100프로 끌어내는 것이다. 소통의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 세상과 나의 맞섬에 의해 세상의 가치와 나의 가치를 백프로 끌어내야 한다.

뛰어난 연주자는 세상의 음을 백프로 끌어낸다. 그러면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백프로 끌어낸다. 조각가는 그것을 돌에서 끌어내고 화가는 그것을 캔버스 위로 끌어낸다. 도공은 흙에서 끌어내고 목수는 나무에서 끌어낸다.

사랑은 나의 백프로를 다하여 너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다. 삶은 나의 백프로들 다하여 세상의 백프로에 맞섬이다. 나의 전부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의 전모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실패다.  

처음은 겉돌게 된다. 세상은 세상이고 나는 나다. 나는 세상과 별로 상관이 없는 존재다. 나는 세상을 움직일 수 없고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다. 둘은 연애를 한다. 사귈수록 관계의 밀도를 높여간다.

진위판단에서 선악의 판단으로 미추의 판단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완성으로 소통으로 발전한다. 만나서 어울릴 때 불혹(不惑)하고 완성될 때 지천명(知天命) 하고 소통할때 이순(耳順)한다.

● 불혹 - 진위의 선악과 미추의 관점을 넘어서다.
● 지천명 - 나의 포지션이 완성되다.
● 이순 -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다.

자신의 포지션이 불안할 때는 진위를 판단하고 선악을 검사하고 미추를 판별하지만 자신의 포지션이 확보되면 그러한 판별과 검사가 불필요하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드나듦이 자유로우니 귀가 순해진다.
  
● 세계관의 과학 - 진위판단(하나의 정답이 있을 뿐이다.)
● 인생관의 철학 - 선악판단.(상대적인 차선과 차악이 있다.)  
● 가치관의 미학 - 가치판단.(다양한 수준과 층위가 있다.)    

세계관도 인생관도 가치관도 철학의 일부다. 과학도 철학도 미학도 철학을 구성하는 일부다. 그러나 연동된다. 철학은 과학으로 출발하여 세계관을 얻고 미학에 이르러 가치관을 얻음으로써 완성된다.

진위판단과 선악판단을 넘어 가치판단에 도달해야 한다. 진위판단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정답을 수용하고 나머지를 배척해야 하지만 선악판단은 상대성의 세계이므로 언제라도 차선과 차악이 있다.

절대성의 세계에서 상대성의 세계로 나아간다. 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규명하지만 철학은 내가 세상 앞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지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리고 가치의 세계는 절대와 상대를 넘어 또 다른 지평이다.

남산 위의 바위는 선도 악도 아니다. 자연의 과학은 단지 진짜와 가짜를 판별할 뿐이다. 세계관은 과학하여 절대적 기준을 얻는 것이다. 반면 인생관은 나의 포지셔닝에 따라 상대적이다. 미학은 전혀 다른 창조성의 세계다.

공자는 미학의 세계에 도달했다. 귀가 순해졌다. 진위판단과 선악판단에 매몰되지 않으니 일체의 걸리적거림이 없다. 그것은 소요자재의 경지요 평상심의 경지다. 진정한 자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철학은 관(觀)을 얻는 것이다. 관은 세계관으로 출발하여 인생관으로 성장하고 가치관으로 완성된다. 세계관의 터전 위에 인생관의 씨앗을 뿌리어 가치관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관(觀)은 기준이다. 기준은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결국 가치관이다. 세계관은 절대적인 기준이고 인생관은 상대적인 기준이고 가치관은 수준별로 차등화된 기준이다.  

● 철학은 하나의 기준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설명한다.
● 그 하나의 기준은 관점이다.
● 관점은 세상과 나의 관계설정에 있어서의 기준이다.
● 관계는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이 맞물려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 시스템(체계)은 연동되어 있으므로 하나가 변하면 모두 변한다.
● 질서의 체계와 가치의 체계가 있다.
● 질서의 체계가 세계관을 만들고 가치의 체계가 가치관을 만든다.
● 질서와 가치 사이에서 나의 포지션이 인생관이다.
● 내 포지션이 세상과 맞물리는 정도에 따라 가치의 수준이 결정된다.
● 진위, 선악, 미추, 완성, 소통이라는 가치의 수준이 있다.
● 진위는 절대적이고 선악은 상대적이며 미추는 수준에 따라 다양하다.
● 과학은 세계관을, 철학은 인생관을, 미학은 가치관을 구성한다.  
● 철학의 결론은 가치관(value system)의 정립이다.
● 가치관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의 수준(value)이다.
● 철학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대응의 수준이다.


건축가의 관점과 정원사의 관점

건축가의 관점은 서구의 시선이고 정원사의 관점은 동양의 시선이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면 치수가 맞는 재료만 쓸모가 있지만 정원사의 시선으로 보면 못 생긴 돌 하나도 연못가에 두면 빛이 난다.

건축가의 관점은 진위의 관점과 선악의 관점에 치우쳐 있다. 문설주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문짝을 찾는 것이 진위판단이라면 상하지 않고 오래 견딜만한 튼튼한 자재를 찾는 것이 선악의 관점이다.

공자의 이순(耳順)은 그가 미학적 관점을 터득했다는 말이다. 미학적 관점의 획득은 자기 포지션을 찾은 이후에 가능하다. 아직 자기 포지션을 찾지 못한 사람이 진위판단과 선악의 판단에 집착한다.

마침내 자기 포지션을 찾으면 가꾸려 한다. 가꾸되 처음은 타인과 비교하여 자기를 돋보이려 한다. 그것이 미추의 관점이다. 그러나 홀로 돋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누군가와 협력해야 더 빛난다.

나아가 타인을 위해 곁을 내주려 한다. 그것이 완성의 관점이다. 타인에게 곁을 내줄 뿐만 아니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이 소통의 관점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는 변하여간다.

세상의 틀에 자기를 맞추지 않고 나의 틀에 세상을 맞추기다. 세상의 틀에 나를 맞추려 하니 내가 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혹은 말아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래서는 귀가 순할 수 없다.

● 진위의 관점 - 세계관의 과학
● 선악의 관점 - 인생관의 철학
● 미학의 관점 (미추, 완성, 소통) - 가치관의 미학

미학의 관점을 획득하면 타인과 충돌하지 않는다.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도 자신에게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를 보태어줄 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든든한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

먼저 진위와 선악의 분별에서 벗어나 미학을 얻어야 한다. 미학 안에서도 미추를 넘어 완성을 넘어 소통에 이르러야 한다. 진위에서 선악으로, 선악에서 미학으로 수준을 상승시켜 가는 것이 가치관의 value system이다.

자신을 고정된 존재로 보면 세상에는 자기에게 해가 되거나 득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럴 때는 진위판단이나 선악판단을 할 뿐이다. 자기를 움직이는 존재로 볼 때, 미추와 완성과 소통이 드러난다.

속물은 자기 포지션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진위와 선악과 미추의 여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상점에서 상품을 둘러보되 짝퉁인가 진품인가의 진위판단을 앞세운다.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인생은 만남이다. 자신이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할 것인가를 그들은 확보하지 못했다. 삶이라는 그림의 주제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정하다. 그 주제가 포지션인데 그 포지션이 찾아지지 않았다.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이 왕자냐 거지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면 불안정하다. 이 수준을 극복해야 불혹(不惑)이라 할 것이다. 진위와 선악과 미추를 판단하는 수준을 극복해야 한다.

불혹은 유혹되지 않는다. 유혹된다는 것은 세상이 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양반으로 혹은 상놈으로 혹은 신사로 혹은 숙녀로 규정한다. 거기에 따라 나는 고개를 숙이거나 고개를 든다.

극복해야 한다. 거꾸로 내가 세상을 규정해야 한다. 세상의 틀에 맞추어 고개를 들거나 숙이지 말아야 한다. 나의 틀을 찾아야 한다. 그 틀이 유연하고 순한 틀일 때 나의 정원에서 세상을 가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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