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인가 권력인가? 인간은 빵이 아니라 권력을 원한다. 비뚤어진 우월주의 엘리트들은 권력을 틀어쥐고 민중에게 시혜를 베풀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빵을 주랴? 복지를 주랴? 자유를 주랴? 인간다운 삶을 원하나? 원하는 게 뭐야? 틀렸다. 조금 틀린 게 아니고 완전히 틀렸다. 근본이 틀렸다. 답이 틀린 게 아니고 포지셔닝이 틀렸다. 쳐죽일 것들이다. 그들은 구제가능성이 없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주는 것이 권력이다. 받는 자가 을이고 주는 자가 갑이다. 자유를 주든 행복을 주든 평화를 주든 사랑을 주든 당신이 주고 내가 받는다면 틀렸다. 내가 줄 테니 네가 와서 받아 가라. 철부지 먹물들은 자신이 공부를 좀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공정하게 빵을 나눠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공평하게 나눠주는 것이 정의야! 나는 여자에게도 나눠주고 성소수자에게도 나눠줄 테야. 문재인보다 내가 더 공정하게 나눠줄 수 있는데. 틀렸다. 주는 자가 있는 한 지배와 복종의 주종관계가 성립한다. 당신이 내게 무엇을 주든 나는 당신과 싸울 것이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치명적이다. 생각하자. 진보는 무엇인가? 진보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진보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인가? 진보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가? 산만하다. 진실을 말하자. 진보는 권력이다.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죄다 개소리다. 그런 말이 일단 먹히니까 생각 없이 떠들어대는 것이다. 감성팔이에 신파다. 냉정해지자. 인간은 빵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권력으로 사는 동물이다. 사회에 권력이 충분한가? 빵은 충분하다. 70억 명이 먹고 살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권력이 모자라서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거다. 권력의 생산성이 현저히 낮다. 당신은 아프리카에 굴렁쇠 물통 따위를 주고 생색을 내곤 하지만 아프리카에 부족한 것은 빵이 아니라 권력이다. 그곳에 족장이 없고 추장이 없다. 있다 해도 명목상의 존재일 뿐 실권이 없다.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 일단 권력 자체가 존재해야 한다. 독재자의 권력은 가짜다. 사람을 죽일 수는 있으나 일을 추진하지는 못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퇴보한 이유다. 진정한 진보는 모든 사람이 같은 빵을 먹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같은 권력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순환이다. 충분한 권력을 생산하여 다수가 그 권력의 순환구조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영화로 치면 그곳의 모두에게 배역이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 다수에게 배역을 주지? 권력은 일대일 관계다. 돈키호테와 산초, 흥부와 놀부, 이몽룡과 변학도, 빌런과 히어로다. 그런데 어벤저스는 뭐냐고? 원래 히어로물은 인물소개다. 배트맨이라고 들어나 봤어? 슈퍼맨은 알고? 원더우먼도 모르면서. 타잔은 내가 잘 알고 있지. 이런 식이었다. 팀 히어로물이 등장했다. 헐크와 울버린의 궁합은? 스파이더맨과 앤트맨은 합이 좀 맞더냐? 이건 다른 차원이다. 전통적인 히어로물이 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육상경기라면 팀 히어로물은 구기경기다. 농구든 축구든 야구든 배구든 동료와의 협력이 중요하다. 무엇인가? 오늘날 인류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권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의 기량을 겨루는 육상경기로 가면 우사인 볼트 한 사람만 뜨고 흥행이 안 된다. 관객몰이 실패다. 시청률이 낮다. 충분한 권력과 역할의 생산성을 올릴 수 없다. 흥행하려면 팀 히어로다. 히어로들 간의 합을 평가한다. 헐크의 힘과 캡틴아메리카의 방패면 좋지. 헐크가 빌런을 집어던지면 캡틴아메리카가 방패로 쳐내는 거야. 그거 좋네. 기술이 멋져버려. 스파이더맨 너는 뒤에서 망이나 봐. 평면적 구성에서 입체적 구성으로 도약이다. 사회에 부족한 것은 언제나 권력이다. 충분한 역할이 없다. 어떻게 권력을 생산하지? 단체전을 하면 된다. 그것이 노무현주의다. 그것은 소승의 길이 아닌 대승의 길이다. 개인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팀 안에서 협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평가한다. 권력을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둬놓고 조지는 보수의 방법이다. 사회에 많은 칸막이를 만들면 된다. 서로 터치하기 없기다. 의사는 의사대로, 판사는 판사대로, 검사는 검사대로 장벽을 쌓고 따로 놀기다. 야쿠자도 일반인만 안 건드리면 그렇게 살도록 인정한다. 가부장이 먹고, 왕초가 먹고, 사장이 먹고, 선배가 먹고, 족장이 먹는다. 동장이니 이장이니 통장이니 하며 장을 많이 만들면 된다. 부녀회장, 청년회장, 노인회장, 새마을회장 좋을씨고. 그렇게 나눠 먹으면 된다. 각자 구역을 하나씩 할당받아서 자기 구역을 털어먹는 방법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털어먹는 자가 많으면? 누가 독박을 쓰지?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밑에 깔린 자다. 노예와 농노와 장애인과 소수자와 여성과 약자가 독박을 쓴다.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원시 부족민은 동물을 털어먹었다. 사슴 먹고 염소 먹고 붕어 먹고 개구리도 먹었다. 현대사회는? 약자를 털어먹는다. 그러려면 약자가 연대하여 세력화되지 못 하도록 칸막이를 쳐야 한다. 도처에 금을 그어놓고 금 넘어오기 없기를 선언한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 일본은 원래 수백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져 있어서 사무라이도 이웃 나라로 갈 수 없다. 칸막이를 많이 만들면 약자는 궁지에 몰린다. 보수꼴통이 권력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혁명이 일어났다. 수직구조에서 수평구조로 전환이다. 슈퍼맨과 배트맨, 아이언맨이 각자 자기 구역을 털어먹다가 팀플레이로 바꾼다. 어벤저스 흥행된다. 상호작용이 권력을 생산한다. 이건 다른 것이다. 육상경기에서 구기로 바꾸면 상호작용 총량이 절대적으로 증가한다. 우사인 볼트는 백 미터만 달리면 된다. 박지성은? 끝도 없이 달린다. 무릎이 닳도록 달린다. 손흥민은 멈추지 않고 달린다. 더 많은 패스와 더 많은 골과 더 많은 어시스트를 달성해낸다. 더 많은 역할과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진다. 보수꼴통의 권력생산이 육상경기라면 진보주의 권력생산은 구기운동이다. 색깔이라도 그렇다. 우리는 크레파스의 종류를 안다. 8파스를 쓴다. 부자들은 16파스다. 반장은 24파스를 쓰네. 어라! 36파스 등장이요. 초등학교 시절이다. 크레용을 사도 색이 여덟 개밖에 없었다. 4학년으로 올라갔다. 선생님이 선언하는 것이었다. 크레파스 폐지다. 오늘부터 물감으로 그린다. 그런데 물감은 색이 몇 가지나 되지? 무한하다. 크레파스는 그냥 칠하고 물감은 색을 배합해서 칠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화음이 있다. 화음을 배우면 갑자기 질의 도약이 일어난다. 풍성하다. 어느 분야든 소승이 있고 대승이 있다. 대승의 세계는 복잡하고 풍부하다. 수직권력에서 수평권력으로의 도약이 일어난다. 모르는 사람은 오해하지만 구조론을 배우면 수직구조에 수평구조를 더해서 훨씬 다양해진다. 사회에 칸을 잘게 나누고 칸마다 장을 임명하여 감투를 씌워주고 각자 제 구역을 알아서 털어먹게 하는 보수꼴통의 봉건주의 방법으로는 충분한 권력을 생산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희생자가 나온다. 원시시대는 동물이 최종 피해자다. 현대는 사회적 약자가 희생되고 있다. 봉건주의를 버려야 한다. 수직권력이 아닌 수평권력으로 도약해야 한다. 수직권력은 부녀회장, 청년회장, 노인회장, 새마을회장 따위 감투를 잔뜩 만들어놓고 권한을 주는 것이다. 수평권력은 케인의 어시스트를 받은 손흥민이 골을 넣는 것이다. 열린사회의 작동방식이다. 칸막이에 가둬놓고 조지는 닫힌사회의 수직권력이냐, 칸막이를 허물고 팀플레이를 추구하는 열린사회의 수평권력이냐다. 팀플레이를 하려면 캐릭터에 따라 소수자도 필요하고 약자도 기여한다는 점이 다르다. 손흥민이 어시스트를 쏘든 케인이 슛을 쏘든 상하관계는 없다. 권력은 분명히 있는데 지배복종의 갑을관계는 없다. 다른 세계다. 역사는 관념이 아니라 신무기에 의해 진보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이미 일어난 변화를 설명할 뿐이다. 청동기로는 많은 인원을 무장시킬 수 없었다. 고대 노예제다. 활이 등장하자 구리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인원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중세는 활의 시대이고 근대는 총의 시대다. 무장한 자는 노예가 아니다. 아는 게 힘이다.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청동기를 소유한 소수 귀족만의 전쟁에서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전쟁으로 발전한다. 전쟁 안에서 평등하다. 귀족만 싸우나? 여자도 싸우고 성소수자도 싸우고 장애인도 싸우고 약자도 싸운다. 이 전쟁에는 모두 동원된다. 수직적 서열경쟁이 아니라 수평적 상호작용 경쟁이다.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하는 쪽이 게임에 이긴다. 서로 간에 더 많은 패스를 날리는 팀이 점유율을 높여서 골을 넣는 것이다. 나치든 일제든 소련이든 수직구조의 강고함을 자랑할 뿐이다. 그들은 뻥축구나 할 뿐 횡적인 패스가 안 된다. 육상경기는 하는데 단체전을 못 한다. 21세기에 무기는 인터넷이고 지식이다. 핵으로 겨루면 러시아가 이기고 미국이 이기지만 상호작용으로 겨루면 한국이 이긴다. 한국인이 서로 참견하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강한 이유는 시나고그 때문이다. 가족들이 참견한다. 오늘날 좌파의 오류는 권력중독에 있다. 그들은 민중에게 시혜를 베풀려고 할 뿐 의사결정권을 넘기지 않는다. 결정은 내가 할 테니 니들은 따라와라 이거다. 권력중독이다. 왜 한때 나치가 떴고 소련이 떴을까? 어떻든 그들은 국민 모두를 동원했다. 잠시 동안은 모두에게 역할을 주었다. 지속가능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다.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모두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다면? 그게 인류의 정답이다. 그것은 무지와의 전쟁, 야만과의 전쟁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패션이든 요리든 수직구조와 수평구조가 있다.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다. 상하관계와 상호관계가 있다. 개인의 역량을 따지는 소승이 있고 팀플레이를 논하는 대승이 있다. 수직사회는 닫힌사회고 수평사회는 열린사회다. 조중동이든 한경오든 국힘당이든 정의당이든 열린사회의 적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칸을 잘게 나눠서 가둬놓고 조지는 봉건주의 수법을 쓰는 것이다. 군대라면 다른 소대나 다른 중대 사람과는 말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다. 모든 수평적인 연결 통로를 막아버린다. 왜? 조지려고. 그들이 노빠니 문빠니 하고 조롱하는 것은 그 수평의 장벽을 허물고 크게 세력화된 것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필리핀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신부가 필리핀 사람들의 모임에 나간다면? 신랑측 가족들은 신경이 곤두선다. 진중권과 서민의 무리가 신경이 곤두선 이유다. |
촌철살인의 문귀들입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드디어 이해되기도 하고요.
성경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는다"는 문귀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