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과 인식론 구조론은 존재론과 인식론 및 이의 응용으로 구성된다. 존재론은 자연의 존재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다. 인식론은 인간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가다. 구조는 대칭구조다. 자연은 구조의 대칭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고 인간 역시 대칭을 통해 인식에 도달한다. 있는 것은 어떻게 스스로 있을 수 있는가? 아는 것은 어떻게 감추어진 내막을 알아내는가? 대칭을 통해 가능하다. 대칭은 둘의 대칭이다. 둘을 붙잡아 하나로 엮어내는 것이 구조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구조화된 둘의 상호작용으로는 천변만화가 가능하다. 있는 것은 외력의 작용에 대해 스스로를 지키고 반응한다. 그것은 힘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내부에 대칭을 조직하여 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외력이 작용하면 대상에게 주어지는 경우의 수는 셋이다. 통과하거나 깨지거나 반작용하거나다. 외력이 통과하면 무다. 존재가 부정된다. 깨지면 변화다. 역시 존재가 부정된다. 깨지면 더 작은 알갱이로 추적하는데 더 작은 알갱이마저 깨져버리면? 더 이상 깨지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게 원자론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 자연의 진실과 상관없다. 물질을 깨면 깨진다. ‘제발 깨지지 않는걸로 해줘.’ 이런 식으로 매달린다면 불쌍하다. 외력의 작용을 처리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존재다. 내부구조가 있어야 외력을 처리할 수 있다. 여기서 수학적 모순이다. 외력의 처리과정에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변화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반작용이 일어나는 최초지점이 특정된다. 그 지점은 작은 점이다. 거기서 시작되는 변화에 다른 부분들이 순순히 따라갈 리가 없다. 주변부가 저항하면? 깨진다. 인간은 사물의 내부에 단단한 코어를 심어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과일은 핵이 있고 인체에는 뼈가 있다. 건물은 철근이나 기둥으로 구조문제를 해결한다. 자연은 구조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내부를 둘로 나누어 대칭시키는 방법으로 50 대 50의 균형을 도출한다. 이에 반작용이 가능하다. 그 경우는 코어가 깨지지 않는다. 많은 자연물과 생물이 대칭성을 띠는 이유다. 눈의 결정은 왜 육각형일까? 그렇게 되지 않으면 깨진다. 인체의 좌우가 대칭이 아니면? 척추가 부러진다. 외력을 처리하려면 대칭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의 사건에서는 다섯 번에 걸쳐 내부적인 균형을 만든다. 관성력에 의해 에너지의 처리가 또다른 모순을 만든다. 순간적으로 내부의 균형을 도출하여 외력을 밀어내지만 그 과정에 코어가 움직이므로 다시 불균형해진다. 누가 떠밀었을 때 버티려면 두 다리를 벌리고 대칭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밀던 사람이 나가떨어지면 버티던 사람도 같이 쓰러진다. 또다시 대칭이 필요하다. 투수는 신체의 균형으로 상체를 움직이고, 다시 상체의 균형으로 어깨를 움직이고, 다시 어깨의 균형으로 팔을 움직인다. 이때 작용하는 범위가 점점 좁혀진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 범위를 좁히는 형태로 대칭이 조직되며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는게 엔트로피다. 작은 부분의 힘으로 큰 전체를 가눌 수 없기 때문이다. 팔을 움직이면 손이 따라오지만 손을 움직이면 팔이 따라오지 않는다. 소로 대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큰 것이 먼저 움직이고 작은 것이 나중 따른다. 신체>상체>어깨>팔>손으로 범위가 좁혀진다.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을 통해 변화의 진행방향을 알 수 있다. 변화는 범위가 좁아지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세계대전은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럽 전체에 긴장이 걸려 있었다. 수면하에 잠복된 전쟁이 국지전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우주의 근본모순은 비용문제다. 모든 변화에는 비용이 청구된다. 자연은 어디로 가는가?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간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야 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 부자가 먼저 빈자에게 돈을 빌려주면 빈자가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갚는 것이 상식이다. 빈자가 먼저 부자에게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 빌려줄 돈이 있으면 빈자가 아니다. 우주는 이 하나의 비용문제 곧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된다. 부자가 빈자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국가가 국민에게, 전체가 부분에게 먼저 액션을 취한다.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언제나 부모가 자식을 낳지, 자식이 부모를 픽업하지는 않는다. 모든 변화는 내부적인 대칭을 거치며 대칭을 만들 자원을 확보해두어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체는 2고 부분은 1이다. 1이 모여서 세상을 이룬다는 원자론은 틀린 관점이다. 1을 모으려면 비용이 든다. 누가 1을 모아주지? 1을 모집하는 호객꾼에게 지불할 일당은 어디서 나오지? 우리가 엔트로피와 어긋나는 원자론적 사고를 버리고 구조론적 사고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론은 자연의 존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인간과 만나기까지의 스토리다. 인식론은 반대로 인간이 존재의 깊은 영역까지 도달하는 문제다. 우주는 존재론으로 죄다 설명된다. 인식론은 존재론을 뒤집은 것이다. 존재가 대칭을 통해 세상을 조직하므로 인식도 대칭을 통해 가능하다. 인식의 딜레마는 부분에 전체를 담을 수 없는 모순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전체를 알아야 하는데 접근할 수 없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부분의 단서를 모아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접근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현재에서 과거를 알 수 없고, 겉에서 속을 알 수 없고, 정지에서 변화를 알 수 없다.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알지만, 눈은 겉을 볼 뿐 속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대칭을 쓰면 겉을 보고 속을 알고, 현재를 보고 과거를 알며, 정지를 보고 변화까지 안다. 자연의 완전성을 통해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알면 부분을 보고 전체를 안다. 존재론의 비용문제 – 변화는 작은 데서 시작되어 큰 것으로 파급되는데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대칭을 쓰면 가능하다. 대칭이 축을 공유한 상태에서 축을 움직이면 부분의 변화로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다. 자연은 이 한 가지 기술을 쓴다. 그러므로 예측과 재현이 가능하다. 인식론의 연결문제 – 인간은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내막을 아는데 많은 경우 접촉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칭을 쓰면 추적이 가능하다. 대칭은 패턴이 같으므로 겉을 보고 속을 알고, 현재를 보고 과거를 알고, 부분을 보고 전체를 알 수 있다. 존재론은 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의 작아지는 방향으로 전개하고, 인식론은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의 커지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인식론은 존재론에 종속되는 것이며 우주는 존재론 하나로 전부 해명된다. 인간의 사유는 인식론으로 시작한다는게 문제다. 존재론으로 사유를 시작할 수 없다. 큰 전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깨달음으로 가능하다. 깨달음은 뇌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갑툭튀 하는 것이다. 어른이 알파벳을 배우는게 인식론이라면 아기가 알파벳 건너뛰고 처음부터 회화로 바로가는게 존재론이다. 논리적인 추론으로는 존재론적 사유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단 우연히 한 번 깨달음을 성공시키면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아기는 추론하지 않는다. 옹알이를 하다가 우연히 문법을 포착하면 무한복제한다. 말이 술술 나온다. 배우는게 아니고 말문이 터지는 것이다. 누구도 아기 때 문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 옹알이를 하다가 어느 순간 문법을 터득하듯이 인식론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존재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 깨달음의 회로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론은 단서일 뿐 진짜 지식이 아니다. 헷갈리는 이유는 외부에서 개입하여 법칙을 어기는 경우 때문이다. 부모가 도와주면 자식은 쉽게 성공한다. 이 경우는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도와주면 부분으로 전체를 이길 수 있다. 지형지물의 도움을 받으면 작은 군대로 백만대군을 이긴다. 그러나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부모의 도움은 일시적인 것이다. 사건이 커지면 밖에서 도와줄 수 없다. 닫힌계의 설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외부를 닫아걸고 내부구조만 보면 답이 보인다. 물이 역류하고 에너지가 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51 대 49를 어기지 않는다. 반동의 힘은 49에서 멈춘다. 전체는 언제나 비대칭이기 때문이다. 국지전에서는 지형지물의 이용이 가능해도 전면전에서는 불가능하다. 예선전에는 반칙이 가능해도 결승전에서는 불가능하다. 큰 틀에서 세상은 결국 법칙대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