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사유하라 세계관이 다르면 대화는 겉돌게 된다. 종교인과 과학자의 대화는 허무하다. 부족민과 문명인의 대화는 부질없다. 애초에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룰의 공유에 의해 성립한다. 공통의 룰을 승인하지 않고 자기 룰을 고집하면 게임은 불성립이다. 소통은 실패한다. 구조론을 배우려면 구조론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구조론의 세계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입장을 유지하면서 ‘네가 나를 설득해봐라.’ 하는 식으로 나오는 자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소거법을 쓴다.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룰을 공유하며 각자 스스로 나아가되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다. 정답을 찍어주는게 아니라 오답을 배척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는 알갱이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입자들의 집합으로 본다. 뉴턴의 기계론적, 결정론적 세계관의 연장선 상에 있다. 틀렸다. 아인슈타인 이후 상대론적, 카오스적,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모색되곤 했지만 여전히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틀린 전제에 패치를 남발해서 언어가 거추장스러워졌다. 같은 단어를 각자 다른 뜻으로 사용해서 언어가 혼탁해졌을 뿐이다. 이 즈음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게임의 룰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를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알갱이로 된 입자라는 개념은 비과학적인 용어다. 자연에 그런 것은 없다. 과학자가 쓸 수 없는 단어다. 애초에 틀려먹은 것이다. 입자냐 파동이냐는 유치한 논의다. 자연에는 닫힌계가 있을 뿐이다. 입자라는 것은 외력이 작용했을 때 반작용하는 것이다. 파동이란 것은 반대로 관측자인 인간이 외력의 작용에 반작용하는 것이다. 입자든 파동이든 관측자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객관적 존재 자체의 내적 질서가 아니다. 전제가 틀렸다. 언어에서 막히니 허무할 뿐이다. 세상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딱딱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알갱이나 파동이란 것은 부적절한 개념이고 의사결정단위가 있을 뿐이다. 자연에 플러스는 없고 마이너스만 있다. 단수는 없고 복수만 있다. 그냥 있는게 아니라 어떤 둘의 상호작용이 있는 것이다. 관측자에 대칭되는게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칭과 그 대칭된 둘이 공유하는 비대칭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모순과 그 모순의 해소방식을 가져야 한다.
사물 -> 사건 한두 가지 팩트의 오류가 아니라 애초에 공통의 룰이 되는 기본전제가 빗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단어를 각자 다른 뜻으로 사용하니 대화가 막힌다. 전제를 갈아타야 언어의 혼선을 극복하게 된다.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서 정의를 바꾸고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존재의 근본은 대칭이며 대칭은 내부에 축이 있다. 뭐가 있다는 것은 대칭이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관측자와의 대칭을 떠올리므로 출발부터 언어의 혼선이 빚어진다. 존재는 대칭이며 대칭은 축이 있고 축은 둘이 겹치는 부분, 공유하는 부분이다. 공유가 없으면 대칭은 깨진다. 축은 비대칭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존재는 반드시 어떤 2의 연결 형태로 존재하며 외력에 대해서 1로 행세하고 외력이 작용하면 내부의 축을 움직여서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는 그 변화를 포착하여 거기 무엇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어떤 변화도 없다면 존재가 아니라 무다. 우리가 막연히 거기에 무언가 있다고 믿는 것은 관측자인 인간과의 대칭이다. 이는 비과학적인 태도이며 관측자를 배제하고 대상 자체에 내재하는 대칭과 축을 찾아야 지식이 성립한다. 누가 고양이를 봤다고 하면 그 사람이 헛것을 본 것인지 고양이 그림을 본 건지 알 수 없다. 고양이의 머리와 꼬리의 대칭, 고양이와 생쥐의 대칭, 고양이 암컷과 수컷의 대칭, 고양이 어미와 새끼의 대칭을 봤을 때 우리는 고양이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을 봤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 알 수 없다. 귀신과 대칭되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귀신은 그 귀신을 본 사람과 대칭된다. 관측자와의 대칭은 배척되므로 우리는 거기서 어떤 유의미한 정보도 건질 수 없다. 귀신을 보지 않은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색맹인 사람이 칼라를 어떻게 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본 사람이 그것을 귀신으로 단정하여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냥 헛것을 봤다고 말하면 되는데 귀신이라고 말해버린다. 귀신을 본 사람이 열 명 있다면 그들은 각자 다른 것을 본 것이다. 이런 식이면 대화는 실패다. 뭔가를 봤으면 그냥 헛것을 본 것이다. 그것을 귀신이라고 단정하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들의 지적 게으름이 문제다. 그들은 조금도 진지하지 않다. 그런 사람은 배척된다. 말이 안 통하는 자들과는 말하지 않는다. 바른 어법은 소거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무엇을 봤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귀신이라고 하면 플러스다. 마이너스법을 써야 한다. 아닌 것을 배제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하나의 라인을 가진다. 이쪽으로 연결되면 저쪽으로는 끊어진다. 남편이면서 동시에 자식이라든가 혹은 아내이면서 동시에 딸이 될 수 없다. 관계는 언제나 하나다. 관계는 다섯뿐이다. 이쪽을 끊으면 저쪽이 연결된다. 언제나 관계는 단절만 있고 연결은 없다. 연결은 단절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질을 끊으면 입자가, 입자를 끊으면 힘이, 힘을 끊으면 운동이, 운동을 끊으면 량이 연결된다. 량을 끊으면 끝난다. 그다음은 없다. 질로 존재할 때 입자, 힘, 운동, 량은 잠복해 있다. 동시에 최대 다섯의 관계가 있으며 차례로 활성화된다. 질이 활성화되면서 사건은 처음 촉발된다. 질이 끊어지면서 입자가 활성화되고 입자가 끊어지면서 힘이, 힘이 끊어지면서 운동이, 운동이 끊어지면 량이 활성화된다. 관계는 동시에 다섯이 연결되지만, 실제로는 그중에 하나만 활성화된다. 나머지는 잠복해 있다. 앞단계가 끊어져야 뒷단계가 켜진다. 우리는 하나씩 끊으면서 소거법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뭔가 플러스하여 잡다한 것을 자꾸 테이블에 올리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귀신이니 천국이니 극락이니 뭐니 하는 언어에 들지 못하는 비어를 배척할 때 진리가 최후에 남는다. 모든 거짓을 끊어내면 하나의 라인이 발견된다. 플러스 언어와 마이너스 언어가 있다. 구조론은 마이너스 언어다. 마이너스 세계관이다.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씩 끊어간다. 이 부분에서 어긋나면 대화할 수 없다. 입자 개념은 끊어진 대상이므로 쳐주지 않는다. 언어도 아니다.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는 단계까지 오는게 중요하다. 그대는 대화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닌 것들을 끊어냈는가? 방해자의 제거다. 그렇다면 다음 스테이지로 진행할 수 있다. 뉴턴 이래의 입자적 사고, 입자적 언어를 극복해야 한다. 입자적 세계관을 넘어서야 한다. 입자는 각각 단절되어 있다. 단절되면 소통은 실패다. 그런 낡은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허무할 뿐이다. 과학은 연결이다. 진리는 곧 연결이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단절되어 각각 놓여있는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는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의 연결을 확인한 후 게임은 시작된다. 의미있는 대화는 시작된다. 정답을 선택하여 찍는 세계가 아니라 주도권과 통제가능성의 세계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 |
파동은 관측자인 인간이 외력에 반작용하는 것이다.
어디서 이런 통찰을 들을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꼭꼭 씹어 소화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