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 위 아래의 자른 면은 요철(凹凸)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잘려져 있다. 그러나 양 옆면은 직선으로 곧게 잘려 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지? 왜 예쁘게 직선으로 자르지 않고 보기에 좋지 않은 톱니모양으로 잘랐지?
양 옆면의 직선은 원래 용지의 규격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거고 위 아래의 톱니모양은 신문을 인쇄하면서 자른 것이다. 신문은 종이를 한 장씩 펴놓고 찍는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 모양으로 회전하면서 고속으로 인쇄된다.
인쇄되는 속도와 같은 속도로 용지를 잘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자르다가는 금방 칼날이 닳아버린다. 칼날을 오래 쓰기 위해서 요철모양의 칼날을 사용하는 것이다.
칼날이 닳아 날이 무뎌질 때 마다 매번 윤전기를 멈추고 날을 갈아줘야 한다면 생산성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요철 형태의 칼날은 날이 쉽게 닳지 않는다. 덕분에 하룻밤 사이에 수백만부의 신문을 인쇄할 수 있다.
이 정도로 이야기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도 이해한다. 그들은 마치 다 알아들었다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해 한다. 천만에! 아직 이야기 끝나지 않았다.
“왜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는 거죠?”
“그것도 모르냐? 사과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지는 거야.”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도 이해해서는 결코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없다. 뉴튼이 그랬듯이 ‘왜 사과는 무겁지?’ 하고 한 번 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요철형태의 날은 더 오래 쓸 수 있지?
숟가락의 형태를 관찰해 보자. 숟가락의 주걱 부분은 사람의 입술모양을 닮아 있다. 둥근 타원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 밥그릇의 밑바닥 모서리는 숟가락의 날과 같이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젓가락을 관찰해 보자. 젓가락의 형태는 사람의 손가락 모양을 닮아 있다. 그 젓가락으로 집는 반찬도 길쭉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숟가락이 입술의 연장이라면 젓가락은 손가락의 연장인 것이다.
물컵을 관찰해 보자. 컵에서 입술이 닿는 부위의 각도는 사람 입술의 둥근 각도와 닮아 있다. 컵 속의 깊은 부위는 또 사람의 입에서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관(管) 모양과도 같다.
이처럼 두 사물이 마주쳐서 운동을 전달하는 접점의 모양은 같은 형태일 수 밖에 없다. 사물이 일을 한다는 것은 A에서 B로 힘을 전달한다는 것이며 이때 전달의 송신자와 수신자는 동일한 형태의 힘의 방향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일은 막연히 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방향이라는 형태로 정보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다. 일이 단지 힘을 전달할 뿐이라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일은 힘과 정보를 동시에 처리한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두 사물이 마주치는 접점은 반드시 동일한 형태를 공유해야만 한다. 주변의 사물을 관찰해 보라. 모든 것이 요(凹)와 철(凸)로 되어 있다. 이 근본되는 원리에서 어긋나는 경우는 없다.
칼날은 종이를 자른다. 일을 한다. 일은 정보를 담고 있다. 칼날이 신문지를 절단하면서 날이 무디어진다는 것은 그 칼날이 가진 정보를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다. 칼날을 요철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이때 정보의 전달창구를 많은 숫자로 나누어 일을 배분한다는 것이다.
칼날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면 그 중 한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문제가 증폭되어 칼날이 전체적으로 비뚤어지게 된다. 칼날의 한 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더 많은 힘을 받는다면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닳아서 칼날은 완전히 못쓰게 된다.
칼날이 전달하는 정보가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이래서는 바르게 일을 수행할 수가 없다. 칼날을 톱니모양으로 만들면 부분의 오류가 전체에 전파되지 않는다. 한 부위가 더 많은 힘을 받는다 해도 그 힘은 분산된다.
시스템은 한 부분에 결함이 있어도 전체 시스템이 망가져서 못쓰게 된다. 포드시스템의 한 공정에서 에러가 나면 그 라인 전체를 스톱해야 한다. 그러나 톱니모양은 부분의 오류가 중간에서 차단되므로 하여 시스템의 붕괴를 예방한다.
화장지의 경우도 그렇다. 엠보싱의 요철을 두면 화장지가 전달하는 힘의 방향이 접촉면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부분의 오류가 전체에 전달되지 않는다. 2중 면도날 혹은 3중 면도날도 그렇다. 부분의 오류가 단계적으로 시정된다.
만약 전 세계가 단 하나의 언어를 만국공용어로 쓴다면 어떨까?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증폭된다. 이 경우 인류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왜 한글을 아껴야 하고 또 자국문화를 보호해야 하는가?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증폭되는 현상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왜 우리는 부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가? 세계가 하나의 이념, 하나의 질서로 획일화 된다면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증폭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가 미국이 주장하는 힘의 질서아래 굴종한다면 미국이 오류에 빠질 때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단이 없다. 그러므로 일정부분 무질서가 상당하더라도 인류문명의 다양성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부분의 오류를 감수해야 한다.
북한이나 쿠바, 이라크, 이란 등은 확실히 오류가 있다. 그러나 이는 부분의 오류에 불과하다. 미국의 오류는 전체의 오류이자 인류의 불행이다. 그러므로 부시의 잘못은 용서할 수 없다.
왜 서구는 크게 발전했는데 동양은 오랫동안 정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서구가 수십개의 작은 국가들로 쪼개져 있어서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증폭되지 않게 중간에서 차단하는데 성공한 데 비해, 중국은 진시황이 춘추전국시대의 열국을 병합해서 천하를 통일한 결과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확대된 것이다.
오류는 일정한 확률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신문용지를 자르는 칼날은 결국 닳게 되어 있다. 오류가 없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필요한 것은 오류가 일어날 경우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는가? 세계가 하나의 이념, 하나의 질서, 하나의 가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생산성으로 통일되면 인류문명이 총체적으로 시스템의 위기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언어를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다양한 이념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다양한 문화를 가꾸고 다양한 질서를 창안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시스템의 위기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물타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뒤죽박죽 중도통합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각자의 수평적 공존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합되지 않고 분리공존 하기다. 섞이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개성과 입맛을 잃지 말아야 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 안 된다. 그러면서도 등 돌리거나 고립되지 말아야 한다. 얼굴 마주보고 경쟁해야 한다.
무엇인가? 많은 한국인들은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에 기뻐하고 2006년 쇼트트랙의 금메달 6개에 환호한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냉소하여 말한다. ‘스파르타식 관제체육 잘해서 뭐하냐?’, ‘생활체육에서 뒤지는데 엘리트체육 잘하면 뭐하나?’
천만에! 월드컵 4강과 금메달 6개는 돈으로 따질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 굳이 돈으로 환산한다면 수조원의 국부창출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건 확실히 남는 장사다. 바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들 지식인들은 세계를 하나의 질서, 하나의 승부로 획일화 하려고만 한다. 왜인가? 그래야지만 그 획일적 질서 안에서 자기네의 우월적 지위가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자기 밥그릇에 밥이 한숟갈이라도 더 오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좌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가 정해놓은 이상적인 모델 안에서 자기네의 서열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모델은 사회를 일종의 다단계 피라미드 사업처럼 디자인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 모델 안에서 민초들이 실버프로듀서나 골드프로듀서 사이를 헤매고 있을 때 지식계급에게는 에머럴드나 다이아몬드의 위치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다단계 사업은 시스템 구조가 취약하다.
마르크스의 지식 피라미드 사업은 칼날이 직선이라서 부분의 오류가 전체의 오류로 확장되고 마는 잘못된 시스템과 같다. 일시적으로는 성장하지만 곧 잦은 라인스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하락하고 마는 것이다.
박노자가 월드컵에 찐따를 놓은 것이나 다수의 지식인들이 동계올림픽의 금메달을 성공사례로 받아들이는 그 자체를 못마땅해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들은 영리하게 자기네의 밥그릇을 세고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식 훈련과 자본의 물량투입으로 얻어낸 성공은 진짜가 아니다. 쇼트트랙에서 얻은 우리의 6개 보다 피겨에서 얻은 일본의 금메달 하나가 더 값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성공은 뭐지? 왜 성공의 공식이 하나여야만 하는 거지? 천만에! 우리는 월드컵 4강 진출과 동계올림픽의 금메달로 하여 또다른 성공의 방법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여자골프와 양궁 그리고 쇼트트랙은 공통적으로 많은 장비와 부모의 극성을 필요로 하는 즉 엘리트체육이 먹히는 분야다. 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야구나 육상 따위는 원초적으로 소질이 있는 선수를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절대적으로 선수층이 두껍고 저변이 넓어야 한다. 펠레나 마라도나는 원초적으로 질이 다른 천재형 선수다. 한국의 박지성과 같은 노력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분야는 공통적으로 타고난 소질 보다는 코치진의 기술지도가 상대적으로 중요한 분야다.
세계는 다양한 경쟁이 존재해야 하며 거기서 다양한 성공 방정식이 찾아져야 한다. 미국은 큰 나라다. 세계에서 인재가 몰려온다. 원초적으로 우수한 자원이 발굴된다. 자원이 좋지 않으면 외국에서 용병을 수입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니다. 한국은 작은 나라다.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에 맞는 성공방정식을 찾아야 한다. 덜 우수한 자원이라도 집중적으로 훈련하여 조기에 성적을 내야 한다.
한국에 맞는 성공방정식이 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부모의 극성과 많은 장비가 필요하며 돈이 제법 드는 스포츠 종목인 쇼트트랙, 양궁, 여자골프에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자골프, 양궁, 쇼트트랙의 성공에서 한국인들은 영감을 얻을 수 있고 전략을 세울 수 있고 비전을 얻을 수 있다. 성공방정식을 찾아낼 수 있고 이 공식을 다른 분야에도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그 파급효과는 돈으로 계량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산업에서도 유사한 성질이 관찰되고 있다.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한류드라마나 반도체 산업이나 공통적으로 좁은 저변과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비와 집중적인 투자, 전문적인 기획팀의 투입이 성공적으로 먹히는 분야다.
● 미국의 강점인 육상.. 맨손으로 한다. 축적된 기초기술과 저변의 넓음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 분야에 약하다.
● 양궁, 여자골프, 쇼트트랙.. 많은 장비를 사용한다. 단기간에 집중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기초기술도 중요하지만 쇼트트랙에서 보듯이 참신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응용기술의 비중이 높다.
옛날 일본의 바둑 고수는 내제자를 두어도 제자가 독립할 때 까지 단 세 번 밖에 바둑을 두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입문할 때 한번, 중간에 한번, 독립할 때 한번이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원초적으로 소질이 없는 제자는 어차피 가르쳐줘도 안되고 소질이 있는 제자라면 스스로 클 것이기 때문에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단다. 천재가 아니면 안 되는데 천재라면 스스로 큰다는 거다.
자신은 천재를 발굴하기만 하고 교육은 자유방임교육을 하겠다는 거다. 그럼 뭘 배우나? 인품을 배우고 예절을 배우란다. 이것이 미국식이다. 언뜻 그럴듯 하다. 그들은 원초적으로 선수층이 두껍기 때문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은 이 방법으로 프로바둑에 뒤졌다.
한국이 청소년 축구를 더 잘하는데서 보듯이 단기간에 성적을 내야 하는 청소년들은 한국식의 집중적인 교육이 효과가 있다. 그래서 한국이 잘하는 분야는 대개 청소년들이 두각을 나타낸다.
쇼트트랙의 진선유, 바둑의 이창호, 골프의 위성미, 양궁의 김수녕은 모두 청소년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미국의 프로야구는 40살이 되어서 사이영상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들은 저변이 넓은 만큼 그만치 여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바둑은 여유부리다가 망했고.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구의 강소국들은 공통적으로 한국과 같은 방법으로 성공하고 있다. 성공모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한국에는 한국에 맞는 모델이 있을 수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의 성공에서 성공모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월드컵과 올림픽의 성공사례가 함부로 일반화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도 있는 것이다. 히딩크로 재미봤다 해서 대통령도 네덜란드 출신으로 꾸어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축구가 리더를 외부에서 영입해서 재미를 봤듯이, DJ도 민주당 변방의 비주류인 노무현을 세워서 정권 재창출로 재미를 봤고 여기에 재미들인 필자가 우리당 변방의 외곽세력인 강금실을 추천하는 것도 또한 그 성공모델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변화의 바람은 변방에서 불어온다. 변방에서 핵을 형성한 강한 소수가 중앙의 분열된 다수를 치는 것이 기나긴 역사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히딩크는 외방에서 왔고 노무현도 변방에서 왔고 강금실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