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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760 vote 0 2005.03.25 (23:51:25)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친 것이 언제적 일인가? 돌이켜 보면 불과 1백여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2500년 전에 이미 고타마 싯다르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공자는 ‘조문도 석사가의’를 말했으며, 1200년 전에 임제 의현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죽이라’고 말했다.

무엇인가? 분위기에 휩쓸리는 나약한 군중이 되어 보불전쟁의 승리에 열광하는 독일인들의 못난 모습이 니체를 절망하게 했던 것이다. 근대주의의 충격파에 대한 니체의 절망이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아포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니체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놓은 누이 엘리자벳이다. 그는 오빠 니체를 오해한 나머지 잘못 선전하여 니체의 초인을 전쟁광 히틀러로 왜곡해 놓았다. 이 문제를 단지 엘리자벳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려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애초부터 니체가 잘못 해석될 소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두 얼굴을 가진 괴물 근대주의 그 자체의 양면성이다.

요는 근대주의다. 그것은 그 시대 문명 그 자체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합리적인 질서와 이성을 의미하는 아폴론적인 요소와 감성과 열정을 강조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이 있다. 근대주의는 아폴론적인 요소 곧 질서와 획일의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 부분에서 포드 시스템의 막강한 효율성이 얻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는 나약한 개인으로 나타났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이 연기하여 보여주는 그 막강한 기계라는 괴물 앞에서 주눅든 나약한 인간상 말이다.

기계의 위력에 기가 죽은 나약한 개인들, 그 겁쟁이들이 두려움에 가득차서 그 인간의 내부에 숨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엉뚱한 데다 표출한 결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며 비스마르크 시대를 살았던 겁쟁이 독일인들은 그 전쟁에 광분하여 날뛰었던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인간은 강해져야 한다고. 겁먹지 말아야 한다고. 기 죽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나 독일인들은 오해했다. 강한 히틀러 뒤에 줄서야 한다고.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 그렇게 강하지 못했던, 겉으로 강한 척 우쭐대기 좋아하는 마초에 지나지 않는, 어쩌면 나약한 지식인에 불과할 수도 있는 니체 자신의 잘못일 수도 있고 오빠를 잘못 이해한 누이의 잘못일 수도 있고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문명의 한계일 수도 있다.

요는 니체의 초인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결론은 ‘강한 개인’이다. 이리 저리 휩쓸려 다니는 나약한 군중이 아닌, 인격적으로 단련된 강한 개인 말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니체 보다 니체를 잘 해석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봉건에서 근대로의 이행이다. 농노에서 시민으로의 상승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적으로 해방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여 니체는 말하였다. 신은 죽었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달마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베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독일의 나약한 군중들은 자기 스스로 강해져서 초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고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나는 초인을 찾아 그 앞에 엎드려 복종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자발적 노예로 봉사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19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독일에서의 일이다.

평화의 모습과 전쟁의 모습
이슬람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러나 때로는 전쟁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마호멧은 그 자신 전사(戰士)이기도 했다. 그의 목적은 전쟁을 종결시키는데 있었으나 그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전쟁에 준하는 극단적인 위기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코란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회교 특유의 철저한 일신교이다. 카톨릭이라면 다르다.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면서 열심히 십자가상을 조각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유일신이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외에 나사렛 사람 예수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별도로 성모 마리아를 섬기기도 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회교는 철저하다. 왜일까?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 한 것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의견의 통일이 필요하다. 일신교로 해결한다. 그들은 평화를 주장하지만 그 평화를 위해서 쉽게 목숨을 걸어버린 것이 도리어 전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해방의 종교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유태인들을 해방시켰다. 문제는 해방의 방법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강혁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초인 모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세를 찾아가서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해방을 원했지만 반드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해방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노예를 감수하기도 했던 것이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이 그 평화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전쟁을 촉발하는가 하면, 해방의 종교인 기독교가 그 해방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자발적 노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슬람은 실제로 평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술탄의 압제 아래 전쟁없이 평화로왔다. 실제로 이슬람교도들은 평화롭다. 그들은 모든 갈등을 ‘인tif라’ 한마디로 해결해 버린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 ‘신의 뜻을 따를래 아니면 신의 벌을 받을래?’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신은 최후의 해결사이어야 한다. 다른 모든 방법으로 해결이 안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신의 개입이 요청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신을 개입시켜 버렸다. 최후의 중재자여야 하는 신이 이미 개입해 버렸다면? 그 다음에는 중재할 방법이 없다. 상대방의 제안을 승낙하든가 아니면 전쟁을 하든가 뿐이다.

동양정신의 본질은 인격적 상승
동양정신의 본질은 깨달음에 닿아있다. 유교, 불교, 도교를 막론하고 그러하다. 깨달음은 인격적인 상승을 의미한다. 인간이 보다 고상한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우르르 몰려 다니는 나약한 군중이 되지 말고 강한 개인이 되자는 것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질서의 억압을 거부하고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노자의 역설과 다르지 않고 선종의 평정심과도 다르지 않다. 선종은 본래 도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도교는 유교가 주장하는 아폴론적인 질서에 반대하며 디오니소스 적인 열정으로 저항하고 있다.

아폴론과 다오니소스의 차이는? 집단의 질서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와 개인의 자유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의 차이다. 혁명의 세기라 할 20세기가 집단의 질서가 가진 에너지를 집약하여 보인 세기였다면, 정보화의 세기인 21세기는 개인의 자유가 가진 에너지를 강조하는 세기가 된다.

무엇인가? 보불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인들의 한심한 모습에서 근대의 절망을 목격하였던 니체가 100년 전에 주장하고 있는 가치들이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일부 실현되었던 가치인 것이다.

근대주의가 아폴론적인 집단의 질서를 강조한 결과 인간이 일률에 통제되게 되었고 그러한 단순함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 양차 세계대전이 촉발된 것이다. 실존주의의 등장은 20세기의 그러한 모습들에 대한 환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탈근대바람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기로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겁쟁이들을 경멸하였지만 그 자신 겁쟁이였던 니체. 그것은 전쟁을 막으려는 것이 지나쳐서 전쟁을 촉발하는 이슬람의 모습과 같고 해방을 강조하기가 지나쳐 자기네를 해방시켜줄 모세를 찾아 스스로 노예되기를 자처하는 일부 기독교의 모습과도 같다.

무엇인가? 그것은 퇴행이다. 동양정신의 본질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의미는 인격적 상승에 있으며 그것은 나약한 군중이 아니라 강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실존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소극적 저항에 불과하다.

그들은 냉소한다. 그들은 비웃는다. 그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겨우 뒤에서 패러디나 하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앞장 서서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틀렸다. 주류 질서에 대한 딴지걸기, B급문화에 대한 예찬.. 이런 따위도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으나 죽림칠현의 은둔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식인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살롱에 모여 앉아 술이나 마시며, 뒤에서 불평할 수 있을 지언정 앞에서 주도하여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무엇인가? 잘못 가는 탈근대바람은 중앙정치를 냉소하며 은둔하였던 위진시대의 죽림칠현과 판밖이로 같다. 하는 짓이 같다. 그들의 소극적 저항은 문예의 유행으로나 의미있을 뿐이다.

그것은 고금소총류 야담집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일찍이 대원군 시대에도 정수동과 정만서 그리고 방학중이 있었다. 정수동이 진중권이라면 정만서가 김규항이 되고 방학중이 임지현이라면 김삿갓은 문부식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노회찬 봉이 김선달이 있고 손호철 최칠칠과 박노자 장승업이 한 아웃사이더씩은 한다마는 가치없다.

지리멸렬주의 혹은 지엽말단주의, 또는 신변잡기주의에 휩쓸려서 안된다. 구색맞추기로 흘러서 안된다.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의 주변에서 장식품 노릇이나 한대서야 될일인가? 다시 거대담론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승부는 물적 토대가 되는 본질의 영역에서 나는 것이다.

사찰 외벽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라면 다들 한번씩은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원래 도교의 팔우도에서 나왔지만 불교에서 둘이 추가되어 십우도로 최종결론을 보았다. 무엇인가? 도교의 저항은 진중권, 김규항의 똥침놓기 위주 소극적 저항이었던 것이다. 다시 민중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둘을 추가한 것이 아홉째의 반본환원과 열 번째의 입전수수다.

● 반본환원(返本還源)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기다. 이는 죽림의 은자가 다시 거대담론의 도회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 입전수수(入廛垂手) 큰 포대를 매고 다시 거리에 나선다.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변방의 아웃사이더로 자족하지 않고 기어이 주류질서의 전복을 성공시킨다는 의미다.

주류를 치지 못하는 비주류, 주류질서 전복의 야망을 포기한 아웃사이더는 추한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역겨운 것이다- 비주류 안에서 작은 주류가 되려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은 평생 마이너리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강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관념 좌파의 문제는 다만 집단을 비판하는데 성공할 뿐 개인을 긍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B급문화에 대한 관심 따위는 소박한 까불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당찬 싸움걸기가 아니다. 틈새시장의 발굴에 불과하다.

그대 안의 달마를 베라
이슬람교는 평화에 방점을 찍지만 언제든지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다. 기독교는 해방에 방점을 찍지만 자발적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동양정신의 본령은 나약한 군중의 모습에서 벗어나 강한 개인으로 상승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지만 도교의 청담(淸談)으로 퇴행할 위험이 있다.

양자는 긴장관계에 있다. 이슬람교의 평화와 전쟁의 이중성, 기독교의 해방과 노예의 이중성, 그리고 동양정신에서 보여지는 상승과 퇴행의 이중성이 동전의 양면으로 있는 것이다. 비스마르크 시대에 근대의 위험을 경고했던 니체가 거꾸로 히틀러에 의해 최악의 모습을 한 근대에 이용되었듯이 말이다.

무엇인가? 집단의 질서가 가지는 아폴론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가 가지는 디오니소스의 가치다. 역사의 위대한 진보는 이 양자간의 건강한 긴장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이들은 서로 조화되어야 하고 깨어있는 인간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아폴론의 질서와 디오니소스의 변화는 변증법적으로 종합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잘 짜여진 질서 속에서의 유연한 변화 혹은 변화의 부드러움이 갖추어 있는 내밀한 질서 말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개인의 인격적 상승이 지향해야 할 목표다. 곧 동기부여가 필요한 것이며 인격적으로 상승한 인간이 그 동기를 잃을 때 도리어 관념좌파의 주변인으로 퇴행하곤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기를 가진, 목표 있는 디오니소스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관념좌파들이 말하는 탈근대는 죽림칠현의 은둔, 목표를 잃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도회의 스트레스가 무서워 시골로 도망한, 패거리들이 살롱에 모여 시시덕거리며 저잘난 척 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본환원 다음에 입전수수라 했다. 과감히 거리로 나와서 대중을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강한 개인이다. 문제는 근대다. 산업화인 것이다. 포드 시스템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의 모습이다. 박정희의 망령 말이다. 산업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보화이다. 정보화는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모세는 필요하지 않다. 강한 지도자를 찾아 무릎 꿇고 복종을 맹세할 일은 없어졌다. 더는 미디어가 한 명에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란 결국 산업화가 만들어낸 것이며 그것은 한명의 스타가 미디어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모습이다. 21세기란 무엇인가? 정보화의 쌍방향상이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21세기에는 모두가 스타이다. 노무현 만이 스타가 아니고 유시민 만이 스타가 아니다. 피투성이님도 스타이고 윤카피님도 스타이고 이 공간의 모두가 스타이다. 우리의 행진을 지켜보는 관념좌파들은 아마도 겁이 날 것이다. 그들은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유시민이 히틀러다 하고 외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부에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훈련된 다수가 독립적으로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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