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636 vote 0 2010.09.09 (20:59:13)

  (이어지는 글입니다.)

1268105530038.jpg


  쇠도끼를 버리고 돌도끼를 고집하는 부족민과 주둥이쪽만 신경쓰다가 불을 까이고 마는 수퇘지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코코넛 구멍 속에서 사탕을 쥔 손을 빼지 못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과, 러시아 수렁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히틀러의 어리석음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화물교를 신앙하며 20년간 화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누아투 탄나섬의 부족민과, 기독교를 신앙하며 2천년간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백인 선교사들 사이에 어떤 본질에서의 차이가 있을까? 전혀 없다. 똑같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판단력의 차이가 없고, 문명인과 부족민 사이에 분별력의 차이가 없다. 인간이 좀 아는척 하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의 데이터베이스 덕분이고, 사회적 지능 때문이다. 바깥뇌 덕분이다.  

 

  문명인의 판단력과 부족민의 판단력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은 ‘야생의 사고’를 쓴 레비 스트로스의 비롯하여 많은 인류학자들이 논증하고 있다. 지금 아마존의 밀림이나, 태평양의 섬들이나,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볼 수 있는 괴이한 일들이 불과 얼마전까지 유럽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라고 레비 스트로스는 증언한다.

 

  뒷집 염소가 새끼를 유산하거나 앞집 보리가 쭉정이 뿐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다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여전히 귀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실제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그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점에서 놀라게 된다. 과학자들 중에도 의외로 많은 숫자가 종교를 믿고, 귀신을 믿고, UFO를 믿고, 기(氣)를 믿기도 한다. - 이 글을 쓰던 중 잠깐의 검색해 본 바로는 한국 네티즌의 58프로가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캐나다인의 절반이 귀신을 믿고, 미국인의 34프로가 귀신을 믿고, 같은 비율로 UFO의 존재를 믿으며, 48프로는 초능력 현상을 인정한다는 등의 검색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 이쯤 되면 주둥이를 묶이고 불을 잃어먹는 돼지와 화물교를 신앙하는 인간 사이에 판단력의 차이는 무시되어도 좋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대개는 바보다. 교육에 의해 그나마 사람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귀신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필자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무언가를 믿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믿는 대상이 무엇인지 참으로 모호한 것이다. 즉 실재하는 귀신의 존재에다 믿음을 보탠 것이 아니라, 믿음에다 귀신이라는 상표를 덧씌운 것이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귀신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도 그렇다. 신앙이라고 표현되는데, 그 신앙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파헤칠수록 불분명하다. 계속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커다란 빌 공(空)자 하나를 만나게 된다. - 금강경의 '공(空)'사상을 연상케 하는. - 엄밀히 분석하면 ‘믿는다’는 표현자체가 비어(非語), 혹은 허어(虛語)에 가깝다. 이는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만 참고해도 명백해진다. 러셀은 예수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는둥 예수 집안의 의혹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서 그것은 관심사 밖이다. 러셀의 공격은 애초에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남녀의 성행위에 의해 예수가 태어났다는 러셀의 견해가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해도 기독교인의 신앙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필자의 관점은 러셀의 입장과 다르다. 러셀은 신앙 대상의 불투명함을 논증하고 있지만, 필자는 신앙대상과 무관하게 믿음이라는 삶의 양식 자체가 존재했다고 본다. 믿는 것은 좋은데 ‘믿는다’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다. 도무지 어쩐다는 것인가? 종교행사에 참석하면 믿는 것인가? 계율을 지키면 믿는 것인가? 경전의 기록을 승인하면 믿는 것인가? 이런 것들은 우스울 뿐이다. 본질은 따로 있다. 필자는 최근에 꾸란을 검토해 보고 핵심 교리가 기독교에 비해 훨씬 더 간단하다는 점에 놀랐다. 3위 1체설을 반대하고 1위 1체설을 따른다든가, 성모상이나 십자가상 혹은 성화를 포함한 모든 우상을 거부한다든가, 마호멧을 사도로 인정한다든가 하는 따위가 진술되고 있으나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고 핵심은 권한의 위임이었다. 즉 믿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권한을 위임한다는 것이다.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공동체에 위임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종교전쟁과 같은 마찰상황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피아구분을 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느 편에 소속된다는 의미다. 이 경우는 믿음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언어로서 기능한다. 비어(非語)나 허어(虛語)가 아니다. 결국 믿음이란 ‘소통의 코드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서로 마찰하던 집단이 종교만 같으면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봐서 명백하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그 코드를 공유할 공동체의 존재가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종교는 신앙대상의 과학적 근거와 무관하게 인류의 공동체적 생활양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러셀의 주장이 전부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해도 과학자들조차 피식 웃어넘기고 마는 것이다. 과학자들도 의외로 높은 비율로 종교를 신앙하더라.

 

  어떤 사람이 ‘나는 신을 믿는다’고 하면 그 의미는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는 뜻일 때가 많다. 모두가 신의 자손이고, 그렇다면 형제이고, 형제간에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혼란은 언어의 결함 때문이다.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는 인지부조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는 팩트의 집합이 아니다. 언어는 테마를 따라간다. 어떤 믿음의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권한을 위임한다는 행동, 즉 믿음이라는 행동을 결정해 놓고, 그 행동에 맞추어 그 행동의 근거가 되는 어떤 믿음의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 신앙대상 곧 하느님이건, 부처님이건, 조상님이건, 신이건, 존 프럼이건 그 대상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권한의 위임 형태로 공동체적 행동양식을 결정해놓고, 그 공동체의 조직원리에 맞게 개인의 가치판단과 집단의 의사결정을 성공시키는 것이며, 그 의사결정집단을 구성할 목적으로 교단을 꾸리는 것이며, 교단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신앙대상을 결정한다.

 

  인간은 가족을 필요로 하지만 한편으로 가족을 넘어선 초가족을 필요로 하며, 과거에는 부족이 그 역할을 했는데 부족이 해체되면서 종교 공동체가 그 부족의 역할을 대리하게 된 것이다. 공동체 형태로 종교의 실익이 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더 이익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구조론적으로 보면 인간의 경제활동은 ‘식≫의≫주≫차≫여가’ 순으로 달성된다. 최근 유럽은 여가생활의 비중이 커져서 종교의 열기가 낮아졌지만 한국은 식과 의를 확보하고 주와 차를 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여름에 두어달씩 집을 비우는 유럽식 여가생활은 꿈 꾸지 못하므로 종교의 열기가 높다. 손익분기점이 있다. 현재로는 한국에서 종교의 물적 심적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종교는 번창할 것이다. 특히 한국인이 집착하는 인맥형성에 종교가 기여하기 때문에 소망교회는 번성한다.

 

  신이 교리를 내려보내면, 교리를 뒷받침할 목적으로 교단이 구성되어 교회를 꾸리고 신도가 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동함에 있어서, 무수히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해야하는 상황 앞에서, 그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에 부담을 느끼며, 그 부담을 덜기 위하여 공동체 단위의 일괄타결을 꾀하게 되고 이를 위하여 공동체가 구성되어야 하며, 그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방향에서 교회를 꾸리고, 그 교회의 분열을 차단하는 형태로 교리를 조직하며, 그 교리에 맞는 방향으로 신을 설정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 형태로 된 것은 그래야만 공동체가 구성되고 일괄타결식 의사결정과 가치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비누아투의 화물교가 그 방향으로 간 것도 그래야만 공동체의 행동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치판단, 의사결정의 부담을 타인에게 미루기 위하여 종교를 필요로 한다.

 

  개신교의 등장도 교리의 문제 보다는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화된 현실과 관계가 있다. 신도들은 보다 결속력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나 카톨릭 신부의 역할은 과거의 가부장 역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기능이 가부장 형태에서 동아리 형태로 변경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근대에 와서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더 많은 의사결정과 가치판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도들이 성직자에게 위임하지 않고 직접 신과 소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개신교가 득세하게 되었다. 봉건사회라면 그저 농사만 지으면 되었으므로 판단하고 결정할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지금은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명백히 종교의 수요형태가 변했다.

 

  신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행태는 정말 역겨운 것이다. 누가 어두컴컴한 교회를 자기 집으로 삼고 싶겠는가? 매일 울고짜는 인간들의 찌질한 투정소리나 듣고 싶겠는가? 누가 자기를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겠는가? 신은 대화가 되는 상대를 원한다. 함께 대업을 도모할 동료를 원한다. 찬양하고 아부하는 소리는 열등감을 가진 자들이 원하는 것이며, 이는 노예제도의 산물에 불과하다. 신은 열등감이 없으므로 누가 자신을 찬양하면 싫어한다. 추켜세우는 것과 깎아내리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찬양하는 것은 비교하여 판단하는 것이며 신은 애초에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레벨이 다르다. 찬양행위는 모독이다.

 

  노예는 노예와 대화하고 주인은 주인과 소통한다. 주인이 노예와 대화해봤자 참다운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신의 도움을 구하려면 신을 도와야 하며, 신을 돕는 방법은 신과 소통하는 것이며, 신과 소통하려면 신과 대등해져야 한다. 인간 개인은 약하지만 인류 전체는 약하지 않다. 60억 인류를 대표하는 인류 대표자의 마음을 가진다면 신과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개는 말뚝에 걸린 고리를 벗겨 간단히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반면 숨겨진 먹이는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만다. 어떤 경우는 지능이 낮아져서 초보적인 판단도 못하고, 어떨 때는 매우 영리해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는 종교전쟁이라는 어리석음으로 치닫고, 도 어떤 경우에는 달나라에 로켓을 보내기도 한다. 무엇이 다를까? 반응에 차이가 있다. 상대가 반응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상대가 응답하지 않으면 머리가 나빠진다.

 

  개와 인간의 차이는 기다리는 정도의 차이다. 개는 개줄을 씹어보다가 반응이 없으면 10여초만에 그만두고 만다. 인간은 적어도 한 시간은 노력해 본다. 방법을 바꾸어가며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인간이 개보다 나은 이유는 언어가 있고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회가 대상과 인간의 중간에서 개입하여 그 대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다양한 경로를 제시하므로 이렇게도 어휘를 배열해보고, 저렇게도 단어를 나열해보고 하면서 개보다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없고 사회가 없다면 역시 개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려고 해도 매개가 되는 ‘이런 저런’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종교문제, 귀신문제, 전쟁문제와 같은 문제 앞에서는 어리석어지는가? 상대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이 실제로 지구를 방문한다면 어떨까? 별의별 검증을 다 시도하며 온갖 난리법석을 다 피울 것이다. 하느님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반응하면 인간은 영리해진다. 그러나 교회의 하느님, 사찰의 부처님, 사당의 조상님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 전혀 반응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어쩔줄 모른다. 일제히 바보가 된다.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반응을 정확히 알수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어리석어진다. 전쟁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야 ‘미국이 그렇게 반응할줄 누가 알았나’ 하며 일본 군부는 자책한다. 루즈벨트가 의중을 숨겼기 때문에 일본이 오판한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그 반응을 기다리는 ‘텀’의 차이다. 진보가 주장하는 환경문제는 비교적 반응이 느리다. 영국은 300년 전부터 석탄으로 런던을 오염시켜 최악의 스모그를 만들었지만 무려 300년이 지나고서야 템즈강을 맑게 만들었다. 아주 느린 사이클이다. 보수들은 속전속결을 지향한다. 반응이 느린 문제는 신경쓰지 않는다. 가장 빨리 해결하는 방법은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목장을 파고드는 덩굴은 잘라버리면 되고, 귀찮게 하는 자는 죽여버리면 된다는 식이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을 1년 만에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치고 빠지기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라크인의 반응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대의 반응을 알았기 때문에 영리해져서 미군을 철수시키고 있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면 개의 목줄풀기와 인간의 귀신숭배가 같은 패턴임을 알 수 있다. 코코넛 함정에 빠진 원숭이와 러시아 수렁에 빠진 히틀러가 정확히 같은 패턴임을 알 수 있다. 구조가 같다. 그냥 벗기면 되는데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한다. 영리한 진돗개는 도망치는 오소리를 교묘한 우회기동으로 잘도 잡아내지만 훨씬 쉬운 문제인 목줄벗기기를 못한다. 반응하는 것은 잘 해결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은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반응하는 것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유체역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단순화 하는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반응하게 만든다. 대칭을 찾고, 대칭의 축을 찾고, 그 밸런스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찾으면 모두가 한줄에 꿰어져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연동되어 있으므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판단력은 결정적으로 높아진다. 수학자들은 공식을 쓴다. 해체되어 있는 것은 반응하지 않으므로, 요소를 결합하여 반응하는 형태로 구조를 변형한 것이 공식이다.

 

  인간은 상황에 단어를 부여하고, 단어에 문법을 부여하여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반응하게 만듦으로써 지능을 높인다. 인간 지능의 대강은 언어에 의해 높아진 것이다. 어려서부터 격리된 채 생활하여 언어를 전혀 배우지 못하면, 의사소통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생각을 할 수 없게 되고, 실제로 판단력이 떨어진다.

 

  지능의 상당부분은 공간지각능력이다. 흩어진 공간의 요소들을 꿰어맞춰 동서남북, 전후상하, 원근심천의 대칭을 성립시킴으로써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반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패턴을 파악하고 추론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패턴은 다른 것 중에서 공통점을 찾아 큰 덩어리를 이룸으로써 반응하게 하고, 추론은 중간에서 방해하는 중복과 혼잡을 배제하여 반응하게 한다. 두 나뭇잎이 있다. 두 나뭇잎은 서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잎을 연결하는 하나의 가지를 찾아내면 바로 반응한다. 두 사람이 있다. 서로는 남남이다.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을 연결하는 하나의 가지를 찾으면 반응한다. 성별이라는 가지, 동향이라는 가지, 취미라는 가지. 직업이라는 가지. 친척이라는 가지, 신분이라는 가지를 찾아보면 어느 하나라도 공통점이 발견된다.

 

  상관없는 존재인 남남이 관계로 엮여 반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들은 같은 야구팀의 팬이 되기도 하고, 같은 드라마를 즐겨 보는 그룹이기도 하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며, 반응하면 통하고, 통하면 아이큐가 올라간다. 우리가 배움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 떨어져서 반응하지 않는 별개의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을 찾아서 둘을 관계로 맺어줌으로써, 반응하도록 만들어 각자의 아이큐를 올리는 것이다. 관계안에서 인간은 명석해진다. 관계가 없으면 천재도 바보가 된다.(계속)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22]이상우

2010.09.09 (23:41:09)

요즘 매일 토해내는 동렬님의 글에서 감탄이 느껴집니다.
중요한 것에는 무지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귀신같이 얍삽한 인간의 본능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주시네요.
인류가 갈 길을 이토록 쉽게 설명해주니...
그럼에도 어느샌가 모르게 본능적으로 노예적 인간의 길,  별볼일 인간의 길에 기웃거리는 것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도 존재론적 인간, 적어도 ~~에의 속박을 거부하는 인간의 길을 가려고 몸부림칠 기회를 주니 힘이 날 밖에요.
[레벨:1]자연

2010.09.10 (00:00:48)

"믿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권한을 위임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대단한 통찰입니다. 감사드리고요..

다만 본문 중에 한 가지 오타라고 보여지는 것은,

"금강경의 '색즉시공'을 연상케 하는" 에서

색즉시공은 반야심경이 아닐런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0.09.10 (00:56:09)

고쳤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10.09.10 (01:23:40)

만유척력이니, 인류척심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9]로드샤인

2010.09.10 (13:26:57)

폭발적인 글입니다.
인간의 한계과 가능성을 이렇게 속시원히 짚어 주시는군요.
 
"우리가 배움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 떨어져서 반응하지 않는 별개의 둘을 연결하는 공통점을 찾아서 둘을 관계로 맺어줌으로써, 반응하도록 만들어 각자의 아이큐를 올리는 것이다. 관계안에서 인간은 명석해진다. 관계가 없으면 천재도 바보가 된다."

이것은 시인의 감성 입니다. 모든 분야의 프런티어는 본질에서 시적 감성을 지닌 인간이니까요.

[레벨:5]희정

2010.09.10 (23:44:04)

맞아요.
요즘 제가 겪는 일이 여기 다 나오네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주니 개운해지는 느낌..
그나저나 동렬선생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글을 어디서 볼수 있을까요?
경전에도 없는 글을 볼수있는 저는 행운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글을 보고나면 책읽기가 싫어저요.
이미 윗글까지 다 읽었는데 댓글은 여기에 답니다.
다음편이 또 기대되고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요.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168 트라우마 image 8 김동렬 2010-09-28 17254
2167 지성의 역사(추가버전) image 7 김동렬 2010-09-26 12505
2166 소통지능 image 3 김동렬 2010-09-23 17409
2165 웃어라 한국인아 2 김동렬 2010-09-23 13299
2164 백남준과 스티브 잡스 1 김동렬 2010-09-22 16284
2163 질은 만남이다. image 2 김동렬 2010-09-21 13495
2162 인생의 화살 김동렬 2010-09-21 13792
2161 진승의 실패 김동렬 2010-09-20 16523
2160 노무현, 성공한 대통령인가? 2 김동렬 2010-09-16 14437
2159 혜강에서 소동파까지[업데됨] 7 김동렬 2010-09-16 12033
2158 지식에서 지성으로 김동렬 2010-09-14 11869
2157 신과 친하기 7 김동렬 2010-09-14 15085
2156 '신은 없다' 호킹 발언 김동렬 2010-09-12 20441
2155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8 김동렬 2010-09-10 13540
» 종교의 의미 image 6 김동렬 2010-09-09 15636
2153 부족민의 화물교 신앙 김동렬 2010-09-08 17702
2152 몽구잡스 경영 김동렬 2010-09-08 16636
2151 인간의 지적 능력 1 김동렬 2010-09-08 17257
2150 영속적인 불만족 3 김동렬 2010-09-07 16283
2149 아래글 정답 5 김동렬 2010-09-06 14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