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 백인 소녀는 잔인하게 흑인 하녀와의 우정을 끊는다. 어릴 때는 죽고 못 살다가 16살이 넘어 사교계에 입문할 나이가 되면 칼같이 끊는다. 예외는 없다. 노예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헬프’에 나오는 흑인 도우미의 증언이다. 열 명이 넘는 백인 아이를 키웠지만 은혜를 아는 백인 소녀는 한 명도 없었다. 유사한 이야기는 많다. 백인 여성들이 원래 악마와 같은 심성을 타고난 것일까?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구든 그렇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여성들일까? 남자는 그렇지 않은가? 그 여성들도 고양이나 강아지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린다. 자연수명을 훨씬 넘겨서 인간으로 치면 120살이 된 노견을 돌보는 이야기도 많다. 걷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배변도 못 가리는 노견 돌보기를 아주 부모 돌보듯이 한다. 왜 그럴까? 인간의 양면성이다. 권력 앞에서 인간은 냉정하다. 태도를 180도로 바꾼다. 개나 고양이는 약자다. 보호대상이다. 흑인 하녀는 반대로 자신을 돌보는 강자다. 개나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자신이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흑인 보모와의 관계는 거꾸로 자신이 돌봄을 받는 대상이다. 전세역전이다.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 성인이 되면 주변 인물들의 사정과 맞물려 돌아가므로 곤란해진다. 난처해진다. 매몰차게 버린다. 남자는 헤어진 여자를 잊지 못한다. 여자는 쉽게 잊는다. 이런 이야기 많다. 역시 권력충돌이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대상으로 여긴다. 여자는 남자를 보호자로 여긴다. 나쁜 보호자는 필요 없다. 이혼하면 바로 잊는게 맞다. 나쁜 지배자를 벗어나야 한다. 나쁜 아버지를 위해 흘릴 눈물은 없다. 나쁜 교사에게 충성할 이유는 없다.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하려면 냉정하게 잊어야 한다. 호르몬의 작용이다. 반대로 부모는 자녀를 돌봐야 한다. 잊을 수 없다. 권력관계에 따라 인간은 언제든지 태도를 바꾼다. 조중동 품에 안긴 진중권류 똥들은 시민세력을 자신을 길러준 흑인 하녀로 여긴다. 촛불시민을 자신을 길러준 가난한 부모로 여긴다. 이 지긋지긋한 촌동네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백인 소녀가 흑인 하녀를 버리듯이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배신한다. 노무현은 민중을 자신이 보호해야 할 자녀로 여긴다. 그 차이다. 인간이 철이 들었는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는지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원래 그렇다. 자신을 보호해준 사람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은 잊지 못한다. 호르몬이 그렇게 만든다. 양떼를 밖에서 몰면 수고롭다. 양치기 개가 좌우로 폭넓게 뛰어다녀야 한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어가야 한다. 어린 보더콜리 강아지가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이유다. 양떼를 무리 안에서 이끌기는 쉽다. 목자가 천천히 걸어가면 양들은 따라온다. 세상을 사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밖에서 겉돌며 대치할 것인가, 아니면 안으로 들어와서 이끌어 갈 것인가? 민주당 밖에서 헐뜯는 방법과 민주당 안에서 신뢰를 만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국민 안인가 국민 밖인가 포지셔닝이다. 국힘당은 국민이라는 양떼 밖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며 이쪽저쪽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양치기 개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밖에서 짖어대기는 정의당과 한경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엘리트의 신분을 얻어 민중과 섞이지 못하고 밖에서 겉돌고 있다. 스스로 신뢰를 만들기를 포기하고 남을 헐뜯을 뿐이다. 구조론은 밖에서 보느냐 안에서 보느냐다. 밖에서 보면 관측자가 개입하고 역설이 작용한다. 에너지의 축이 두 개가 되어 언제나 의도와는 반대로 움직인다. 안에서 보면 자체의 논리가 포착된다. 돌아가는 구조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서투른 양치기 개들은 양들을 엉뚱한 쪽으로 몰아붙이기가 다반사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자는 브나르도 캠페인은 백 년 전부터 있었다. 진중권류 우월주의 엘리트들은 양떼 속으로 들어가서 섞이기를 두려워한다. 양떼 속으로 들어갔다가 자신이 양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흑인 하녀와 친해졌다가 흑인 취급을 당할까봐 두렵다. 양떼 속으로 들어갔다가 양들의 발굽에 짓밟힐지도 모른다. 그들은 민중이 두렵다. 그들은 노빠가 두렵다. 그래서 밖에서 깐죽거린다. 그럴수록 그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사라진다. 양들은 선한 목자를 신뢰할 뿐 이쪽저쪽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개를 신뢰하지 않는다. 조국몰이는 일단 실패다. 추미애 몰이 굿거리장단 들어가 준다. 안 먹힌다. 강경화 몰이 휘몰이 장단 시도한다. 사실이지 그들은 양치기 개가 된 사실로 만족한다. 맘껏 짖어대고 좋잖아. 마음껏 뛰어다니고 좋잖아. 역할이 주어지니 좋잖아. 목자가 되지 못하고 영원히 개로 남는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논할 가치가 없다. 양치기 개가 어느 쪽으로 뛰어가야 하나? 진실을 말하랴? 개가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든 그들은 반드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양치기 개의 법칙이다. 개들은 원래 그렇다. 조국몰이로 황교안 짓 하다가 선거 깨지고 김종인으로 원위치, 다시 추미애몰이 삿대질 정치로 되돌아간다. 조금 있으면 또 반성한다. 또 폭주한다. 보더콜리가 원래 정신이 사납다. 대상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므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김종인 할배가 와도 달라지지 않는다. 정의당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만 귀담아들을 이유는 없다. 왜? 그들은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개는 개짓을 한다. 오로지 선한 목자만이 묵묵히 한 길을 간다. 국민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착했던 백인 소녀가 흑인 하녀를 매몰차게 대하는 이유와 양치기 개가 맹렬하게 짖는 이유는 정확히 같다. 밖에서는 원래 통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왜 착했지? 그때는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과 같은 공간을 쓰고 있었다. 결혼할 나이가 되면 심리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독립투쟁 들어가 준다. 누군가를 적대하는 방법으로만 인간은 독립하게 된다. 구조론은 안에서 통제한다. 밖에서 자극하면 내부에 자체 에너지의 축이 있으므로 항상 의도와 반대로 간다. 겉돌게 된다. 시스템 내부로 들어가서 스스로 민중의 축이 되어야 한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겉돌지 말고 노무현처럼 맞물려 돌아야 한다. |
내부로 들어오면 하나가 된다
"너는 간도 쓸개도 없는 거냐!"
라는 말이 있다
가진 주권이 없는 생명체는
정체성을 제대로 형성 못하여,
간과 쓸개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빈자이든, 부자이든
성 대세 자이든, 성 소수자이든
어떤 놈이 되었든
양 떼가 온전하게 생명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들의 간과 쓸개가 건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