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나 보수를 떠나 소통이 본질이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아이디어가 고갈된 사람들과 차려놓은 남의 밥상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진부한 대결이다. 네티즌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흔히들 진보 진보 하는데.. 20세기 들어 지금까지 진보의 핵심적인 동력원은 ‘교육’이었다. 50년 전으로 돌아가서.. 국민 대다수가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그 시절.. 진보만이 담당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좌파가 제법 살아있다는 남미나 동남아쪽, 그리고 아프리카들의 공통점은 초, 중등 교육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기엔 사회의 그 어떤 집단 보다 교사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혁명 혹은 사회변혁의 핵심은 ‘신분상승’이다. 이건 명백하다. 그리고 신분상승의 욕구는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건 필자의 주장이다. 인류가 어떤 형태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했다 해도 필연적으로 신분상승, 혹은 사회적인 상승욕구와 그에 따른 마찰의 문제가 생겨난다.
왜인가? 인간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의 욕망이며(안전의 욕구, 혹은 생리적 욕구 따위가 아닌) 자기실현의 욕망은 이웃과의 충분한 소통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그리고 사회가 진보할 수록 이러한 본질은 오히려 더 첨예하게 드러난다.
발달된 사회에서 인간은 더 소외감을 느낄 것이며, 한층 더 깊이있는 소통을 갈망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직은 박근혜식 먹고사니즘에 중독되어 소통의 문제에 무관심한 인간들이 허다하지만.)
즉 인간이 추구하는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성의 이면에는 더 많은, 그리고 더 양질의 사회적인 소통에의 열망이라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 높은 수준의 의사소통그룹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대에 와서 실제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은 교육 뿐이다. 중세라면 양반과 상놈, 귀족과 농노로 계급이 갈려 있었지만.. 상놈은 양반되는게 목적이었고 농노는 귀족되는게 꿈이었지만.. 혁명의 세기라 할 20세기 초만 해도 사회는 글을 아는 사람과 글을 모르는 사람으로 갈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혁명의 열기가 식어버린, 핵심동력을 상실해버린 본질적인 이유는 진보가 문자의 보급을 담당한다는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초, 중등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변혁에의 동기부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를 넘어 다시금 정보화의 시대가 왔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1970년대라면 중등교육만 받아도 줄만 잘 서면, 현대 자동차에 취직할 수 있었다. 중등교육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중등교육 만으로는 충분히 대접받고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전국민적인 사교육 열기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서울대다, 조기유학이다 해서 고등교육에 목을 매고 있지만..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사회는 또 변한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욕망은 좌절될 수 밖에 없다. 사회가 변하고 그만큼 욕망이 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교만 나오면 된다는 발상은 전형적으로 20세기식 사고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조선왕조 말기에 집 팔고 논 팔아서 양반 족보를 사들인 사람은 양반상놈 없다는 개화 바람에 거지 되었다. 지금의 과잉 사교육도 마찬가지.)
정보화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계급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의 변혁의 동인이 될 수 있다. 네트워크에 소속된 자와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자로 나눠지고 있다.
신분의 의미는 상대방을 인정하느냐이다. 고대 로마의 시민은 노예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거주하면서도 문턱 하나를 사이로 두고 서로 친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닌가?)
형태만 바꿨을 뿐 그런 장벽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네트워크가 그런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가 좌초하고 있는 이유는.. 교육이라는 진보의 핵심적인 경쟁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라! 한겨레 신문이나 오마이뉴스나 어떻게든 국민을 가르쳐 보겠다고 난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은 교사이고 독자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마인드 자체가 그렇다. 실제로 학생들이 주 독자층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문의 기자들이 자신을 교사로 착각한다. 당연히 기사는 훈계조로 간다. 특히 손석춘의 칼럼은 완전히 담임선생님의 수업시간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역사는 오늘도 진도 나가고 있는데 이 나라의 진보주의는 그러한 변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둘이다. 돈 혹은 완력을 매개로 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받느냐 혹은 의사소통을 매개로 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받느냐다. 전자는 자본의 가치고 후자는 문화의 가치다. 자본이든 문화든 공통점은 무엇을 기준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을 것인가다. 이것이 본질이다.
정리하자.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아이디어가 고갈된 사람들과 차려놓은 남의 밥상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진부한 대결이다. 네티즌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무엇인가? 본질은 ‘신분’이다. 신분의 문제는 상대방을 대등한 존재로, 혹은 친구로 인정하는가이다.
200년 전 프랑스의 대혁명은 계급을 위주로 한 신분제도를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농노다 귀족이다 해서 신분계급이 다르면 서로 사귀지 않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봉건적 계급제도는 철폐되었다. 그러나 ‘신분’의 문제는 형태를 바꿔서 계속 남아있다.
20세기 들어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혁명은 글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신분의 벽을 철폐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대개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교육기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열망했기 때문이다.(특히 중국의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역시 태동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실제로 적용된 예가 없다.)
- 사회 변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신분상승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 봉건적 계급제도가 철폐된 지금은 다른 형태로 신분상승 욕구가 표출된다.
- 혁명의 세기라 할 20세기에서 사회변혁의 핵심적 동인은 교육기회의 균등한 보급문제였다.
- 신분상승 욕구는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에 기초한 근원적인 욕구이므로 인간은 어떤 사회, 어떤 체제 하에서도 일정한 정도로 사회적인 상승의 열망을 표출시키고야 만다.
- 18세기에는 계급제도의 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이었고, 20세기엔 교육기회의 균등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이었듯이, 21세기에는 정보화를 배경으로한 자기실현의 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으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진보주의가 침체한 이유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었기 때문인 바, 20세기에서 중등교육의 대량보급이 지구촌 사회를 격동시켰듯이, 21세기 들어서는 정보화가 다시 한번 사회변혁의 핵심동력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이디어를 보충할 수 있다는 견해가 되겠다.
결국은 역사가 결정한다. 마르크스주의 식으로 골방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허황된 거다. 역사 자체의 내적인 자기 일관성과 자기 완결성을 따라 사회는 움직여간다.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21세기 들어 인류문명의 핵심적인 변화는 정보화와 그 언저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는 자기실현의 요구이며 봉건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자기실현은 사회적인 신분상승에서 얻어졌다.
21세기에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하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도 일정한 정도로 사회적인 모순과 긴장은 존재한다. 왜인가? 인간이 근본에서 자기실현의 욕구를 지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에는 계급으로 그것을 풀었고(혹은 묶었고) 근대사회는 교육으로 풀었고(한편으로 묶었고) 한편으로 자본으로 풀었다(혹은 억압했다).
미래사회는 정보가 그 역할을 대체한다. 구체적으로는 네트워크 상에서의 위치다. 블로그가 존재하고 동호회가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소통의 장이 되고 거기서 ‘인정받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의 측면에서 볼때 진보의 에네르기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에네르기가 일정한 정도로 쌓이면 사회적인 지각판 구조의 일대변동을 몰고오는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진영의 문제
오늘날 진보주의가 침체한 이유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교육기회의 균등문제에서 진보의 탈출구를 찾았는데 지금은 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진보주의는 여전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서당의 훈장질’을 반복하고 있다. 이건 틀려먹은 거다. 새로운 진보의 동력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모색한 것이 일부의 생태운동이요 또 일각의 문화운동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한계에 부닥쳐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지율스님과 도법스님, 윤구병의 변산공동체가 보여준 것이 그 한계다. 문화운동으로는 만인의 형님을 자처하는 김지하가 썰을 풀고 다니는 것이 그 한계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진보의 에네르기가 응축되고 있으며 여전히 이 땅에서 진보할 가치는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왜인가?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실현의 욕구를 앞세우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모순된 존재다.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욕망을 죄악시 하는 좌파들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천년 혹은 만년 후에도 여전이 이 문제로 갈등할 것이다.
에너지난이 해결된 즉 인류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상사회에 이르렀다 해도 여전히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사회에 건설적인 긴장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실현의 욕구, 상승의 욕구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소통하고 싶어한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사회적인 상승을 열망하고 있다. 한국인의 그러한 열망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자본은 그 답이 아니다.(돈이 그 답이라고 믿는 자도 더러는 있기는 한데 그들은 열심히 딴나라당에 투표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좌절감과 소외감은 깊어질 뿐이다. 왜? 그래봤지 이문열은 왕따니까?)
답은 인터넷에 있다. 인터넷이 한국인의 소외를 치료하는 한, 인터넷이 한국인의 소통에의 욕구를 치료하는 한, 인터넷의 블로그와 동호회가 사회적인 상승을 현실화시켜 주는 한, 한국의 진보주의는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왜? 아이디어는 언제나 진보가 만드니까.
돈이 답이라고 믿는 자들은 이문열처럼 왕따가 될 것이다. 돈으로 소통하고 돈으로 상승하려는 자들은 배척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통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 동안에 현명한 이들은 직접적인 소통의 수단인 문화를 구하기 때문이다. 그 문화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진보란 결국 인간 사이에 있는 소통의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답은 진보(전통적인)에 있지 아니하고 보수(전통적인)에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소통’에 있을 따름이다.
다만 훗날 세상이 바뀌고 나면 역사가 그것을 평가하되, 진보로 기록할 뿐이다. 지금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다만 새로움 그 자체이다.
음.. 너무나 친절한 설명.. 그래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분들을 위한 나머지 공부는 이러하다.
왜 세상이 시끄러운가? 사회가 변혁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 사회는 변혁하는가? 인간이 상승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상승을 바라는 이유는? 자기실현의 욕구 때문이다. 왜 인간은 자기실현을 원하는가? 그것은 인간존재의 실존적 자기규정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이를테면 봉건적 계급제도의 장벽과 같은 것들이다. 계급제도는 철폐되었지 않은가? 자본의 억압, 성과 인종에 따른 차별, 기회의 불평등 형태로 장벽은 여전히 남아있다. 복지의 확충, 노동의 역할, 교육의 보급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진보는 아이디어의 고갈 문제에 직면해 버렸다. 거기서 탈출구는 없는가? 생태운동이나 문화운동의 방향으로 틈새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환경운동과 같은 틈새시장에서 건설적인 대안이 발견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환경운동은 보조적인 관심사에 불과하다. 본질은 ‘소통’의 문제다. 소통이라는 본질에서 승부해야 한다. 그러한 승부를 가능케 하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보화다. 그렇다면 과연 정보화를 배경으로 한 소통의 문제가 사회에 첨예하게 대두될 것인가? 그렇다. 인간은 갈수록 고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땅만 있으면 땅땅거리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돈만 있어도 돈돈거리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미래사회에는 진정한 친구가 없이는 살 수 없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아이디어가 고갈된 사람들과 차려놓은 남의 밥상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진부한 대결이다. 네티즌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필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흔히들 진보 진보 하는데.. 20세기 들어 지금까지 진보의 핵심적인 동력원은 ‘교육’이었다. 50년 전으로 돌아가서.. 국민 대다수가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있던 그때 그 시절.. 진보만이 담당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좌파가 제법 살아있다는 남미나 동남아쪽, 그리고 아프리카들의 공통점은 초, 중등 교육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기엔 사회의 그 어떤 집단 보다 교사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혁명 혹은 사회변혁의 핵심은 ‘신분상승’이다. 이건 명백하다. 그리고 신분상승의 욕구는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건 필자의 주장이다. 인류가 어떤 형태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했다 해도 필연적으로 신분상승, 혹은 사회적인 상승욕구와 그에 따른 마찰의 문제가 생겨난다.
왜인가? 인간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의 욕망이며(안전의 욕구, 혹은 생리적 욕구 따위가 아닌) 자기실현의 욕망은 이웃과의 충분한 소통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그리고 사회가 진보할 수록 이러한 본질은 오히려 더 첨예하게 드러난다.
발달된 사회에서 인간은 더 소외감을 느낄 것이며, 한층 더 깊이있는 소통을 갈망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직은 박근혜식 먹고사니즘에 중독되어 소통의 문제에 무관심한 인간들이 허다하지만.)
즉 인간이 추구하는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성의 이면에는 더 많은, 그리고 더 양질의 사회적인 소통에의 열망이라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 높은 수준의 의사소통그룹에 속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대에 와서 실제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은 교육 뿐이다. 중세라면 양반과 상놈, 귀족과 농노로 계급이 갈려 있었지만.. 상놈은 양반되는게 목적이었고 농노는 귀족되는게 꿈이었지만.. 혁명의 세기라 할 20세기 초만 해도 사회는 글을 아는 사람과 글을 모르는 사람으로 갈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혁명의 열기가 식어버린, 핵심동력을 상실해버린 본질적인 이유는 진보가 문자의 보급을 담당한다는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초, 중등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변혁에의 동기부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를 넘어 다시금 정보화의 시대가 왔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1970년대라면 중등교육만 받아도 줄만 잘 서면, 현대 자동차에 취직할 수 있었다. 중등교육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중등교육 만으로는 충분히 대접받고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전국민적인 사교육 열기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서울대다, 조기유학이다 해서 고등교육에 목을 매고 있지만..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사회는 또 변한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욕망은 좌절될 수 밖에 없다. 사회가 변하고 그만큼 욕망이 변하기 때문이다. 좋은 학교만 나오면 된다는 발상은 전형적으로 20세기식 사고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조선왕조 말기에 집 팔고 논 팔아서 양반 족보를 사들인 사람은 양반상놈 없다는 개화 바람에 거지 되었다. 지금의 과잉 사교육도 마찬가지.)
정보화 시대에는 봉건시대의 계급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의 변혁의 동인이 될 수 있다. 네트워크에 소속된 자와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자로 나눠지고 있다.
신분의 의미는 상대방을 인정하느냐이다. 고대 로마의 시민은 노예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거주하면서도 문턱 하나를 사이로 두고 서로 친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닌가?)
형태만 바꿨을 뿐 그런 장벽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네트워크가 그런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가 좌초하고 있는 이유는.. 교육이라는 진보의 핵심적인 경쟁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라! 한겨레 신문이나 오마이뉴스나 어떻게든 국민을 가르쳐 보겠다고 난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은 교사이고 독자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마인드 자체가 그렇다. 실제로 학생들이 주 독자층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문의 기자들이 자신을 교사로 착각한다. 당연히 기사는 훈계조로 간다. 특히 손석춘의 칼럼은 완전히 담임선생님의 수업시간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역사는 오늘도 진도 나가고 있는데 이 나라의 진보주의는 그러한 변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둘이다. 돈 혹은 완력을 매개로 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받느냐 혹은 의사소통을 매개로 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받느냐다. 전자는 자본의 가치고 후자는 문화의 가치다. 자본이든 문화든 공통점은 무엇을 기준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을 것인가다. 이것이 본질이다.
정리하자.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결은 아이디어가 고갈된 사람들과 차려놓은 남의 밥상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진부한 대결이다. 네티즌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새로운 동력원이 도입되어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무엇인가? 본질은 ‘신분’이다. 신분의 문제는 상대방을 대등한 존재로, 혹은 친구로 인정하는가이다.
200년 전 프랑스의 대혁명은 계급을 위주로 한 신분제도를 철폐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농노다 귀족이다 해서 신분계급이 다르면 서로 사귀지 않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봉건적 계급제도는 철폐되었다. 그러나 ‘신분’의 문제는 형태를 바꿔서 계속 남아있다.
20세기 들어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혁명은 글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신분의 벽을 철폐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대개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교육기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열망했기 때문이다.(특히 중국의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역시 태동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은 실제로 적용된 예가 없다.)
- 사회 변혁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신분상승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 봉건적 계급제도가 철폐된 지금은 다른 형태로 신분상승 욕구가 표출된다.
- 혁명의 세기라 할 20세기에서 사회변혁의 핵심적 동인은 교육기회의 균등한 보급문제였다.
- 신분상승 욕구는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에 기초한 근원적인 욕구이므로 인간은 어떤 사회, 어떤 체제 하에서도 일정한 정도로 사회적인 상승의 열망을 표출시키고야 만다.
- 18세기에는 계급제도의 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이었고, 20세기엔 교육기회의 균등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이었듯이, 21세기에는 정보화를 배경으로한 자기실현의 문제가 변혁의 핵심동인으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진보주의가 침체한 이유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었기 때문인 바, 20세기에서 중등교육의 대량보급이 지구촌 사회를 격동시켰듯이, 21세기 들어서는 정보화가 다시 한번 사회변혁의 핵심동력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이디어를 보충할 수 있다는 견해가 되겠다.
결국은 역사가 결정한다. 마르크스주의 식으로 골방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허황된 거다. 역사 자체의 내적인 자기 일관성과 자기 완결성을 따라 사회는 움직여간다.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
21세기 들어 인류문명의 핵심적인 변화는 정보화와 그 언저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는 자기실현의 요구이며 봉건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자기실현은 사회적인 신분상승에서 얻어졌다.
21세기에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하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통한 자기실현’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도 일정한 정도로 사회적인 모순과 긴장은 존재한다. 왜인가? 인간이 근본에서 자기실현의 욕구를 지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에는 계급으로 그것을 풀었고(혹은 묶었고) 근대사회는 교육으로 풀었고(한편으로 묶었고) 한편으로 자본으로 풀었다(혹은 억압했다).
미래사회는 정보가 그 역할을 대체한다. 구체적으로는 네트워크 상에서의 위치다. 블로그가 존재하고 동호회가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소통의 장이 되고 거기서 ‘인정받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존재, 그 자체가 역사의 측면에서 볼때 진보의 에네르기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에네르기가 일정한 정도로 쌓이면 사회적인 지각판 구조의 일대변동을 몰고오는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진영의 문제
오늘날 진보주의가 침체한 이유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교육기회의 균등문제에서 진보의 탈출구를 찾았는데 지금은 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진보주의는 여전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서당의 훈장질’을 반복하고 있다. 이건 틀려먹은 거다. 새로운 진보의 동력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모색한 것이 일부의 생태운동이요 또 일각의 문화운동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한계에 부닥쳐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지율스님과 도법스님, 윤구병의 변산공동체가 보여준 것이 그 한계다. 문화운동으로는 만인의 형님을 자처하는 김지하가 썰을 풀고 다니는 것이 그 한계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진보의 에네르기가 응축되고 있으며 여전히 이 땅에서 진보할 가치는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왜인가?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실현의 욕구를 앞세우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모순된 존재다.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욕망을 죄악시 하는 좌파들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천년 혹은 만년 후에도 여전이 이 문제로 갈등할 것이다.
에너지난이 해결된 즉 인류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상사회에 이르렀다 해도 여전히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사회에 건설적인 긴장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실현의 욕구, 상승의 욕구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소통하고 싶어한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사회적인 상승을 열망하고 있다. 한국인의 그러한 열망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자본은 그 답이 아니다.(돈이 그 답이라고 믿는 자도 더러는 있기는 한데 그들은 열심히 딴나라당에 투표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의 좌절감과 소외감은 깊어질 뿐이다. 왜? 그래봤지 이문열은 왕따니까?)
답은 인터넷에 있다. 인터넷이 한국인의 소외를 치료하는 한, 인터넷이 한국인의 소통에의 욕구를 치료하는 한, 인터넷의 블로그와 동호회가 사회적인 상승을 현실화시켜 주는 한, 한국의 진보주의는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왜? 아이디어는 언제나 진보가 만드니까.
돈이 답이라고 믿는 자들은 이문열처럼 왕따가 될 것이다. 돈으로 소통하고 돈으로 상승하려는 자들은 배척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통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 동안에 현명한 이들은 직접적인 소통의 수단인 문화를 구하기 때문이다. 그 문화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진보란 결국 인간 사이에 있는 소통의 벽을 허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답은 진보(전통적인)에 있지 아니하고 보수(전통적인)에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소통’에 있을 따름이다.
다만 훗날 세상이 바뀌고 나면 역사가 그것을 평가하되, 진보로 기록할 뿐이다. 지금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다만 새로움 그 자체이다.
음.. 너무나 친절한 설명.. 그래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분들을 위한 나머지 공부는 이러하다.
왜 세상이 시끄러운가? 사회가 변혁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 사회는 변혁하는가? 인간이 상승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상승을 바라는 이유는? 자기실현의 욕구 때문이다. 왜 인간은 자기실현을 원하는가? 그것은 인간존재의 실존적 자기규정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이를테면 봉건적 계급제도의 장벽과 같은 것들이다. 계급제도는 철폐되었지 않은가? 자본의 억압, 성과 인종에 따른 차별, 기회의 불평등 형태로 장벽은 여전히 남아있다. 복지의 확충, 노동의 역할, 교육의 보급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진보는 아이디어의 고갈 문제에 직면해 버렸다. 거기서 탈출구는 없는가? 생태운동이나 문화운동의 방향으로 틈새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환경운동과 같은 틈새시장에서 건설적인 대안이 발견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환경운동은 보조적인 관심사에 불과하다. 본질은 ‘소통’의 문제다. 소통이라는 본질에서 승부해야 한다. 그러한 승부를 가능케 하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보화다. 그렇다면 과연 정보화를 배경으로 한 소통의 문제가 사회에 첨예하게 대두될 것인가? 그렇다. 인간은 갈수록 고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땅만 있으면 땅땅거리고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돈만 있어도 돈돈거리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미래사회에는 진정한 친구가 없이는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