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그동안 비판해온 소인배의 권력행동, 괴력난신, 음모론, 스노비즘, 감성팔이, 신파, 진정성 팔이, 말장난과 이름장난, 카메라 장난을 한 방에 정리할 수 있는 단어를 발견했다. 공감이다. 의외로 나무위키에는 공감의 오남용에 대한 비판이 긍정적인 기술보다 많다. 공감은 좋은 말인데? 공감이 폭력을 부른다고? KGB 고문기술자는 인성이 좋고 공감능력이 우수한 사람만 뽑는다고? 그럼 빌어먹을 푸틴도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네? 그럼 핵전쟁은 없다는 말인가? 긍정과 비판이 균형을 맞춰야 맞지 나무위키는 편향되어 있다. 나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이 ‘나도 그런데 너도 그러니?’ 하면 ‘나는 안 그런데?’ 할 때가 많다. 극장에서 코미디를 봐도 나 혼자 웃을 때가 많다. 사람들이 깔깔거릴 때는 시큰둥하다. 거기에 미묘한 불일치가 있다. 나는 신파를 특히 싫어한다. 눈물이 나서 영화를 볼 수 없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전개지만 교묘한 이미지 편집과 목소리 기교로 억지 눈물을 강요한다. 기계로 눈물을 짜내는게 일종의 폭력이다. 과거 홍사덕의 목소리 기교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바이브레이션으로 노인들을 울리는 거다. 나는 거기서 공포를 느꼈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사람을 울리고 웃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나오지만 사람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독살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기술자는 처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왕도 죽었지만. 영화 ‘집으로’를 보고 하도 당해서 ‘워낭소리’를 아직 못 보고 있다. 공감은 안 되는데 눈물은 흐르니 괴롭다. 실컷 울어서 만족한다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황정민이 두렵다. 영화 곡성 솔직히 그렇잖아. 연방 살을 날려대니 아프잖아. 쿠니무라 준까지 점입가경, 몸은 무의식으로 반응하는데 머리로는 거부한다. 그 이성과 감성의 불일치가 싫다. 웃음과 눈물과 애로와 공포와 액션을 5분 간격으로 배치해놓고 공장을 돌리는 헐리우드가 역겹다. 사람을 갖고 놀잖아.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쳐서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공포스럽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은 안 간다. 강릉 꼬막집은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얼어서 해동이 덜 된 것을 주더라. 그래도 맛은 있더라만 사람에 부대끼기 싫다. 나는 조선족 혐오나 지역색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나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사람이 몰려다니는 그 자체가 공포스럽다. 이태원에 사람이 몰렸을 때 공포를 느끼지 않았나? 환빠도 그렇고 사이비 종교도 그렇다. 유치한 개소리로 수십만 명을 모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다. 신천지 하는 짓 보라. 대구에 10만 신도를 모아서 김일성이 능라도경기장에서 메스게임 하듯이 세과시를 한다. 저게 앙골모아 대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공감하기 좋아하면서 너무 가벼운 공감에 공포를 느끼는 나의 의견에는 왜 공감하지 않는가? 인간들 그냥 개소리만 해주면 환장하잖아. 무섭지 않나. 진정성 하나, 성찰 하나만 먹이로 투척하면 강아지처럼 학학거린다. 의미는 없고 어감만 있는 허어다. 어감 하나만 가지고 5천만 국민을 공깃돌처럼 갖고 놀 수 있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나는 바보다. 너도 바보지. 우리 다 같이 함께 바보 되어 낄낄거리니 얼마나 좋냐. 이러고 폭주다. 히피소동도 그렇다. 마약 먹고 붙어먹고 무섭지 않나? 처음에는 다들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 히피도 처음 대학교수와 지식인이 주동한 것이다. 오늘 뉴스 보니까 부인에게 스와핑을 권하다가 이혼소송 당한 남자가 하는 말이 스와핑은 원래 점잖은 귀족들의 수준 높은 친목행사라는 것이다. 점점 마이너스가 되어 개판이 된다. 사람에게 비이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기술을 거는 일체의 행동에 나는 대항한다. 영향력은 좋다. 사랑은 좋다. 그러나 그게 무기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수의 사랑은 로마의 폭정에 대항하는 민중의 무기였지만 그것이 신천지 손에 들어가서 악마가 되었다. 공감의 달인들이 사람을 이지메하고 왕따를 주도하고 가스라이팅을 한다. 그들은 사람의 약점을 알고 급소를 공략한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복제하는 능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무기가 된다. 감성은 읽으면서 이성은 읽지 못하니 위험은 그 불균형에 있다. 함부로 무리 짓지 말자. 무리 지으면 인간은 뒷전으로 밀리고 어느 순간부터 집단의 관성력이 주인이 된다. 사람은 핸들을 놓치고 속도가 핸들이 된다. 쪽수가 사람을 삼킨다. 비대해진 중국처럼 방향전환을 못한다. 구조론은 무리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 차라리 다행인가? 히틀러와 괴벨스는 공감의 달인이었다. 히틀러는 목소리로 괴벨스는 이미지로 사람을 갖고 놀았다. 독일 국민들이 모두 공감했다. 공감이 소인배 손에 들어가면 흉기가 된다. 나는 공감을 못 한다기보다는 골똘히 생각하며 집중해 있는데 옆에서 방해한다는 느낌이다. |
공감과 공감 코스프레를 구분해야 합니다.
나무위키는 잡다한 것을 모아놓아
재미는 있는데 개소리를 많이 합니다.
위키피디아는 인용해도 공신력을 보장받는 반면,
나무위키는 너무 개소리가 많아 인용하면 쪽팔림이 돌아오고 불신력이 보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