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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시선과 주인의 시선]

하나의 존재는 그 자체에 내재한 고유의 속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환경과의 상호관계에 의해 이차적으로 규정된다.

석가는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자성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물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관계에 있다. 관계는 사이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 말이 평범해 보이지만 이천오백년 전에는 세상을 뒤집어 놓울 수 있는 발언이었다.

양반상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양반대접을 해주면 양반이고 상놈취급을 하면 상놈이라는 말이다. 이 말 한 마디로 카스트 제도는 근거를 잃었다.

룻소가 사회계약론을 쓰고 밀이 자유론을 쓰기 이천년도 더 전에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양반대접 할 것인가 상놈대접 할 것인가. 이것이 룻소의 계약이다. 사회는 관계로 이루어지고 관계는 관습이라는 묵시적 계약과 헌법이라는 명시적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인간은 그 계약의 사슬에 갇혀버렸다.

옛 사람들은 인간의 신분이 하느님의 결정에 의해 타고나는 것이라 여겼다. 룻소의 폭로에 의해 그것이 단지 사회관계에 지나지 않음이 밝혀졌다.

그것은 관계다. 관계가 사이다. 사이는 서로에 의해 규정된다. 사이의 절반은 내가 결정하고 나머지 절반은 타인이 규정한다. 그것이 계약이다.

근대인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계약된 자유다. 계약의 절반은 상대방의 것이다. 그 자유는 조건부 자유다. 그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다. 진짜가 아니다.

현대인은 계약에 복종하는 방법으로 자유를 산다. 매일 하루치의 자유를 구입하고 하루치의 자유를 소비한다.

도시는 무수한 게이트로 이루어져 있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 마다 약간의 자유가 통장에서 사라지고 하루의 노동에 의하여 약간의 자유가 충전된다.

시골사람은 다른 방법을 쓴다. 그들은 게이트를 두지 않는다. 매일매일 그날 하루치의 자유를 충전하지 않고 하루치의 자유를 소비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다년계약을 하듯이 일생의 자유를 통째로 얻어둔다.

농노가 도시로 도망하여 1년간 숨어 있으면 귀족이 농노롤 잡아갈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귀족이 없어진 오늘날 시골의 공기가 도리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시인의 자유는 계약된 자유다. 그것은 반쪽짜리 자유, 조건부 자유다.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된 불안정한 자유다.

들판의 자유인들이 바빌론의 도시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이집트의 도시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여전히 그들은 정신적으로 출애굽하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유목민의 기상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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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객관적이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있다. 미학은 주관적이다. 연주자의 솜씨가 뛰어나도 듣을 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미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연주자와 관객 사이를 그 대상으로 한다. 진정한 것은 사이에 있다. 참된 연주는 좋은 소리와 좋은 마음 사이에 둘의 합일로 일어난다.

● 과학 - 어떤 주어진 대상을 분석한다.
● 미학 - 어떤 대상과 다른 것 사이를 분석한다.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예쁨과 고움과 어울림과 아름다움과 멋이 있다. 콜라와 햄버거의 앙상블은 콜라에 있지 않고 햄버거에도 있지 않고 둘의 만남에 있다. 콜라와 햄버거 사이에 있다.

마찬가지로 홍어와 묵은지와 돼지고기의 삼합은 홍어에 있지 않고 돼지고기에 있지 않고 묵은지에 있지 않고 셋의 만남과 어울림에 있다.

자유도 사이에 있고 만남도 사이에 있고 사랑도 사이에 있고 소통도 사이에 있다. 모든 진정한 것은 사이에 있다.

[구조가 과학이다]

사이를 보아야 한다. 사이에 구조가 있다.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과학은 구조다. 물리학은 물질의 구조를 규명하고 의학은 인체의 구조를 규명한다. 구조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구조는 시스템의 하부구조다. 그러므로 구조를 안다는 것은 곧 시스템을 안다는 것이다. 어원으로 보면 시스템(system)은 ‘쌍(sy-)으로 세운다(stand)’는 뜻이다.

천칭저울의 왼편 접시에 1그램이 증가하면 오른편 접시도 1그램이 증가해야 한다. 두 접시가 한 쌍을 이루므로 한쪽이 일어서면(증가) 다른 한쪽도 그에 맞서 일어서는(증가) 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평형이다. 평형은 대칭의 평형이다. 대칭은 마주보는 것이다. 천칭저울의 마주보고 있는 두 접시는 닮아있다. 대칭은 두 패턴(닮음)의 대칭이다.  

패턴이 둘 모이면 하나의 대칭이 성립한다. 대칭이 평형에 도달할 때 밸런스가 얻어지는 것이며 계 내부에 밸런스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밸런스가 붕괴하려 할 때 이를 자동으로 복원한다. 대표적인 것이 와트가 그의 증기기관에 설치한 조속기(governor)다.

한국의 전통적인 대저울은 밸런스가 무너지면 추를 움직여 밸런스를 회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이 시스템이다. 오류가 발생할 때 피드백의 가역과정이 이루어져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즉 자동제어기능을 갖춘 평형계가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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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시스템이고 경제도 시스템이고 문화도 시스템이고 사회도 시스템이다. 오류가 발생하면 그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자동제어 기능이 정치라는 체계 안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과연 자동제어를 잘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부시의 중간선거 패배는 미국 민주주의가 자동제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국 민주주의의 자동제어에 의해 부시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 자동제어가 민감한 센서를 가졌다면 이라크에서 한 달에 미군이 백명씩 죽고 천 명씩 부상당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자동제어 센서는 수준미달이다.

자동제어의 센서가 둔감하기 때문에 시간차에 의한 역설이 일어난다. 피드백에 의한 오류시정의 가역과정에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정치도 역설이고 경제도 역설이고 문화도 역설이고 사회도 역설이다.

세상을 안다는 것은 자연의 생태계가 자동제어하는 원리를 안다는 것이고, 정치의 민주주의가 자동제어 하는 원리를 안다는 것이고, 경제의 시장원리가 자동제어 하는 원리를 안다는 것이다.

과학은 구조다. 구조는 시스템 구조다. 모든 시스템은 계 내부에 자동제어 기능과 피드백 기능과 센서기능을 가진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센서를 안다는 것이며 피드백을 안다는 것이며 자동제어를 안다는 것이다.

자연의 생태계가 어떤 센서를 가졌는지, 또 한 국가의 정치가 어떤 피드백 기능을 가졌는지, 또 인류의 문명은 어떤 자동제어 시스템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전에는 아직 아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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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동제어, 피드백, 센서, 그리고 소통의 개념이 서구정신에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의 사상의 기저에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야말로 자동제어를 깨닫고 피드백을 깨닫고 센서를 깨달음이다.

자연의 생태계든, 인간사회의 정치든, 문명이든, 역사든, 경제든 반드시 시스템이 있으며 시스템 안에는 조속기가 하나씩 장착되어 있다. 그 조속기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서구의 진보주의는 여전히 노예의 시선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조속기의 존재를 모른다. 그들이 발명한 사회주의는 고도의 계약사회다. 계약은 날로 정밀해진다. 계약이 정밀해질수록 인간의 자유는 점점 불완전해진다.

그 계약을 벗어던져야 한다. 계약된 조건부의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 한다.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 시골사람의 기백을 얻어야 한다. 부족민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  

동양정신은 다르다. 공자의 중용, 석가의 중도, 노자의 무위는 그러한 자동제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노예의 시선이 아니라 주인의 시선이다.

유태인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는 자동제어 개념이 없다. 그들의 사유는 일방향적이다. 그들은 사이를 모르고 관계를 모르고 자유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고 소통을 모르고 미학을 모른다.

자동제어가 없으면, 피드백이 없으면, 센서가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독립할 수 없으면 자유할 수 없다. 공동체의 규범에 의존해야 한다. 계약해야 한다. 그렇게 길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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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가던 보트가 갑자기 전복되는 이유는 배 위에 앉아있던 승객이 근처를 지나가는 유람선이 일으킨 파도를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서기 때문이다. 작은 파도에도 보트는 중심을 잃고 전복된다.

왜 일어서는가? 선박의 롤링과 피칭에 따른 자동복원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에도 경제에도 사회에도 문화에도 그런 파도가 있고 밸런스가 있고 자동복원이 있다. 그 파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도 눈앞의 작은 파도에 불과하다. 파도는 맞설 것이 아니라 타고넘어야 한다. 천정배, 김근태, 김한길, 정동영, 김두관들은 파도를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선 사람들이다.

노련한 선장이라면 이런 겁쟁이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배를 자동복원하게 하는 힘은 가속도에서 나온다. 달리는 배는 어떤 파도에도 전복되지 않는다. 달리는 경주용 오토바이는 급커브에서 기울지만 전복되지 않는다. 달리지 않고 멈출 때 돌지 않는 팽이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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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로 엮어진 구름다리를 건널 때는 발을 맞추어 걷지 말아야 한다. 19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한 무리의 독일병사들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대장의 구령에 발을 맞춰 뛰어갔다. 튼튼한 구름다리가 무너져서 병사들은 계곡으로 추락했다.

지하실에 화재가 나면 한꺼번에 건물의 출입구로 몰린다. 재앙은 그러한 쏠림 때문에 일어난다. 위기 때는 무질서가 오히려 질서가 되고 질서가 오히려 무질서가 된다.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당의 무질서함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통합운운 하며 뛰어가는 자들 있다. 화재가 날 때 출입구에 자빠져 한데 뒤엉켜 죽는 자들이다. 작은 파도에 놀라 보트에서 벌떡 일어서는 자들이다. 출렁다리 위를 발맞추어 몰려가는 자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행진을 벌이고 있다.

파동이 맥놀이를 낳고 맥놀이가 가속도를 낳는다. 맥놀이 역시 자동복원의 밸런스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그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 하는 즉 모두 한데 뒤엉켜 죽는다.

김한길 죽고 천정배 죽고 정동영 죽고 김근태 죽는다.

우리당이 쓰러지는 이유는 실용주의 운운하며 멈추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멈추어서 가속도를 잃고 운동에너지를 잃고 자동복원력을 잃고 회전력을 잃어서 돌다 지친 팽이처럼 쓰러지는 것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가만 있으면 살고 몰려가면 죽는다. 앉아있으면 살고 일어서면 죽는다. 보조를 흩으면 살고 일제히 보조를 맞추면 죽는다. 민심의 역설이라는 밸런스의 자동복원을 믿고 기다리지 않으면 죽는다.

두려움 이기지 못하고 입구로 우르르 몰려가는 자 누구인가? 쥐새끼처럼 오골오골 한곳에 뭉치려는 자 누구인가? 통합을 주장하는 자 누구인가?


[참된 지성이란 무엇인가?]

도시민의 관점을 버리고 부족민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세상은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류와 비주류의 대결, 컨버전스와 디버전스의 대결, 역학과 미학의 대결로도 되어 있다.

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문명이라는 시스템의 조속기를 이룬다. 그 조속기의 속도조절에 의해 흐름이 생겨나고 호흡이 생겨나고 완급이 생겨나고 맥박이 생겨나고 맥놀이가 생겨난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잇다.

자유라는 이름의 센서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밸런스가 문명의 조속기를 이룬다. 인류의 진보는 문명의 진보이며 문명의 진보는 개인적 자유의 양적 확대와 공동체적 사랑의 질적 심화다.

개인의 자유는 우파가 강조하고 공동체의 사랑은 좌파가 강조한다. 그러나 그 자유가 사랑하기 위한 자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사랑이 그 자유의 완성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유를 잃을 때 인간은 균질화되어 죽는다. 가뭄을 만나 말라붙은 연못바닥에 오골오골 몰려든 올챙이처럼 죽는다. 사랑을 잃을 때 사회는 밸런스를 잃고 해체된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  

도시민과 부족민의 대결, 컨버전스와 디버전스의 대결이 피드백을 이루어 부단히 오류를 시정하며 문명의 밸런스를 자동복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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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주의는 진보하나 사회를 점차 획일화 균질화 체계화 하려 한다. 개인을 시스템의 하부구조로 종속시키려 든다. 그것은 도시민의 자유다. 계약된 자유, 조건부 자유, 게이트를 통과하는 자유, 하루치의 노동으로 얻은 하루치의 자유다.

그 거짓 자유에 구속된다. 그 거짓 자유에 길들여진다. 그 거짓 자유가 인간의 존엄을 망가뜨린다.

진정한 진보는 부족민의 자유를 회복함에 의해 가능하다. 그것은 개인을 각자의 위치에서 제각기 완성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내부에 자유라는 센서와 사랑이라는 밸런스를 가지고 독립하는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종의 건강성을 담보한다. 다름이 재산이다. 다름이 가치다.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너와 나의 사이가 드러난다. 너와 내가 같다면 너와 나의 사이는 양팔간격에서 반팔간격으로 밀착되고 만다.

그렇게 밀착할 때 그 좁혀진 거리만큼 서로는 자유를 잃고 서로는 가속도를 잃고 서로는 맥놀이를 잃고 복원력을 잃고 밸런스를 잃고 만남을 잃고 인연을 잃고 소통을 잃는다. 사이를 잃는다. 문명은 그만치 위태로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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