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장이든 근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과학의 근거는 존재론이다. 혹은 형이상학이다. 형이상은 물리학 이전의 영역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과학에 선행한다. 데카르트의 제 1 철학과 같다. 사유의 출발점을 정하는 문제다.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울 것인가? 이후 많은 것이 연동되어 결정된다. 연역에 앞서 공리를 정하는 문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면 그들은 맨 먼저 인간에게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혹은 인간이 신을 만났다면 인간은 신에게 무엇부터 질문할 것인가? 외계인이 지구에 왔다면 일단 지구인을 대체로 죽일 확률이 높다. 물리적 제압이 먼저고 대화는 그다음이다. 인간이 신을 만났다면 ‘그런데 너 신 맞냐? 증거 대 봐.’ 이럴 거다. 신원확인이 먼저다. 과연 사흘 만에 부활하는지 알아본다며 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을 확률이 높다. 대화하기 전에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어떻든 사전단계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어떻게 신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가? 대화하기 앞서 앉고 봐야 한다. 나무위키를 참고하자. 이런 질문과 주장이 형이상학적 담론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게 진짜인가? 정말로 있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신은 있는가?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운가?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이러하다. 감각으로 인식하는 현상 너머에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본체가 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아는 있다. 이 세계는 완전한 결정론적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는 없다.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략 뻘소리지만 이런 질문과 주장들을 통하여 우리는 신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테이블에 앉을 자격이 없다. 대화에 끼지 못한다. 애초에 발언권이 없다. 과학의 출발선에 서지도 못한다. 어떤 주장이든 근거를 잃는다. 동양이 과학을 못 한 것은 이 질문을 못 해서다. 동양은 원래 형이상학이라는게 없다. 실용주의 실사구시 정신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주역이 형이상학인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신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다. 신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지 못하므로 애초에 과학의 출발선에 서지도 못해서 과학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뒤떨어져서 대략 서양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구조론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게 진짜인가?’ -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관측대상에 내재하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관측자와의 상대적인 관계다. ‘정말로 있다는 게 무엇인가?’ - 있다는 것은 관측자의 맞은편에 붙박힌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둘의 상호작용에 따른 사건의 전개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사건 안에서 주체적인 의사결정의 단위다. ‘신은 있는가?’ - 신은 나의 주체성을 연역하는 의사결정단위로 추상적 존재이며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은 없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운가?’ -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지만 의지는 정신, 의식, 의도, 생각, 감정으로 전개하는 마음 메커니즘의 일부이며 환경과 무의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점에서 자유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건이 상대가 있는 전략과 전술의 게임 형태이므로 선택과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있다. 마음은 메커니즘을 따르는 점에서 기계적이나 삶은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게임적이다. 사실이지 인류는 그동안 이러한 본질적 질문들에 답하지 않고 그냥 어물쩡 넘어왔다. 형이상학이 다양하게 골때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냥 너와 내가 어떻게 테이블에 앉아 대화할 수 있는 평등한 상태까지 도달하느냐다. 노예와 주인의 신분이 다른데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느냐다. 우주와 인간이 어떻게 수평적으로 소통하는가다. 형이상을 해결한 다음 형이하로 넘어가야 하는데 초장부터 막혀서 전전긍긍하다가 일단 되는 것부터 해보자고 형이하를 먼저 해치운 것이다. 컴퓨터라면 일단 컴퓨터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대화창구를 개설하고 프로토콜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형이상학이고 존재론이다. 인류는 다양한 방법으로 어물쩡 우회하려다가 뒤탈이 났다. 원자론은 존재론의 문제 곧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해 대략 그렇다 치기로 합의한 것이다. 원자의 속성이나 뉴턴이 물질을 정의하는 개념들은 모두 존재론의 질문과 관계가 있다. 왜 원자는 쪼갤 수 없고 물질은 관통될 수 없다고 전제할까?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게 진짜인가?’ ‘정말로 있다는게 무엇인가?’ 이런 곤란한 질문들 때문이다. 보고 느끼는 것을 의심하면 곤란해진다. 추론은 불성립이다. 공리를 세울 수 없으므로 연역할 수 없다. 이런 난감한 질문들 때문에 게임의 룰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편법으로 질문들을 우회하려면 물질은 이러저러하게 정의되어야 하고 원자는 이러저러한 성질을 가져야 한다. 원자가 어떠한게 아니라 어떠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곤란하니까. 그러나 원자가 선심을 베풀어서 인간의 곤란한 입장에 맞춰주고 그럴 리가 없잖아. 감각으로 인식하는 현상계 너머에 본질적이고 초월적인 본체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곤란하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렇다. 원자론은 형이하학의 최종보스가 되므로 형이상학에서는 이데아론이 걸맞다는 거다. 퇴계의 이기이원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게 과연 진짜인가 하고 캐묻는 사람들 때문에 이와 기를 분별해서 곤란한 문제는 기로 떠넘기고 이로 도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게 진짜든 가짜든 기 한테나 가서 알아봐라. 우리는 고상한 이의 세계에 노니느라. 이러면 된다. 백성들이 곤란한 질문을 던져대면 난감하다. 그럴 때 귀족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자기네끼리 노는 것이다. 청담사상도 그렇다. 곤란한 질문을 당하면 그딴건 탁류에 속하므로 우리 청류에게 묻지 마라. 이렇게 담장을 높이고 갈라치면 된다. 쉽잖아. 플라톤이나 뉴턴이나 데모크리토스나 칸트나 퇴계나 마찬가지다. 귀찮게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생각을 왜 해? 도망치면 되잖아. 그들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형이상학의 추궁을 당해 입장이 곤란해지므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게 유일한 도피로였다. 이데아로 도망치고, 원자로 도망치고, 이성으로 도망치고, 이로 도망친다. 그들은 평등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화하지 못한다. 구조론은 형이상의 제 문제에 대해 넉넉히 답할 수 있으므로 도망갈 구멍을 팔 이유가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데카르트의 제안이다. 출발선부터 정하자는 거다. 사실 이 명제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형이상학의 곤란한 질문을 당하기 싫으면 일단 우리가 출발선이나 합의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거다. 구조론으로 보면 모든 모든 추론의 제 1 근거는 액션이다. 우주는 정적 존재가 아니라 동적 존재다. 데카르트의 존재라는 말에는 인간에 의해 대상화된다는 개념이 있다. 대상화되면 상대성이 성립하므로 객관적이지 않다.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신이 나에게서 분리되어 남으로 타자화되는 즉 신이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존재 자체의 내적 상호작용이 절대성을 가진다. 상호작용은 동적 존재다. 그러므로 우주의 제 1 원인, 제 1 철학, 제 1 명제, 첫째 근거는 원자가 아니고 액션이다. 원자는 인간에 의해 대상화된 가짜다. 대상화되면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 주체와 타자는 대등하지 않으므로 대화는 애초에 불성립이다. 외계인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 논리 전개의 출발점을 세울 수 없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액션의 연결이다. 구조론에서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건은 수학의 이벤트event 개념보다 액션action개념이 적절할 수 있다. 이벤트는 수학의 확률개념을 떠받치는 단위 개념에 가깝고 액션이 에너지를 태운 사건의 시공간적 상호작용 성질을 반영하는 말이다. 상호작용은 둘이서 나란히 가는 것이다. 존재의 최소단위, 과학의 근거, 형이상, 제 1 철학, 제 1 명제, 제 1 근거, 사유의 최초 출발점은 이데아나, 원자나, 본질이나, 영혼이나, 이성이나, 이나, 도나, 무가 아니라 나란히 걸어가는 액션이며 그것이 상호작용이고 사건이다. 그것이 사건의 원자다. 샤르트르의 실존개념도 이와 가까운 것이다. 굳이 실존이라고 명명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하는 말은 관측자 맞은 편에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관측자와 한편에서 주체화된 액션의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혁명이나 이상주의는 어떤 도달해야 할 대상이지 주체화된 액션이 아니다. 남이다. 남의 영역에 들어간다. 니체의 초인이나 석가의 깨달음은 내가 올라선 것이다. 천국에 간다면 남의 집에 가는 것이다. 남의 집에 왜 가지? 거듭남은 내가 올라서는 것이다. 원자개념과 액션개념은 그 차이다. 원자는 관측자의 맞은편에 선 대상의 상태이고 구조론의 액션은 관측자를 포함한 주체의 입장이다. 액션의 원자, 액션의 인자가 있다. 어떤 둘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공리로 삼아 연역을 전개할 수 있다. 축구시합이라면 공격측과 수비측이 나란히 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건이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나란히 간다. 존재는 그 둘 사이에 있다. 1+2와 3은 나란히 간다. 평행선처럼 어떤 나란히 가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삼아 연역할 수 있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할 수 있다. 커플은 남녀가 나란히 가므로 거기에 존재가 있다. 보통은 관측자와 나란히 가므로 존재가 있다. 데카르트의 명제로 보면 나는 생각한다의 주어와 동사가 나란히 간다. 주어인 나와 생각의 나가 나란히 간다. 나란히 가는 그것이 존재다. 주어와 동사, 전제와 진술, 조건문과 반복문은 나란히 간다. 나란해져야 함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나란하지 못하므로 평등하게 테이블에 앉지 못한다. 싱가포르에서는 가짜로 앉았다가 파투가 난 것이다. 구조의 구는 얽힘이고 조는 지음이다. 얽히면 나란하고 지으면 가게 된다. 자동차가 달리는 동안 도로의 거리가 진행한다. 기차와 철도는 나란히 부산까지 간다. 모든 사건은 에너지를 승객으로 태우고 나란히 간다. 사건이 진행한 만큼 에너지도 나란히 진행해 있다. 그것을 근거로 연역할 수 있다. A와 B가 나란할 때 B와 C도 나란하다면 A와 C도 나란하다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하나의 사건 안에서 나란하다. 질에서 힘으로 변하게 하는 입자의 액션과 힘에서 량으로 변하게 하는 운동의 액션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란하다. |
"사건이 상대가 있는 전략과 전술의 게임 형태이므로 선택과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있다. 마음은 메커니즘을 따르는 점에서 기계적이나 삶은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게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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