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조를 알아야 한다. 어디 가서 아는 체를 하더라도 그렇다. 구조를 알아야 제법 목에 힘이라도 줄 수 있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구조를 알고 떠드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구조는 하나 밖에 없다. 이런 구조, 저런 구조가 있는게 아니라 보편적인 하나의 구조가 있다. 이는 숫자가 하나 뿐인 것과 같다. 1,2,3,4로 나가는 숫자 외에 갑을병정으로 나가는 숫자가 또 있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십진법을 쓰던 천진법, 만진법을 쓰던 숫자는 하나다. 세상은 더하거나 쪼개져서 이루어졌고 숫자가 그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얽혀서 존재하고 구조가 그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더하거나 빼거나 간에 모든 숫자는 집합론에 포함된다. ◎ 이렇거나 저렇거나 얽힌 것은 모두 구조론에 포함된다. 간단히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 있는 것이 구조인데 1+1의 답은 2 외에 없기 때문에 구조는 하나 뿐인 것이다. 인간은 구조에 약하다. 이것이 구조론을 보급하며 필자가 느낀 것이다. 하나 안에 하나가 들어가 있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면 인간들은 그만 헷갈려 한다. 남자는 하나고 여자도 하나다. 이거 쉽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남자와 여자 둘이 들어가 식구를 이루고 있다. 하루는 하루고 한 달은 한 달이다. 참 쉽다. 그러나 하루 안에 밤과 낮 둘이 들어가 동거하면 서열이 생겨나서 아침이 먼저고 저녁은 나중이다. 벌써 헷갈리기 시작이다. 질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나 안에 둘이 불안정한 동거를 시작하면서 그 위태로운 지경에서 구조는 시작된다. 만유는 거기서 일어나고 거기서 종결짓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갑과 을에게 빵이 하나 있다. 갑이 그 빵을 먹었다. 그렇다면 을은 그 빵을 못먹게 된다. 여기서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법칙이 성립한다. 서로의 운명이 연동되는 것이다. 을의 운명이 갑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빵은 하나 밖에 없고 갑이 이미 그 빵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을은 운명적으로 굶어야 한다. 때려죽인다 해도 그 빵은 복구될 수 없다. 하느님 할아버지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떤가? 갑이 이미 그 빵을 먹어조졌는데도 행여나 하며 턱도 없는 요행수를 바라고 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인간 세상에서는 예사로 벌어지는 것이다. 왜? 울타리 치기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은 외부로부터 고립된 닫힌 공간에 있다. 그럴 때 서로의 운명이 연동된다. 그러나 보통은 그 울타리를 살피지 않는다. 닫힌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때문에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낭비, 에너지 손실이 일어난다. 갑과 을이 하나의 닫힌 공간에 공존한다면 갑을 보고 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전체가 100인데 갑이 70을 차지했다면 을은 30을 가진 것이다. 이게 구조론의 결론이다. 갑을 보고 을을 알고, 을을 보고 병을 알고, 병을 보고 정을 알고. 이렇게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하고 차차로 육갑을 짚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연관시켜서 전부 한 줄에 꿰어내는 방법으로 세상의 지식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효율성은 극대로 증대된다. 갑과 을의 사정을 각각 살펴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자동으로 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낭비, 에너지낭비 하지 말고 만유의 얽힘을 살펴 효율을 얻자는 거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자는 거다. 망망대해에 조각배 하나다. 갑과 을이 한 배를 타고 있다. 그 배에 빵은 하나 밖에 없다. 갑이 빵을 먹어버렸다면 을은 빵을 먹을 수 없다. 이 절대의 규칙 하나만 가지고 우주 안의 모든 지식을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갑이 먹으면 을은 먹을 수 없는 것이며 이를 위반한다면 모순이다. 모순은 배척된다. 갑의 사정에 의해 을의 운명이 결정되는 절차는 다섯 단계가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시작되고 끝나는 절차다. 그 가운데는 대칭이 존재한다. 갑과 을은 그 사건 안에서 운명이 얽혀 구조의 대칭을 이룬다. 대칭구조 안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포지션이다. 구조론은 대칭과 포지션으로 모두 설명한다. 갑과 을로 모두 설명한다. 월급은 같은데 소비가 늘었다면 저축은 줄은 거다. 안 봐도 아는 거다. 안보고 알게 되므로 효율이 증가된다. 이 효율이야말로 인류가 세상을 움직여가는 근본으로 삼을만한 것이다. 갑과 을은 시소를 타고 있다. 갑이 오르면 을은 내리고 을이 오르면 갑은 내린다. 시소의 한쪽이 올랐을 때 다른쪽을 내리는 절차는 다섯이다. 그것은 원인, 작용, 제어, 반작용, 결과다. 구조론은 원인과 결과 2항으로 접근하던 것을 5항으로 세분화 한 것이다. 5로 끝난다. 6이나 7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마이너스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것이다. 5에서 시작해서 4,3,2를 거쳐 1로 끝나고 그 다음은 0이므로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한 배를 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포지션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그 중 하나가 포지션을 바꾸었을 때 다른 하나의 입장이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주사위는 아무리 던져도 6눈 중에 하나가 나온다. 7 이상의 숫자가 나오는 일은 없다. 처음부터 풀세트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모두 갖추어진 상태에서 하나씩 제거하는 소거법을 쓴다. 그 소거의 진행단계에 따른 상대방의 입장변화를 보는 것이다. 바둑판은 361로가 완성되어 있다. 한 수를 둘 때마다 둘 자리가 없어진다. 언젠가는 바둑판이 빼꼭히 메워지고 만다. 더 이상 둘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거기서 바둑은 끝난다. 하나의 사건이 똑부러지게 완결되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그것이 구조의 세계다. 숫자는 0에서 시작하여 1,2,3,4,로 무한히 증가하므로 더 파헤치면 뭔가 자꾸 나올 것 같지만 구조의 세계는 곧 0에 도달하여 똑부러지게 완결된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어떻게 되는 지는 다섯걸음 안에서 결판이 나고야 만다. 세상의 근본은 수학이다. 이건 누구나 당연히 인정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수학은 더하고 빼는 숫자의 세계, 집합론의 세계를 탐구하였을 뿐 얽히는 세계, 포지션의 세계를 탐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수학은 반쪽 수학이다. 구조론이 그 수학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완성한다. 집합론과 구조론이 합쳐질 때 수학은 완전해진다. 구조론은 수학이다. 그러나 수학을 뛰어넘은 수학 이상의 새로운 수학이다. 수학이 여태 탐구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얽힘의 세계를 탐구한다. 세상은 어떻게 늘었나? 집합으로 늘었다. 세상은 어떻게 얽혔나? 구조로 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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