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것은 의도적인 공격행동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 타격대상을 정해놓고 때리는 거다.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먼저 내려져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필자의 글이 그 목표를 달성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전제를 감안하고 판단해야 한다. 까는 글은 잘 깠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고, 잘 깠으면 만점을 주어야 한다. 전쟁터에서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총알은 공정하게 날아가지 않는다. 오직 적군만을 타격할 뿐이다. 근데 어떤 바보가 ‘그건 잘못된게 아닌가? 적군에게도 한발 쏘았으면 아군에게도 한발 쏘아야 공정한거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질문한다면 말이 안 통하는 그 바보를 쫓아내는 수 밖에 없다. 그런 어이없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왜? 이 나라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도 사실은 대학을 다니고 싶어 했는뎅?’ 하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럼 대학을 다 없애자는 말이냐?’하고 엉긴다면 번짓수를 한참 잘못 짚은 거다. 이 역시 이 나라 대학교육의 실패다. 깔려고 까는 거다. 까야 한다는 전제는 이미 내려져 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 사이트에서 즉시 쫓아내야 한다. ‘인간과 바퀴벌레의 지능 차이는 없다’고 말하면 ‘차이가 있는뎅?’ 하고 진지한 얼굴로 되묻을 사람은 이 사이트에 오지 말아야 한다. 지능 차이가 없다는 말은 지능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뭐가 지능이지?’ 하고 독자에게 되묻고 있는 거다. 의도적으로 특정 지점에다 각을 세운 것이며, 그렇게 피아구분을 하는 것이다. 단지 줄을 댈 목적으로 대학에 가는 잘못된 현실을, 그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이 사이트의 적이다. 그들은 타격대상이다. 그들은 필자의 글을 읽고 불쾌해져야 한다. 왜? 필자가 그들을 타격할 의도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지지자가 이 사이트를 방문하여 뭔가 얻어간다면 곤란하다. 필자는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이 사이트에 오지 않도록 만든다. 그것이 이 사이트의 존립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땅히 불쾌해져야 한다. 왜? 적이니까. 적과의 소통은 없는 거다. 타격할 뿐. 다시 말하지만 인간과 바퀴벌레의 지능차이는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지능의 근본이 인간의 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 바깥에 있다는 말이다. 소통지능 개념과 맥을 같이 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칭원리에 따른 바깥과의 상호작용. 우리가 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열까지 셀줄 알기 때문이다. 숫자가 없는 부족민은 셈을 못한다. 하나 둘 외에 수사가 없다. 하나 둘 다음은 ‘많다’이다. 수사가 없는 부족은 매우 많다. 이누이트부터 피그미, 애보리진까지 다양하다. 수사가 없을 때는 발가락, 손가락으로 셈하면 된다. 발가락, 손가락도 없다면? 셈 못한다. 아이큐 200인데 언어에 수사가 없고 발가락도 없고 손가락도 없다면? 주변에 손가락 발가락을 대용할 사물도 없다면? 셈을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과 바퀴벌레의 지능은 동일하다. 무엇인가? 지능이란 동시에 여럿을 뇌 안의 메모리에 띄우는 능력이다. 무엇을 띄우는가? 포지션을 띄운다. 그 다음은? 회로로 잇는다. 다섯을 세려면 다섯 포지션과 각각에 YES와 NO를 투입해야 하며 구조론적으로 2를 배치하려면 5가 필요하므로 매우 많은 뇌세포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몇 개의 뇌세포가 있을까? 0이다. 인간에게는 뇌세포가 단 하나도 없다. 왜? 포맷되었기 때문이다. 공CD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초단계에서 포지션이 지정된 뇌세포가 없으므로 바퀴벌레와 지능이 같다. 인간이 셈할 수 있는 것은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수사가 있고 손가락이 있기 때문이다.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포지션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판단은 낯선 상황에서 일어난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상황에서 불러낼 데이터가 없다면? 인간은 상황 그 자체를 포지션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바퀴벌레에게도 있다. 짚신벌레도 물 속을 헤엄치고 있으며, 섬모로 물을 느끼고 그 물에 포지션을 부여하여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빛을 보고 모여든다. 무엇인가? 컴퓨터가 돌아가는 것은 파일이 있기 때문이고, 파일이 돌아가는 것은 OS가 있기 때문이고, OS가 들어가는 것은 그 OS를 구동하는 또 뭐가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계속 추궁해 들어가면 최후에 도달하는 것은? 하드웨어다. 최종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차이는 없다. 소프트는 하드를 복제하여 하드에 존재하는 포지션 숫자만큼 포지션을 지정해놓은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인간이나 짚신벌레나 바깥의 주어진 상황 그 자체를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YES NO를 판단하며 이는 자연에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 안으로 복제하여 끌어들인 것이 지능이다. 결론적으로 15개월 아기가 공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자연에 이미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밸런스가 있고, 그것이 판단을 대리하는 것이며 공정성은 아기의 마음에 있는게 아니라, 우주안에 있는 것이다. 하드웨어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지점에서 인간과 바퀴벌레의 지능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바퀴벌레도 신체감관을 동원하여 하드웨어를 소프트웨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셈을 못하는 사람이 발가락 손가락을 동원하는 것도 하드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정성 개념은, 정확히 밸런스 감각이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며, 환경에 대한 대응이며, 그건 우주 안의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거다.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한다? 도구도 환경의 일부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을 사용한다. 생명체는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환경을 사용하는게 아니라 환경이 인간을 사용하는 거다. 그러므로 모든 동식물은 도구를 사용한다. 식물도 빛이라는 도구와, 공기라는 도구와, 물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몇 살때부터 도구를 사용하는 것일까?’라거나 ‘유인원은 어느 수준에서 도구를 이용할까?’라는 것은 바보같은 소리다. 손이 없으니 도구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자기 몸도 도구의 하나이며 자기 몸을 사용하는 모든 종은 이미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환경장악능력이다. 가장 많은 환경을 경험한 자가 가장 우수한 능력을 자랑한다. 말하자면 머리 속에 도서관을 통째로 넣고 다니는 것이다. 자연환경 자체가 거대한 도서관이다. 환경이 단조로우면 지능이 떨어진다. 필자가 바보들을 타격하는 이유는 구조론 사이트가 기승전결의 기에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싸움을 거는 것이다. 그게 이해가 안 된다면 그것은 필자의 글을 하극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바보들은 필자의 글 내용을 문제삼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필자의 포지션을 문제삼고 있다. 필자를 하로 규정하고, 기존의 학계시스템을 상으로 규정하고 필자의 공격행동을 하극상으로 규정하여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상주의가 새로운 그림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그림을 부정하면 기존의 화단이나 모든 것이 기존의 아카데미 시스템에서 만든건데 ‘니도 그 구조 안에서 서식하는 주제에 그것을 부정한다는게 말이 되냐?’ 이런 거다. 예컨대 필자가 한국을 비판하면 ‘넌 한국인 아냐?’ 이런 거다. 여기서 정답은 역시 기승전결이다. 필자는 기에 포지셔닝 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을 치는 거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는데 ‘니는 한자 안 배웠냐?’고 시비붙는 격이면 피곤한 거다. 포지셔닝은 각자가 자기 자리를 정하기 나름이며, 그 지정은 비전에 따라 결정된다. 비전은 다음 단계의 계획이다. 다음 단계의 계획이 없고 지금 보여준 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이면 기존의 시스템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 경우는 구조론이 기존의 학계 시스템의 하부로 편입되는 거다. 그런데 인상주의는 기존의 아카데미 중심의 시스템 안에서 색다른 양념이나 구색맞추기로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새 판을 짰으며 그 결과로 다음 단계가 계속 나왔다. 인상주의로 끝난게 아니었던 거다. 기존의 시스템이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 아니라 새 토대가 깔려진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을 강하게 타격할수록 다음 단계의 전개될 폭은 커지는 것이다. 1을 때리는 자는 1만큼 진도를 나갈 것이고 100을 때리는 자는 100만큼 진도를 나가는 거다. 이는 투수가 투수판을 밟고 지구를 박차고 그 반동의 힘으로 공을 던지는 원리와 같다. 늘 하는 말이지만 소통을 막는 것이 가장 큰 소통의 방법이다. 소통이 안 되는데 소통이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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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우리가 아는 불교 중의 상당부분은 바라문교 사상이다. 예컨대 환생이라든가 이런건 불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천사나 사탄 이런건 기독교가 아니라 회교 하고도 이란족 토속신앙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혼선이 빚어진다. 불교를 바라문교의 발전으로 본 사람들이 이단이잖아 하고 시비를 거는 거. 기독교를 이단 유대교로 보고 시비를 거는 거. 이런 마찰은 석가 당시에도 있었다. "내가 봤는데 석가 저 양반 고기 먹었다. 중이 고기를 먹다니." 하고 만천하에 폭로한 자 있었다. 석가는 바라문교를 원천부정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바라문교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피곤한 거다. 불교의 가르침이 고기 먹지말라는건 아니다. 전혀. 그런 무리들 때문에 석가도 피곤해서 상당히 타협한 느낌도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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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너부리
깅동렬 선생님의 탁월한 식견들을 딴라라당에서 사용하면 어떻게하나 걱정이 될 때 있었는데..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ㅎㅎ
글 중에서 이 대목들이 제 맘에 와닿고 있습니다.
"포지셔닝은 각자가 자기 자리를 정하기 나름이며, 그 지정은 비전에 따라 결정된다. 비전은 다음 단계의 계획이다. 다음 단계의 계획이 없고 지금 보여준 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이면 기존의 시스템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 경우는 구조론이 기존의 학계 시스템의 하부로 편입되는 거다. 그런데 인상주의는 기존의 아카데미 중심의 시스템 안에서 색다른 양념이나 구색맞추기로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새 판을 짰으며 그 결과로 다음 단계가 계속 나왔다.
인상주의로 끝난게 아니었던 거다. 기존의 시스템이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 아니라 새 토대가 깔려진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을 강하게 타격할수록 다음 단계의 전개될 폭은 커지는 것이다. 1을 때리는 자는 1만큼 진도를 나갈 것이고 100을 때리는 자는 100만큼 진도를 나가는 거다. 이는 투수가 투수판을 밟고 지구를 박차고 그 반동의 힘으로 공을 던지는 원리와 같다."
100만큼 때리면 100만큼 진도나갈 수 있지만, 그만큼 기존 세력의 반동도 100만큼 크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