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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402 vote 0 2006.11.17 (23:43:22)

(지난번 글과 내용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참된 지성이란 무엇인가?

21세기의 비극은.. 이 세계에 참된 지성이 없다는데 있다. 우리나라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나라에 큰 어른이 없고 이 세계에 참 스승이 없다.

부시의 침략을 겪고도 지식계는 반성의 기미가 없다. 고작 한다는 짓이 부시탓이다. 부시탓 한다는 것은 부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의미다. 그것은 적어도 부시를 말이 통하는 상대로 본다는 거다.

쇠 귀에 경 읽기도 유분수지 부시, 김정일, 후세인, 럼즈펠드 이넘들이 도무지 말이 통하는 인간의 종자들이란 말인가? 이 소새끼들은 굴다리 밑에 집합시켜 놓고 굴밤을 한 대씩 멕여준다면 몰라도.. 책임을 논할 대상이 못 된다.

지적 게으름이다. 성찰의 빈곤이다. 왜 아무도 내탓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지성이 문제다. 바야흐로 지성이 죽은 시대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 깜깜한 밤 바다를 등대도 별빛도 없이 항해하기.

부시를 비난한다는 것은.. 소련의 붕괴, 냉전의 해체, 서독의 동독흡수, 중국과 베트남의 개방,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런 역사의 큰 흐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뒷북을 치고 있다는 의미다.

역사의 흐름을 바로 내다본 참 지성인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20세기는 그 한 명을 갖지 못했다.

왜 예상하지 못했나? 왜 잘난 서구 지식인들은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는가? 부끄러워 해야 한다. 소련의 붕괴를 예상도 못하고 이후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이 권위를 잃은 것이다.

이미 권위를 잃었으니 원숭이가 집권해도 할말없게 되었다. 지식의 패배다. 혁명이라는 이름의 휴거날자나 세던 지식인들, 여전히 휴거를 기다리는 좌파들.. 점점 꼴이 우습게 되어가고 있다.

정신차려야 한다. 서구중심의 철학계, 강단학계, 언론계, 문화계.. 교수니 석학이니 학자니 하는 자들.. 바로 너희들이 원숭이의 손에 폭탄과 총을 쥐어준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반성해야 한다. 성찰해야 한다.

 

부끄러운 서구 지식인의 초상

실존주의는 양차세계 대전을 막아내지 못한 지식인의 무력함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예고된 재앙을 막지 못했다. 지식은 왜 이다지도 무력하단 말인가?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지식인.. 그들은 오만하지 않다. 패기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 겸손하다. 그들은 겸손으로 도피해 버렸다. 겸손한 자가 책임을 양보한다. 겸손으로 위장된 비겁함이다. 지식은 오만해져야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자세가 있어야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다. 임제 의현은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다. 이 정도의 패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오늘날 지식은 날로 전문화 되고 세분화 된다. 집 짓는 목수는 집만 짓고 떠난다. 집만 지으면 역할 끝이다. 지식인은 글만 가르치고 떠난다. 그들은 겸손하게도 자기 역할을 좁은 범위에 한정시킨다.

자기 존재를 파편화된 부스러기 조각으로 본다. 조직과 집단과 시스템을 자신의 위에 놓는다. 그러니 부스러기 조각에 불과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을리 없다.

무엇인가? ‘나’로부터 출발하기다. 집단적 사고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남 뒤에 가서 줄서지 말아야 한다. 서구사상은 본질에서 노예사상이다. 그들의 사상에는 나 위에 나의 존재에 선행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별 수 없는 기독교도들이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다. 모세가 무리를 이끌고 출애굽하여 해방시켰으나 여전히 그들의 정신은 노예상태다. 권력에 의한 파라오의 지배에서 교리에 의한 카톨릭의 지배로 바뀌었을 뿐.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서구의 그들에게 지배자로서의 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2000년 전 희랍인에게 있었던 영혼의 자유가 21세기의 그들에겐 여전히 없다.

르네상스가 인문무주의의 부활을 선언했지만 단지 선언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다’고 선언했지만 단지 선언했을 뿐이다. 지배 시스템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바꾸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파라오의 지배에서 교회의 지배로, 교회의 지배에서 이념의 지배로, 자본의 지배에서 공산당의 지배로, 폭력의 지배에서 조직의 지배로, 십자가의 지배에서 교리와 강령과 도그마의 지배로 바뀌었을 뿐이다.

동양정신은 다르다. 서구의 지식세계에 지성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중국에는 군자(君子)라는 개념이 있다. 군자는 학문적 바탕 위에 인격적 수련을 더한 사람이다. 서구의 그들과 달리 극도로 오만한 사람들이다.

소동파의 전범에 의하면 참된 군자는 불교 승려나 도교의 도사들과도 교유하여야 하고 예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이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서구의 창백한 지식인상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밑바탕에는 도교 영향을 받은 남조시대의 청담사상이 깔려있다. 불교 영향도 크다. 양명학이 특히 그렇다. 굵은테 안경을 쓰고 하루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파는 서구 지식인상과 다르다.  

군자의 필수적인 요건은 안목이다.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 미추를 가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은 결국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논리다.

추사는 초의와 교유하며 차(茶) 맛을 가렸다. 골동이나 서화에도 안목을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는 전통적인 개념의 유교 선비와는 다른 것으로 도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생불이라 불렸던 지족선사도 황진이의 유혹에는 넘어갔다. 그 황진이도 도학의 서경덕을 꺾지는 못했다. 도교와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서경덕의 도학은 폼만 잡는 벽계수의 깐깐함과 다르다.

이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선 중후기의 짧은 문예부흥기에 전혀 새로운 지식인의 전범이 창출된 것이다.   

무엇인가? 오늘날 지식인은 전문분야에 치중하여 사회적 소통이 부족하다. 소련의 몰락이후 전개된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민중의 마음과 멀어지고 권위를 잃어 원숭이떼의 발광사태를 방조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인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창백한 서구의 지식인상이 아니라 포용력있는 동양적 지식인상에 답이 있다. 이는 학문적 바탕 위에 인격적 수련을 더한 것이다. 심미안을 얻은 것이며 민중의 마음과 더불어 소통하는 것이다.

  

동양정신으로 돌아오라

석가와 그의 제자 오백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그러나 이후 불문에 깨닫는 사람이 없어졌다. 왜? 사회가 점차 세분화 되고 전문화, 고도화 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는 ‘인생은 고(苦)다’ 이 한마디로 무리를 아우를 수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무리들은 충분히 감탄해 하였던 것이다. 밥 먹고 일하고 똥 싸고 잠자는게 전부였던 즉..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더 많은 지식의 깊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네가 아는게 뭐야?’하고 질문하는 것만으로 유명해졌다.

“네가 아는게 뭐야?”

이 정도만으로도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탄복하고 꺼벅 죽었다.

“오오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과연 나는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들은 감동하여 소크라테스를 따라다녔다. 소크라테스는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네가 인생을 알아?’ 하고 집적대봤자 수작이 먹히지 않는다.

2차대전을 전후로 짧은 지식의 전성기가 있었다. 그 시점에 세계의 90프로는 문맹이었다. 지식의 계몽이 먹혀서 이후 50년간 평화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식이 대접받지 못한다.

석가이후 깨닫는 사람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화 이후 참된 지성인이 없어진 것이다. 척 하는 사람이나 있을 뿐이다. 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식인의 계몽이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진보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되었다. 진보는 비과학적이다. 그들은 세계를 균질화 시키려는 그릇된 욕망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존재 위에 파라오를 두고 있다.

그 이름이 파라오에서 마르크스로, 혹은 조직과 집단과 시스템으로 바뀐다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강단을 떠나지 못한다. 조직에 얽매여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는 퍼즐조각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지식을 가졌다는 것은 목수가 규구를 가진 것과 같아서 좁은 범위에서 통용될 뿐이다. 자기분야를 떠나 타 분야와 소통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그들은 목수는 집만 지으면 되고 지식인은 비판만 하면 된다는 식의 편협한 사고에 빠져 있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라면 정부 비판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대안제시는 행정부 역할이요 자기들은 비판만 하겠다는 거다.

종교인은 설교만 하면 되고 공무원은 출근만 하면 된다는 식의 옹졸한 태도. 그들은 순치되고 길들여졌다. 슈퍼마켓의 통조림처럼 차곡차곡 쟁여져 버렸다. 그들은 야성을 잃었다. 그들에게서 더 이상 늑대의 눈매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보라! 추사가 제시한 지식인상, 소동파가 제시한 지식인상, 서화담이 보여준 지식인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민중의 마음과 더불어 널리 소통하는 새로운 지식인상을 제시한 것이다.

 

컨버전스와 디버전스

역사는 흐른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강단의 지식이 역사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시대에 뒤처져 버렸다. 입으로는 진보를 팔면서도 행동이 굼뜨기로는 꼴보수가 되어버렸다.

컨버전스와 디버전스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의사소통이다. 금속활자와 같은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 나타나면 상부구조의 컨버전스와 하부구조의 디버전스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러한 흐름은 일정한 양식화에 도달할 때 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된다. 새로운 양식이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도달할 때 까지 컨버전스와 디버전스의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양식이 완성되면 소통한다.

새로운 양식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일제히 전파된다. 소통은 새로 정립된 양식의 전파과정에서 크게 맥놀이를 일으킨다. 새로운 양식이 정착되면 한 동안 매너리즘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후 양식이 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변형되고 왜곡되고 패러디 된다. 이윽고 다시 새로운 의사소통의 매체가 등장하면 구질서가 무너지고 신질서가 도래한다. 이것이 역사의 기본적인 순환구조다.

종교가 전래될 때도 그랬고 금속활자가 나타났을 때도 그랬고 영화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나타났을 때도 그랬고 인터넷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선박과 마차와 기차와 자동차 역시 중요한 소통의 매체다.

하나의 장벽이 뚫리고 하나의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질 때 마다 역사는 중심부의 컨버전스와 주변부의 디버전스로 소용돌이 치곤 했다. 그 정점에 소통이 있다.

지식인이 스스로 그 소통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 추사와 다산과 동파의 지식인상이다. 유학자인 추사와 다산이 스님인 초의선사와 교유한 것이 그러한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인은 소통하지 않는다. 좌파들은 민중이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소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혼란을 안타까워 하는 지식인의 시선에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라는 낡은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입으로는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며 고상하게 포장하여 말하지만 본질로 보면 한 마디로 상고나온 놈이 설치는 꼴을 못봐주겠다는 거다.

안티조선의 독자행진과 노무현그룹의 마이웨이를 못봐주겠다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비뚤어진 심사가 그렇다. 강단의 학자가 흐름을 이끌어야 하는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유분수지.. 회사원이나 네티즌들이 주제에 설치고 다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꼬부장한 마음. 그 마음 버려야 한다.

 

황진이가 문득 21세기를 방문한다면

금속활자가 보급되자 소통의 속도는 급격히 빨라졌다. 그러나 아뿔사! 라틴어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세계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기는 커녕.. 성경은 수십개의 언어로 제각기 번역되어 오히려 더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기어이 바벨탑은 무너졌다.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백년동안 전쟁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어나갔다. 어느 면에서 보면 금속활자가 재앙이었던 것이다. 산업화도 마찬가지다.

산업화가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할 것이라는 발상이 마르크스의 컨버전스다. 그러나 세계사는 거꾸로 민족주의라는 디버전스로 흘렀다.

오늘날 공병호 등 공인된 바보들이 숭상하는 영어의 지배는 컨버전스의 흐름이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은 오히려 거꾸로 한자문화권을 부활시키고 있다.

한자 타자기가 없어서 애먹던 중국인들은 컴퓨터 덕분에 한자입력의 편리함을 얻었다. 한자 뿐 아니다. 인터넷 덕분에 모든 소수민족이 자기네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보급할 획기적인 수단을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를 혁명하겠다는 마르크스의 발상 그리고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히틀러의 발상, 도량형을 통일힌 진시황의 발상과 미터법을 전파한 나폴레옹의 발상.. 이들은 공통적으로 컨버전스에의 집착이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보급에서 보듯이 역사는 짧은 컨버전스의 시대를 끝막고 금방 디버전스로 나아갔다. 이론으로 보면 항상 컨버전스가 먼저 온다. 그러나 컨버전스 붐은 너무나 짧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MS가 윈도 95로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지만 이후 활약이 없다. 그 많은 MS의 연구원들이 그 비싼 연봉을 받고 도무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컨버전스는 언제나 잠깐 반짝이었다.

인터넷은 세계주의의 컨버전스와 민족주의의 디버전스 경향을 동시에 가진다. 프리 허그나 플래시 몹과 같이 새로운 아이디어가 뜨면 단 하룻만에 전 세계 수십억 네티즌의 눈으로 퍼져나간다. 이건 컨버전스다.

그러나 네티즌 댓글족들은 오늘도 민족주의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다. 인터넷이 조중동이 부추기는 증오의 문화를 확대재생산한다. 딴나라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멍빠와 박빠의 자살골 시합은 디버전스다.

세계주의는 컨버전스다. 민족주의는 디버전스다. 이 둘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중 하나를 폐기하는 방법은 없다. 컨버전스와 디버전스가 충돌하는 이유는 미학적 양식화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대가가 나타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미학적 양식을 완성하여 보일 때 싸움은 멈추어진다. 새로운 양식이 정착되면 더 이상 컨버전스와 디버전스가 마찰하지 않는다. 따로 또 같이 공존하며 소통한다. 그리고 전파된다.

바로 이 때가 지식인이 일어설 때다. 그러한 이치를 깨우친 사람이 추사요 다산이요 동파요 화담이다. 이는 서구정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도 아니고 벽계수도 아니고 민중의 마음과 소통할 줄 아는 오직 한 사람 화담이 진짜라고 말하는 것이다.

● 지족선사 .. 겉으로 민중적인 척 하지만 내공이라곤 전혀없는 3류 허풍선이 맹바기들.

● 벽계수 .. 꼿꼿한 좌파 지식인인 척 하지만 조직과 시스템에 얽매여 민중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는 가짜.

● 서경덕 .. 높은 예술가적 안목과 도학의 깊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으며 민중의 마음과 소통할 줄 아는 진짜.

 

이 시대에 화담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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