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는 쪼갤 수 없으므로
내부가 없지만 사건은 내부가 있다.
사건 내부를 들여다보는게 구조론이다.
자동차를 타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부를 들여다보자.
자동차가 주유소를 떠나면 그때부터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기름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운전자의 선택에는 여러가지로 제한이 걸린다.
우리는 운전자가 어떤 선택을 할지 큰 틀에서 범위를 알 수 있다.
운전자는 무조건 기름을 줄이는 선택을 하지 조금이라도 기름을 늘리는 선택을 할 수 없다.
이 하나의 원칙만 철저히 붙들어도 우리는 세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을 밖에서 보는가, 안에서 보는가?
밖에서 보고 소극적으로 적응하고 숨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안에서 보고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려고 하는가?
시선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감사~! 일부 수정 보강했습니다.
현대의 원자라는 것은
그냥 이름이 atom인 것이고
굳이 말하면 쿼크와 렙톤이 원자가 되겠지요.
구조론에서 말하는 원자론적 사유는
뉴턴이 정의한 물질의 정의에 부합하는
뉴턴 이래의 기계론, 결정론적 사고를 말합니다.
원자론이 아니라 물질론, 입자론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또 수학적으로는 집합론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계를 정해야 언어가 성립합니다.
막연히 원자론적 사유를 하는 거지요.
어떻든 물질의 근원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 근원이 집합해서 우주가 이루어졌다는 사고.
파인만이 말한 인류가 멸절의 위기에 후손에게 물려줄 단 하나의 지식.
구조론으로 보면 사유의 출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입니다.
인간에 의해 가리겨지는 대상이 출발점이 되면 그것은 입자이고
그 입자의 이름이 무엇이든 원자론의 개념과 부합합니다.
출발점은 둘의 상호작용이어야 마땅한 것이며
어떤 하나의 개체가 지목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질이든 시장이든 문화든 정치든 경제든 예술이든
사유와 논리의 출발점이 어떤 지목되는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인류의 거의 100퍼센트는 무조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하고
어떤 대상을 딱 지목해놓고 사유를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지목하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풀어간다면
그게 잘못된 원자론적 사유이며 인류의 거의 100퍼센트가 그렇습니다.
인류의 대부분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사유하지만 그 저변에는
원자론 결정론 기계론 입자론 물질론적인 바탕을 갖추고 있습니다.
"안에서 보고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하려고 하는가? 시선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오타 발견했습니다.
여섯번째 그림에서 '간격을 조절하여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 '있다'
오랬동안 사용될 그림자료인 듯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