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지지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지지다”
‘언제나 그렇듯이 과학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를 추억해 본다. ‘개목걸이’라는 신조어 까지 등장했다. 제법 안다 하는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도 좋지만 난 이따위 개목걸이를 사양하겠다’며 칼럼들을 썼던 것이다.
“바야흐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시대가 왔도다. 이제 출근 후에 마음 놓고 사우나에도 못가게 되었다. 이야 말로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라도 내려온 격이 아닌가? 말세의 조짐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안다 하는 인간들이 개나 소나 한마디씩 던지며 한탄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이 지금은 휴대폰을 애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감시당하기로는 휴대폰이 삐삐보다 훨 무서운 존재인데도 말이다.
하기사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골목골목에 방법 카메라가 설치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묘사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폰카의 보급으로 누구라도 ‘개똥녀’가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된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적응하고 있다. 자동차가 해마다 수만건의 사고를 내고 있어도 우리는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듯이, 휴대폰이 우리를 귀찮게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젊은이는 잘 적응하고 연로하신 분들은 천천히 적응할 것이다. 잘 적응한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여 편리함을 구할 것이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뭔가 손해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MBC의 헛발질! 삐삐라는 별 것 아닌 것에 경기를 일으키던 그 사람들이 휴대폰과 폰카라는 강적 앞에서는 침묵하고 있듯이, 나는 이것이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등장하면 늘 거품물고 경기하는 인간들이 있어왔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MBC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네의 주변에는 교통사고 환자 한 사람 없느냐고.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당사자가 아닌 제 3자는 일단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피해자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오늘도 휠체어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황교수가 구세주일 수 있다. 누구도 환자 앞에서 황박사의 연구를 부정하는 잔인한 말을 할 권리는 없다. 환자들이야 말로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가 아닌가.
환자의 인권을 부인하고 도무지 누구의 인권을 말한다는 말인가?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다. 교통사고로 매년 수만명이 죽고 다치는 일에는 무감각하면서 아직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사스에는 극도로 민감한 현상 말이다. 어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그 문제와 무관한 제 3자도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 모른다 싶어서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혹시 모르자나.”
대중의 막연한 공포심에 기대는 이런 논리는 위력적이다. 그러나 반칙이다. 알만한 지식인들이 막연한 공포심이나 근거없는 우려를 말한대서야 될일인가? 대중이 그러한 우려에 빠져도 지식인이라면 그 우려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이 지식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의 공포심을 부채질한다면 죄악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게 되어 있다. 문제의 당사자만 남고 제 3자는 빠지게 되어 있다.
당사자는 누구인가? 첫째는 과학자이고 둘째는 환자들이다. 제 3자는 원초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권이 없다. 환자가 살아보겠다는데 누가 그들의 생명권을 부인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알만한 사람들이 그런다면 그건 죄악이다.
MBC의 영역침범은 명백하게 도를 넘었다. 지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정도라면 국정원이 개입해야 할 정도의 사안이다. 일반기업이라면 당연히 기밀로 처리되어야 할 정도의 내용을 MBC가 무리하게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삼성이 이런 연구를 한다면 구체적인 결실이 나오기까지는 절대비밀로 했을 것이다. 황우석은 돈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연구내용을 공개했고 그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성체줄기 세포를 대안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기차가 처음 나왔을 때, 더 좋은 자동차도 있는데 미쳤다고 기차를 만드냐고 시비하는 사람 있었다. 자동차가 나오면 더 좋은 비행기가 조만간 나올건데 미쳤다고 자동차를 만드냐 하고 항의한다면 부질없는 것이다.
성체줄기세포도 좋고 배아복제도 좋다. 제 3자는 빠지고 과학자들 간의 자유경쟁에 맡겨야 한다. 윤리논란은 연구가 더 진행된 다음에 나올 소리다.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등장한 후에 시비할 일이다. 아직은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위험요인은 당연히 감수하고 갈 일이다.
‘아직 피해자가 없지만 앞으로 혹시 피해자가 등장할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르면 확실해질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피해자가 등장하면 그때 가서 시비하면 된다. 명백한 사실은 지금 가장 큰 피해자는 황박사의 연구가 지체되어 피해를 입게 될 환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자기 주위에 교통사고 피해자는 한 사람도 없는가?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그들에게 절망을 명령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인가?
과학사에 이와 유사한 헛소동의 장면은 무수히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걱정도 팔자인 바보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무시하고 진도 나가자.
‘언제나 그렇듯이 과학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를 추억해 본다. ‘개목걸이’라는 신조어 까지 등장했다. 제법 안다 하는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도 좋지만 난 이따위 개목걸이를 사양하겠다’며 칼럼들을 썼던 것이다.
“바야흐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시대가 왔도다. 이제 출근 후에 마음 놓고 사우나에도 못가게 되었다. 이야 말로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라도 내려온 격이 아닌가? 말세의 조짐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안다 하는 인간들이 개나 소나 한마디씩 던지며 한탄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이 지금은 휴대폰을 애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감시당하기로는 휴대폰이 삐삐보다 훨 무서운 존재인데도 말이다.
하기사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골목골목에 방법 카메라가 설치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묘사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폰카의 보급으로 누구라도 ‘개똥녀’가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된 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적응하고 있다. 자동차가 해마다 수만건의 사고를 내고 있어도 우리는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듯이, 휴대폰이 우리를 귀찮게 하더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젊은이는 잘 적응하고 연로하신 분들은 천천히 적응할 것이다. 잘 적응한 사람들은 이를 이용하여 편리함을 구할 것이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뭔가 손해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MBC의 헛발질! 삐삐라는 별 것 아닌 것에 경기를 일으키던 그 사람들이 휴대폰과 폰카라는 강적 앞에서는 침묵하고 있듯이, 나는 이것이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등장하면 늘 거품물고 경기하는 인간들이 있어왔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MBC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네의 주변에는 교통사고 환자 한 사람 없느냐고.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당사자가 아닌 제 3자는 일단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피해자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오늘도 휠체어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황교수가 구세주일 수 있다. 누구도 환자 앞에서 황박사의 연구를 부정하는 잔인한 말을 할 권리는 없다. 환자들이야 말로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가 아닌가.
환자의 인권을 부인하고 도무지 누구의 인권을 말한다는 말인가?
초기조건의 민감성이다. 교통사고로 매년 수만명이 죽고 다치는 일에는 무감각하면서 아직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사스에는 극도로 민감한 현상 말이다. 어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그 문제와 무관한 제 3자도 혹시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 모른다 싶어서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혹시 모르자나.”
대중의 막연한 공포심에 기대는 이런 논리는 위력적이다. 그러나 반칙이다. 알만한 지식인들이 막연한 공포심이나 근거없는 우려를 말한대서야 될일인가? 대중이 그러한 우려에 빠져도 지식인이라면 그 우려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이 지식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의 공포심을 부채질한다면 죄악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게 되어 있다. 문제의 당사자만 남고 제 3자는 빠지게 되어 있다.
당사자는 누구인가? 첫째는 과학자이고 둘째는 환자들이다. 제 3자는 원초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권이 없다. 환자가 살아보겠다는데 누가 그들의 생명권을 부인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알만한 사람들이 그런다면 그건 죄악이다.
MBC의 영역침범은 명백하게 도를 넘었다. 지금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정도라면 국정원이 개입해야 할 정도의 사안이다. 일반기업이라면 당연히 기밀로 처리되어야 할 정도의 내용을 MBC가 무리하게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삼성이 이런 연구를 한다면 구체적인 결실이 나오기까지는 절대비밀로 했을 것이다. 황우석은 돈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연구내용을 공개했고 그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성체줄기 세포를 대안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기차가 처음 나왔을 때, 더 좋은 자동차도 있는데 미쳤다고 기차를 만드냐고 시비하는 사람 있었다. 자동차가 나오면 더 좋은 비행기가 조만간 나올건데 미쳤다고 자동차를 만드냐 하고 항의한다면 부질없는 것이다.
성체줄기세포도 좋고 배아복제도 좋다. 제 3자는 빠지고 과학자들 간의 자유경쟁에 맡겨야 한다. 윤리논란은 연구가 더 진행된 다음에 나올 소리다.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등장한 후에 시비할 일이다. 아직은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위험요인은 당연히 감수하고 갈 일이다.
‘아직 피해자가 없지만 앞으로 혹시 피해자가 등장할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르면 확실해질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피해자가 등장하면 그때 가서 시비하면 된다. 명백한 사실은 지금 가장 큰 피해자는 황박사의 연구가 지체되어 피해를 입게 될 환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자기 주위에 교통사고 피해자는 한 사람도 없는가?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그들에게 절망을 명령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인가?
과학사에 이와 유사한 헛소동의 장면은 무수히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걱정도 팔자인 바보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무시하고 진도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