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씀이 첫 번째일까?
말씀 이전에 ‘뜻’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뜻 없이는
말씀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뜻을 실어서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태초에 ‘완전’이 있었다.
뜻 그 자체로는 완전한 까닭이다.
말씀이라는 운반수단에 의존하면서
모든 불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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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의 뜻을 빌어 완전이 있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이브처럼 그때 우리는 완전하였다.
이상의 높은 고지로부터 비추인
그 완전의 빛이 우리들 개개인의 가슴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실현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말씀으로 실어 전한 뜻을
비로소 인간이 재현해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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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완전이
그 어떤 시간과 장소에 붙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어디에서도 완전을 찾을 수 없다.
‘어디’ 혹은 ‘언제’ 찾으려 하는 한 찾을 수 없다.
완전은 다만 소통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대와 내가 소통할 때 그 소통된 정도 만큼만 완전하다.
또 우리가 소통에 실패할 때
그 소통에 실패한 정도 만큼은 불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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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한 남자가
소통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결혼이 목적이라면
만남에서 결혼까지 걸리는 시간은?
3개월? 6개월? 혹은 1년?
우선 만남에 이르는 과정 조차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가 목적의 전부라면
더 쉽게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소통하려 하지만
우리의 소통은 얕고 얇은 범위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 상스러움을 넘어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더 깊고 더 밀도있는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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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부를 들어
당신의 전부와 만날 때 우리의 소통은 완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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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은 한 마리 나비를 유인하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완전할 수 있다.
한 마리 나비는 그 꽃에 꽃가루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완전할 수 있다.
그 방법으로 꽃과 나비는 소통한 것이며 그 순간 꽃과 나비는 완전해졌다.
그러나 우리의 소통은 늘 어제의 표절이거나 내일의 예고편이다.
그것은 복제된 것이고 짜깁기 된 것이며
그것은 습관이고 타성이고 진부한 것이다.
그런 식이어서는 불완전하다.
먼저 개인이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무리’로부터 독립하여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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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은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그것은 기승전결의 완전, 3막 5장의 완전, 그리고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완전이다.
프레이즈를 시작할 때 작게 시작하지만, 그 프레이즈 전체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부분은 전체와 공명할 때 완전하다.
신의 몫이 ‘제시’라면, 자연의 몫이 ‘전개’가 되고 인간의 몫은 ‘재현’하는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의 뜻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작은 한 부분이 신의 설계한 바 우주 전체의 기운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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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은 미학은 근본적인 주제이다.
여기서 완전은 소통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글자는 힘들여 한 명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예술은 100만명에게 바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글자는 부분을 이야기 하지만 예술은 전체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전달하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1세기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가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교는 적어도 전체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고 한다.
설사 그것이 틀린 내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많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다.
잘 모른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포기해 버린다.
그런 식이어서는 진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포기한 소통을 위하여,
종교가 실패하고 있는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예술이 필요하고, 미학이 필요한 것이며
그 예술을, 그 미학을 내 안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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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만나야 하고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게시판으로도 만나야 하지만
이상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진정 만나야 한다.
눈으로만 만나지 말고 혼으로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 만남이 진정 술맛이 나는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신 앞에서의 동행자로 만나야 한다.
땀냄새를 공유하는 만남,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만남
영혼의 빛을 공유하는 만남이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친구로 만나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씀이 첫 번째일까?
말씀 이전에 ‘뜻’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뜻 없이는
말씀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뜻을 실어서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태초에 ‘완전’이 있었다.
뜻 그 자체로는 완전한 까닭이다.
말씀이라는 운반수단에 의존하면서
모든 불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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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의 뜻을 빌어 완전이 있었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이브처럼 그때 우리는 완전하였다.
이상의 높은 고지로부터 비추인
그 완전의 빛이 우리들 개개인의 가슴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실현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신의 말씀으로 실어 전한 뜻을
비로소 인간이 재현해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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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완전이
그 어떤 시간과 장소에 붙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 어디에서도 완전을 찾을 수 없다.
‘어디’ 혹은 ‘언제’ 찾으려 하는 한 찾을 수 없다.
완전은 다만 소통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대와 내가 소통할 때 그 소통된 정도 만큼만 완전하다.
또 우리가 소통에 실패할 때
그 소통에 실패한 정도 만큼은 불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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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한 남자가
소통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결혼이 목적이라면
만남에서 결혼까지 걸리는 시간은?
3개월? 6개월? 혹은 1년?
우선 만남에 이르는 과정 조차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가 목적의 전부라면
더 쉽게 소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소통하려 하지만
우리의 소통은 얕고 얇은 범위에서 가능할 뿐이다.
그 상스러움을 넘어 성스러움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더 깊고 더 밀도있는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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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부를 들어
당신의 전부와 만날 때 우리의 소통은 완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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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은 한 마리 나비를 유인하기에 성공하는 것으로 완전할 수 있다.
한 마리 나비는 그 꽃에 꽃가루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완전할 수 있다.
그 방법으로 꽃과 나비는 소통한 것이며 그 순간 꽃과 나비는 완전해졌다.
그러나 우리의 소통은 늘 어제의 표절이거나 내일의 예고편이다.
그것은 복제된 것이고 짜깁기 된 것이며
그것은 습관이고 타성이고 진부한 것이다.
그런 식이어서는 불완전하다.
먼저 개인이 완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무리’로부터 독립하여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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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은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그것은 기승전결의 완전, 3막 5장의 완전, 그리고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완전이다.
프레이즈를 시작할 때 작게 시작하지만, 그 프레이즈 전체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것처럼 부분은 전체와 공명할 때 완전하다.
신의 몫이 ‘제시’라면, 자연의 몫이 ‘전개’가 되고 인간의 몫은 ‘재현’하는 것이다. 부분으로 전체의 뜻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작은 한 부분이 신의 설계한 바 우주 전체의 기운을 담아내는 방법으로 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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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은 미학은 근본적인 주제이다.
여기서 완전은 소통의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글자는 힘들여 한 명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예술은 100만명에게 바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글자는 부분을 이야기 하지만 예술은 전체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전달하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1세기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가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교는 적어도 전체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려고 한다.
설사 그것이 틀린 내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과학은 많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다.
잘 모른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포기해 버린다.
그런 식이어서는 진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포기한 소통을 위하여,
종교가 실패하고 있는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예술이 필요하고, 미학이 필요한 것이며
그 예술을, 그 미학을 내 안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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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만나야 하고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게시판으로도 만나야 하지만
이상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진정 만나야 한다.
눈으로만 만나지 말고 혼으로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 만남이 진정 술맛이 나는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신 앞에서의 동행자로 만나야 한다.
땀냄새를 공유하는 만남, 삶의 의미를 공유하는 만남
영혼의 빛을 공유하는 만남이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친구로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