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대칭이다.
이쪽을 보고 저쪽을 안다.
원인을 보고 결과를 안다.
자극을 보고 반응을 안다.
시작을 보고 종결을 안다.
머리를 보고 꼬리를 안다.
대칭이 있으므로 비대칭도 있다.
내부에서 비대칭이라도 외부와는 대칭이다.
대칭은 절대성이요 비대칭은 상대성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절대성에 지배된다.
다만 계를 닫고 내부사정만 추적하기로 제한을 걸면 상대성이다.
대칭은 내부의 A와 B 사이에 성립한다.
비대칭은 A와 B를 연결하는 하나의 라인이다.
어떤 둘이 대칭이면 둘 사이를 잇는 라인은 하나다.
1과 2가 대칭이면 둘 사이는 비대칭이다.
손가락은 다섯이고 그사이는 넷이지만 사실은 바깥에 하다가 더 있다.
외부를 포함시키면 비대칭도 대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칭된 둘 사이의 축은 비대칭이나 그 둘을 대칭시키는 라인과 대칭된다.
비대칭의 대칭을 찾는 눈을 얻어야 한다.
수평의 좌우대칭 외에 수직의 상하대칭을 찾아야 한다.
찾아야 할 에너지의 전달경로는 그곳에 있다.
가위는 두 개의 손잡이와 두 개의 날이 대칭된다.
두 개의 손잡이가 두 개의 날로 복제된다.
가운데 둘을 리벳으로 연결하는 축은 비대칭이다.
축은 가위를 사용하는 사람의 손목과 대칭된다.
두 가윗날이 만나는 접점과도 대칭된다.
손목과 축의 대칭을 축과 접점의 대칭으로 복제한다.
우리가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시야를 좁혀서 한쪽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전체를 닫아놓고 부분만 보거나
외부를 닫아놓고 내부만 보거나
원인을 닫아놓고 결과만 보거나
움직이는 것을 닫아놓고 정지한 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혀지는 이유는 관측자 자신과 대칭시키는 무의식적 습관 때문이다.
시야를 확장하면 자신과의 대칭이 끊어져서 표적을 놓칠까봐 불안해진다.
물고기 크기를 재려면 손을 놓아야 한다.
물고기를 놓칠까봐 무섭다면 낚아놓은 붕어의 크기를 잴 수 없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눈을 뜨면 보이는데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게 인간이다.
비대칭의 대칭에서 절대성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A의 변화가 B의 변화로 복제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A의 변화가 B의 변화로 복제될 때 둘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C의 변화가 가지는 일방향성을 봐야 한다.
가윗날 둘의 좌우대칭에 매몰되지 말고 손목과 축의 상하대칭에서 다시 축과 접점의 대칭으로 복제될 때 성립하는 에너지의 일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과 움직이는 것의 대칭은 일방향성을 가진다.
내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움직이게 할 수 있지만 외부에서 움직이는 것을 내부에서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없다.
닫힌계 내부에서 외부로 가는 대칭은 일방향성을 가진다.
외부에서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면 외부에서 무언가를 가져와야 한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자발성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강제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계에서 모든 변화는 안에서 밖을 향하는 일방향성을 가진다.
닫힌계 안에서 일어난 내부모순이 밖으로 표출되는 바로 그것이 변화다.
변화는 다름이고 다름은 둘이며 둘은 하나의 밖이다.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더 큰 단위의 닫힌계를 설정하고 그 내부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의 화살표 ->로 나타낼 수 있다.
정지한 것은 내부요인에 의해 움직이나 움직이는 것은 또다른 무언가를 만날 때까지 정지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은 정지해 있지만 내부요인에 의해 발사된다.
날아가는 화살은 과녁을 만날 때까지 스스로 멈추지 못한다.
우주는 무한히 많은 화살이 쌓인 것이다.
정지한 것은 내부가 있고 내부가 있으면 2가 되고 2는 자체모순에 의해 격발된다.
움직이는 것은 1이며 1은 계속 1로 존재한다.
2는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지만 1은 어떤 경우에도 원인이 될 수 없다.
자연은 언제나 2가 1을 격발한다.
움직이는 1은 또다른 1을 만날 때까지 진행한다.
우리는 이 둘의 차이를 추적하여 미래를 상당부분 예측할 수 있다.
변화는 내부모순을 외부로 밀어내므로 언제나 밖을 움직이며 계 안에서 그 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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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류는 이 하나의 지식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눠진다.
새로 도착한 버스에 먼저 타는 사람에게 이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