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823 vote 0 2022.11.29 (20:02:35)

    누군들 욕심내지 않겠는가? 산을 쳐다봤다면 곧 정상을 밟아봐야 한다. 강을 봤다면 곧 바다에 이르러야 한다. 갈 데까지 가봐야 한다. 우리가 사유의 정상을 욕심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간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탈레스의 물 일원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런 모색 끝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석가의 연기법, 노자의 이유극강, 장자의 혼돈이 그러한 모색의 일환이다. 수학의 토대가 되는 인과율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짜라투스트라와 아케나톤의 일신론을 높이 평가한다. 짜라투스트라의 생각은 이원론적 일신론이다. 절대자 아후라마즈다 뒤에 대적자 앙그라 마이뉴가 따라붙는다.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연상하게 한다.


    인간들은 둘씩 짝지어 대립시키기 좋아한다. 물질과 영혼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물질은 그렇다 치고 영혼은 또 무슨 개뼉다귀란 말인가? 사람들은 왜 영혼이라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맹랑한 말에 매료되었을까?


    물질은 딱딱하고 영혼은 부드럽다. 딱딱한 것은 뭔가 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딱 봐도 아니잖아. 노자의 이유극강이든 플라톤의 이데아든 장자의 혼돈이든 부드러운 것이다. 즉 변화를 의미한다. 주역의 역도 변화를 의미한다.


    현실은 답답하고 변화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칼처럼 딱딱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에 매료된다. 둘의 절충을 시도한다. 딱딱한 물질과 부드러운 영혼 중에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딱딱한 것 - 원자론, 일신론, 물질, 일원론

    부드러운 것 - 물 일원론, 이데아론, 영혼, 연기법, 이유극강, 역, 혼돈, 인과율, 이원론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답은 딱딱한 것이다. 돌이든 쇠붙이든 이빨이든 딱딱한 것이 연장이 된다. 하드웨어가 답이다. 동시에 알게 된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부드러운 것이 없으면 딱딱한 것은 소용이 없다.


    인간들은 뭐든 대립시킨다. 대립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대립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대립이 모든 대립으로 복제된다. 선과 악의 대립, 명과 암의 대립, 진보와 보수의 대립, 남과 여의 대립, 노와 소의 대립, 인간과 동물의 대립, 동양과 서양의 대립, 문명과 야만의 대립, 물질과 영혼의 대립.


    인간의 이항대립은 끝이 없다.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복제된 것이다. 계속 복제된다. 복제된 것은 그림자다. 한낱 그림자 따위에 낚여서 파닥대는 인간 군상이라니. 어찌 비참하지 않다는 말인가?


    상호작용 한마디로 해결볼 것을 이항대립 두 단어를 쓰므로 멱살잡이 싸움이 일어난다. 언어가 문제다. 인간들의 투박한 언어를 족쳐야 한다. 인간들이 말을 헷갈리게 해서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말을 똑소리 나게 잘해서 평화를 가져오도록 하자.


    단서를 찾아야 한다. 단서는 첫 단추를 꿰는 것이다. 우리는 이항대립을 만들어놓고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상호작용으로 본다면 대립 그 자체가 단서다. 물질과 영혼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불가분의 존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정은 안정이 될 수 있지만 안정은 불안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벼락같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변화는 언제든 불변이 될 수 있지만 불변은 절대로 변화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 법칙을 알아야 한다.


    실타래를 헝클어 놓은 고양이가 있다. 범인은 반드시 있다. 언제나 애를 먹이는 놈이 있는 법이다.


    모든 대립은 복제된 것이며 그것은 근원의 불안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너머는 모른다. 인간의 지적 도전이 허용되는 한계는 거기까지다. 선을 딱 긋고 구획을 딱 나누고 칸을 딱 자른다. 마음의 빈 페이지에 하얀 백지가 준비되면 게임은 시작된다.


    태초에 불안정이 있었다. 불안정했으므로 그것은 움직인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교착되고, 교착되면 안정되고, 안정되면 그것이 우리가 아는 물질이다.


    모든 페이지는 짝수이고 짝수 사이에는 홀수가 있다. 그것이 실타래를 헝클어놓는 심술궂은 고양이의 발톱이다.


    우주는 2로 시작하여 1로 완성된다. 2는 상호작용이고 1은 존재다. 우리는 존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곤 하지만 그것은 단계를 건너뛴 것이다. 생략한 전제가 있다. 이야기가 중간에 막히는 이유다.


    실재론과 유명론이다. 실재론이 옳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유명론에 홀렸을까? 실재론이 물질이면 유명론은 영혼이다. 왜 인간은 그런 뻔한 개소리에 홀렸을까? 물질은 뭔가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답답하잖아. 컴퓨터를 샀는데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매우 답답하다. 지금 인간이 그 상태다.


    철학의 역사 3천 년간 인간들의 논의는 여기서 맴돈다. 당연히 실재론이 이겨야 하는데 양자역학은 유명론을 닮아 있다.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면? 초끈이론은 유명론에 가깝다.


    보통은 존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소설을 쓰더라도 등장인물 소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집을 짓더라도 건축자재의 공급으로 시작된다. 과연 그럴까? 그전에 만남이 먼저가 아닐까? 등장인물이 있고 건축자재가 있다면 진도를 한참 뺀 것이다. 백지도 없고 연필도 없는데 무슨 등장인물? 대지도 없고 설계도가 없는데 건축자재는 무슨 소용이지? 말이 안 된다.


    존재는 말이 안 된다. 홀수가 찢어져서 짝수가 된게 아니고 짝수가 만나서 홀수가 된다. 만남이 먼저다. 앞면과 뒷면이 만나서 종이 한 장이 탄생한다. 내가 그 종이를 봤기 때문에 앞면이 있는 것이고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다. 내가 그 종이를 면회하기 전에는 그것은 한낱 셀룰로스가 다져진 펄프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다.


    실재에 집착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왜 보어 따위에게 밀렸을까? 실재론이 옳기 때문에 실재론에 매달린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실재는 실재하는가? 만남이 실재라면? 상호작용이 존재라면?


    우리가 존재라고 믿는 것은 관측자와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내가 그것을 봤다. 그것이 있다.' 이렇게 가는 것이다. 존재는 주체인 인간과 대립된 객체로서의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를 전제하고 그다음에 '고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가 있고 사건이 그다음에 일어난다고 믿지만 천만에. 존재는 만남이고, 만나면 사건이고, 존재한다는 사실은 곧 사건이 일어났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에 성질이 침투해 있다고 믿지만 거짓이다. 물질은 없고 성질이 있다. 성질이 꼬이면 그것이 존재다.


    존재가 어떤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변화하는게 아니고 변화가 꼬이면 존재된다. 변화가 먼저고 일정한 조건에서 안정된다. 안정되면 나란하고 관측자와 나란하면 존재다. 등장인물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지나야 등장한다.


    왜 장자는 혼돈을 떠올렸을까? 왜 노자는 무른 것을 강조했을까? 왜 인간들은 영혼에 집착할까? 왜 플라톤은 이데아를 상상했을까? 딱딱한 것은 안정이고 부드러운 것은 변화다. 딱딱한 것은 답답하다. 하드웨어는 답답하다. 소프트웨어는 말랑하다. 말랑한 소프트웨어가 내 손에 쥐어졌다면 하드웨어는 남의 것을 빌려 써도 된다.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다. 경찰과 범인은 소프트웨어에 집착한다. 숨긴 소프트웨어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이것이 우주의 근본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꼬인게 악착같이 사유를 밀어붙여 해결보지 못하고 도피한다는 것이 온갖 이항대립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차별과 모든 억압과 모든 마찰과 모든 불화가 거기서 비롯되었다.


    물질이 성질을 가진게 아니고 성질이 꼬이면 물질한다. 물질은 액션이다. 정靜이 아니라 동動이다. 내부에 2를 감춘 1이다. 2쪽을 감춘 한 장이다. 변화를 감춘 안정이다. 상호작용이다. 그것을 때려서 속을 펼쳐내면 사건이다. 유를 감춘 강이다. 내부에 소프트웨어를 감춘 하드웨어다. 내부에서 엔진이 돌아가는 자동차다. 그것이 존재의 진짜 모습이다.


  모든 것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남은 둘의 만남이지만 하나의 사건이다. 이항대립은 서로를 배척한다. 뭔가 이건 아니지 하는 느낌이 든다. 짜라투스트라에서 율곡에 헤겔까지 아는 사람들은 둘의 공존을 추구해 왔다. 그것은 무엇일까? 대립은 맞섬이다. 맞섬을 뒤집으면 만남이다. 정상에는 만남이 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 정상에서 만나자 김동렬 2022-11-29 4823
6109 벤투축구의 수수께끼 김동렬 2022-11-29 3108
6108 민주당에 반미환빠 똥들이 있다 3 김동렬 2022-11-28 4594
6107 물리적 실재 김동렬 2022-11-27 2687
6106 축구와 구조론 김동렬 2022-11-27 2881
6105 생각을 하자 image 1 김동렬 2022-11-26 2698
6104 수학과 구조론 2 김동렬 2022-11-25 2999
6103 유통기한 소비기한 김동렬 2022-11-23 2963
6102 외계인은 없다 김동렬 2022-11-22 3150
6101 총정리 김동렬 2022-11-21 3017
6100 데카르트의 실패 김동렬 2022-11-21 2890
6099 생각을 하자 2 1 김동렬 2022-11-20 2871
6098 결정론과 확률론 3 김동렬 2022-11-20 3081
6097 케빈 카터의 죽음과 빈곤 포르노 김동렬 2022-11-19 2677
6096 생각을 하자 김동렬 2022-11-16 3267
6095 생각의 단서 김동렬 2022-11-15 3154
6094 김용옥과 백남준의 수준 차이 김동렬 2022-11-14 3901
6093 삼단사고 2 김동렬 2022-11-14 3110
6092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권성동 2 김동렬 2022-11-12 5202
6091 양평 상원사 동종 image 1 김동렬 2022-11-12 3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