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검찰이 압수해간 X파일이라도 공개되었다는 말인가? 왁자지껄 하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세상은 얌전하더라. 기대했던 신통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라.
해는 늘 그렇듯이 뜨던 동쪽에서 떴고 사람들은 평시와 다름없이 길을 가거나 대화를 하거나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문제의 그들은 방송 시청자로 불리는 일군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는 익명의 존재들 말이다. 그들은 평소처럼 방송국이 주면 주는대로 얌전하게 받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아하 내게도 권리가 있구나’ 하고 퍼뜩 깨달은 것이다.
방송국이 내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면 나 또한 방송국에 항의할 권리가 있는 거로구나 하고 드디어 뭔가를 눈치 챈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들에겐 만만한게 방송국이다.
100년 전에는 키우는 강아지의 죽음은 슬퍼할줄 알면서도 나라가 망해도 눈도 꿈쩍 않던 사람들. 50년 전에는 독재가 행패를 부려도 남의 일로 알던 그 사람들. 10년 전에는 정치가 모략을 해도 관심이 없던 그 사람들이 돌연 뭔가를 깨닫고 만만한 공격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모기에 물렸네. 발뒤꿈치가 가렵네 하고 일제히 항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웃기는 짜장이 아닌가? 묻노니 당신네들은 왜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그래봤자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그 인디 밴드들이 더 만만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만만한 누군가를 수하에 거느리고 있다. 자신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하나씩 예비해 두고 있는 것이다.
방송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무더위 탓이다. 신(神)이 이 더운 여름을 배려한 까닭은 그깟 일에 무슨 피해 씩이나 입었다면서, 고만 일로 ‘권리’씩이나 자각을 하는 잘난 인간들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슨 용도란 말인가?
어쨌든 TV를 보지 않고 살기로 한 것은 내가 한 몇 안되는 결정들 중에 잘한 선택들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TV 안보면 되지 거 되게 말 많네. 인간들!
그 군상들이 그 따위 일로 느끼는 피해의식의 100분의 1이라도 제대로 된 진지함을 가지고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려는 노력들을 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소이다.
인간들이 사소한 일에 터무니없이 분개하는 까닭은 사회의 더 중요한 일에 개입하지 않기 위한 심리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이천만명이 에이즈로 죽어가도, 이라크에서 매일 몇 십명이 죽어가도 그것이 나의 일은 아니라는 심리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에 억압적인 질서가 존재해야 하고 그 질서 덕분에 세상의 많은 일들이 나의 작은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두려워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어쩌면 나의 작은 참여로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진실이 확인될까봐. 그래서 방송사고 따위 작은 무질서에 크게 분개하는 것이다. 세상은 권위적인 질서에 의해 지탱되고 있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자신의 틀린 확신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