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와 1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2의 대칭구조 안에서 성장하고 진보하는 1의 방향성을 안다는 것이다. 마주보는 공간의 대칭 2를 일직선인 시간의 대칭 1로 바꿈으로써 가능하다. 모형을 통한 시각화가 중요하다. 비유하면 결혼은 1이다. 부부는 2다. 가정은 3이다. 부부 2 사이에 아기 1이 있으면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아기가 바퀴축이 되어 부부를 붙잡고 있는 모형이 그려진다. 다른 어떤 것이어도 무방하다. 어떤 대칭되는 둘이 무언가 하나를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구속할 때 그것이 입자다. 그러나 이는 관측자인 인간의 시야에 포착된 모습이고 자연의 본래 모습은 결혼 1이다. 존재는 사건이며, 그것은 부부나 가정이 아니라 결혼이다. 먼저 결혼한 다음에 부부가 되고, 그 다음에 부부가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입자 이전의 양자를 넘어, 양자 이전의 원존재原存在를 찾아야 한다. 구조론에서 그것은 질質이다. 근대 물리학은 입자와 양자를 규명하고 있으나 질에 이르지 못했다. 존재의 원형은 무엇인가? 탈레스는 물을 말했고 돌턴은 입자를 내세웠다. 물은 부드럽고 입자는 딱딱하다. 함정이 있다. 딱딱한 입자로는 세상을 지을 수 없다. 입자는 벽돌과 같다. 모르타르 없이 벽돌만으로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양자는 레고블럭과 같다. 요철凹凸 모양의 돌기가 나 있다. 역시 충분하지 않다. 돌기가 있어도 레고블럭은 조립되지 않는다. 레고블럭을 조립할 꼬마가 있어야 한다. 외부에서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진정 완전한 것은 어떤 것인가? 입자는 대칭의 둘을 통일하는 축이 내부에 있다.
레고블럭은 돌기가 안쪽에 감추어져 있다. 결합요소인 축을 밖으로 끌어내면 이와 같은 모양이 된다. 존재는 둘이 하나에 엮인 가정이 아니며, 둘이 만나서 이루어진 부부가 아니며, 그 이전의 결혼이다. 결혼식장을 둘러싼 것은 하객들이다. 부부가 될 두 사람이 하객들에 둘러싸인 모양이다. 물리학은 최소 의사결정단위를 규명한다. 최소단위는 소립자이고, 소립자 이전에 양자이고, 양자 이전의 이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여 있다. 우리는 모형적 사고를 통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천문학자는 별의 궤도가 불안정한 것을 보고 주변에 있는 다른 별을 찾아낸다. 별의 밝기가 흐려지면 별의 앞쪽을 위성이 통과하고 있다. 모형이 있으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존재의 원형은 어떤 둘이 대칭되어 위와 같은 모양으로 한 세트를 이룬 것이다. 안에 갇힌 둘은 양자다. 양자를 둘러싼 껍질은 공간의 흐름이다. 공간은 죽어있지 않다. 살아서 요동쳐 흐른다. 그러면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존재의 껍질을 이룬다. 물질은 요동치는 공간에 달팽이처럼 깃들인다. 존재와 무의 차이는 반응하느냐다. 내부에 대칭이 없으면 반응하지 않으므로 자기 존재를 외부에 나타낼 수 없다. 우리가 공기 속에서 공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진공은 반응하지 않는다. 진공이 우리에게 반응하지 않을 뿐 특수한 조건에서는 반응할 수 있다. 진공 속을 물질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사실에서 이미 반응한 것일 수 있다. 진공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물질의 껍질이 있다. 텅 빈 극장에는 무엇이 있는가? 스크린이 있다. 스크린은 영상과 반응하여 영화의 존재를 드러나게 한다. 진공 속에는 양자와 반응하여 물질로 연출되게 하는 존재의 껍질이 있다. 매우 요동치고 있다.
존재는 의사결정을 통해 자기존재를 유지한다. 의사결정은 외력의 작용에 반응하는 것이다. 반응하려면 반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축과 대칭으로 이루어진다. 질을 에너지로 때리면 입자가 된다. 질은 껍질이 바깥에 있고, 입자는 축이 내부에 있다. 질은 바깥에 있는 결혼식의 하객들이 껍질이 되고, 입자는 안에 있는 부부의 아기가 축이 된다. 질은 외적으로 잡힌 모형이며 입자는 내적으로 잡힌 모형이다.
힘은 입자가 외력을 처리하는 모습이다. 모든 존재는 실상 질의 존재이며 입자와 힘과 운동과 량은 질이 일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연출하는 모습이다. 그 과정에서 힘은 상부구조를 하부구조로 복제한다.
힘이 공간의 복제라면 운동은 시간의 복제다. 공간의 복제는 상부구조에서 일어나고 시간의 복제는 하부구조에서 일어난다. 공간은 쪼개지지만 시간은 합쳐진다. 눌린 용수철에 힘이 비축되는 것과 같다. 전략은 공간의 대칭으로 쪼개고 시간의 대칭으로 합치는 것이다. 적을 쪼개고 나를 합치면 이긴다. 적은 공간에서 집적거리면 쪼개지고 나는 시간에서 연결하면 합친다. 시간을 합쳐 세상을 들어올리는 거대한 지렛대를 만들 수 있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1회의 에너지 처리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모형 중에서 질이 원본이며 나머지는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복제의 과정들이다. 사건은 질에서 촉발하여 또다른 질로 옮겨간다. 그 과정에서 입자와 힘과 운동과 양을 거치며 사건을 종결시킨다. 사건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던져진 주사위는 힘을 잃고 작동을 멈춘다. 존재는 살아있다. 질에서 싹이 트고 양으로 죽는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입체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찰나에 수십억번 살았다가 죽는다. 양자세계에서 관측되는 존재의 생과 사는 거시세계에도 얼마든지 있다. 바다에서 거대한 태풍이 만들어졌다가 소멸한다. 국가도 일어나고 망하며, 유행도 일어나고 사라지며, 삶도 일어나고 죽는다. 존재는 부단한 의사결정들의 집합이다. 우리는 훈련된 채 익숙한 행동을 반복하다가 낯선 세계로 진입할 때 당황하게 된다. 그때는 선배의 도움도 없이, 부모의 안내도 없이 혼자 버려진 아이다.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 처음 이성을 사귈 때, 처음 직장을 구할 때, 처음 발견이나 발명을 할 때, 창의적인 예술활동을 할 때,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처럼 경험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하다. 그 순간, 그 현장에서는 적극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한다. 그런 때 존재의 원형인 질의 모형을 깨우쳐야 한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입자, 힘, 운동, 양의 모형으로 갈아타게 된다. 핵심은 질이다. 질은 대립된 여야가 국민에 의해 둘러싸여 껍질을 이룬 모습이다. 내부는 대칭을 이루어야 하며 외부는 껍질로 둘러싸야 한다. 정치는 국민이 껍질이 되고, 사랑은 무드가 껍질이 되고, 결혼은 하객이 껍질이 되고, 씨앗은 흙이 껍질이 되고, 아기는 자궁이 껍질이 된다. 모든 태어나는 것, 모든 처음 시작하는 것, 모든 새로 만나는 것, 처음 어떤 일을 벌이는 것, 발견하고 발명하며 창의하고 예술하는 것은 반드시 그 외부를 둘러싼 껍질로부터 에너지를 조달한다. 껍질이 없으면 달려서 껍질을 만들어야 한다. 바람 속을 달리면 바람이 껍질이 되어 에너지를 제공한다. 물 속을 헤엄치면 물이 껍질이 되어 에너지를 조달한다. 비전을 제시하면 민중이 껍질이 되어 에너지를 조달한다. 에너지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다. 다만 그대의 달려가는 속도가 부족할 뿐이다. 언제라도 그러하다. 진공을 광속으로 세게 때리면 물질이 만들어진다. 민중을 열받게 하면 변혁은 일어난다.
입자는 시공간을 멈춘 고정된 모습이다. 시공간은 멈추지 않으므로 이는 스크린에 비친 상에 불과하다. 죽은 시공간이 아닌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시공간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것을 모든 사유의 원형으로 삼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