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란 무엇인가? 구조론적 관점으로 보자. 구조론은 겉으로 표방하여 내거는 깃발을 버리고 핵심을 본다. 핵심은 의사결정원리다. 유교가 강조하는 것은 ‘인의’다. 인이 뭐냐고 물으니 공자는 사랑이라고 했다. ‘樊遲問仁 子曰愛人’ 석가의 자비나 예수의 사랑과 같다. 인을 사회화 하면 의다. 인의는 보편적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 뭐지? 아무런 뜻도 없다. 사랑은 포지션일 뿐이다. 사랑하는 방법은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미성년자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성숙한 자의 포지션이다. 뭐든 가르침을 받으면 성숙해지고 그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공자든 예수든 석가든 사랑을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가르침과 그에 따른 성숙함과 그 실천으로서의 사랑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의사결정원리로 본다.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이다. 의사결정은 이 중에서 세 번째다. 존엄과 자유는 의사결정권의 획득이다. 사랑하고자 해도 노예에게는 권한이 없다. 노예가 주제넘게 마님을 사랑했다가는 그 후과가 어떠하겠는가? 존엄과 자유를 얻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다되는게 아니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면 성취되고 행복은 결과다. 무엇인가? 공자가 사랑을 가르쳤다는둥, 예수가 사랑을 가르쳤다는둥, 석가가 사랑을 가르쳤다는둥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 필요없다. 무엇을 가르치든 배워서 내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사랑이다. 배운 사람만이 의사결정할 수 있다. 타자와 마찰하지 않고 타인의 운명에 개입하여 의사결정하는 것이 사랑이다. 배우지 못한 자가 함부로 타인의 운명에 개입하여 의사결정하면 본의아니게 상대를 해치게 된다. 그렇다면? 차이는 의사결정방식의 차이다. 공산당식 만장일치냐, 미국식 다수결이냐, 푸틴의 포고령이냐다. 여기서 공자와 예수와 석가의 가는 길이 갈린다. 유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화 되는 중핵은 스승과 제자가 긴밀한 관계를 맺는데 있다. 사제관계는 교우관계와 동료관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통섭한다. 반면 석가는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했다. 개인의 의사결정능력 역시 중요하다. 남 눈치볼 것 없이 내가 옳다고 여기면 곧장 그 길로 가라고 석가는 가르쳤다. 예수는 양치기에 비유했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사제관계와 다르다. 사제관계가 일대일 관계, 혹은 형제관계에 준하는 소수의 긴밀한 관계라면 기독교는 백만명씩 모아놓고 설교하는 TV목사도 있을 정도로 '일대다'의 관계다. '일대일'이 아니다. 심방이라고 해서 목사가 가정집을 찾는데 이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의 특성이지 싶다. 기독교의 목자와 양떼관계는 소대장과 부하들의 관계와 같다. 목자가 양떼의 운명을 지배하듯이 소대장은 부하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점에서 제자를 동생으로 보는 유교와는 긴밀한 정도가 다르다. 물론 유교에도 스승을 형이 아니라 소대장으로 모시는 일탈이 있다. 이는 한국에 와서 비뚤어진 것이다. 불교도 한국과 중국의 대승불교는 팀을 강조한다는 점이 유교영향임을 알 수 있다. 사제관계보다 위대한 것은 결혼관계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결혼제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발명이 공자의 사제관계다. 물론 사제관계는 부부관계를 연역한 것이다. 동료관계와 교우관계로 널리 복제된다. 중국이라면 꽌시가 된다. 원래 부족민은 결혼과 같은 해괴한 짓을 하지 않았다. 남녀가 한 방에서 생활하다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징그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물론 부족민 관점에서다. 현대인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으로 보면 참으로 기이한 관습이다. 누가 처음 결혼을 발명했는지는 몰라도 빅히트 상품이 되었다. 인류의 거의 모든 것이 결혼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받아들이고 국가로 가를 확장하는 것이 그러하다. 관계가 복제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가의 대표자로서 의사결정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힘든 모험이다. 아프리카 일부에서는 10살이 되면 자녀를 버리는데 이는 호주의 애보리진도 마찬가지다. 열 살이 넘으면 엄마와 한 건물 안에서 자지 않는다. 부족민에게는 가족 외에 남자그룹과 여자그룹이라는게 별도로 있다. 중국 일부에는 여자들만이 쓰는 문자도 있었을 정도다. 남미의 부족민도 비슷하게 자녀를 죽이거나 버리는 관습이 있다. 물론 모든 부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게르만족은 기특하게도 좀 키워서 15살에 버린다. 북쪽의 날씨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랑도는 신기한게 16살이나 되어야 추방하는데 게르만족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다. 결혼제도가 보급되면서 자녀를 먹거나 내다버리지 않는 기특한 관습이 생겨났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해 치우는게 보통이었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은 적대부족이 하나씩 있어서 만나는대로 죽인다. 백인이 보호구역을 만들어 인디언 땅을 빼앗을 때 써먹은 구실이 인디언의 살해관습이었다. 흉년에는 서로 자녀를 바꿔서 잡아먹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중국 기록에 빈번하다. 며느리 잡아먹는건 기본이다. 한국의 데릴사위제는 보다 안전한 제도이다. 먹힐 위험이 적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손순의 돌종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경우는 근래까지 영아살해 관습이 있었다. 결혼제도의 정착으로 사람이 사람을 먹지 않는 위대한 진보가 일어난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사제관계-동료관계-교우관계다. 제자弟子라면 동생인데 가족이므로 잡아먹지 않겠다는 보증이 된다. 같은 문하의 제자들 역시 가족이 된다. 결혼관계의 확장판이다. 결론은 관계다. 강정호 다리 부숴놓듯이 하는건 유교가 아니다. 박병호의 배트 플립을 용인하는게 유교다. 가족이므로 관대하다는 말이다. 유교는 교육을 통해서 모르는 타인과 가족에 도달한다. 지식인 중심의 팀플레이를 할 수 있느냐가 유교의 본질이다. 어쩌다 일본영화 ‘심야식당’ 앞부분 일부를 봤는데, ‘애미 애비도 없다는 니이가타 출신.’ <- 이런 표현이 등장하더라. 니이가타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온 젊은 사람이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만 있다는 설정인데, 그 할머니와도 사이가 틀어지는 듯 했다. 뒷부분을 안봐서 모르겠다만 이로 미루어보아 일본인들은 근래까지 굉장히 미개한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녀를 버리는게 당연한 거다. 예수는 무단가출했고, 석가는 아버지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다. 결혼관계나 사제관계, 교우관계, 동료관계는 굉장한 진보다. 유태인들 특유의 결속력만 해도 뭔가 있는 거다. 그런게 절대 그냥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양과 기업문화가 다른게 유교영향이다. 근래 유교권의 발전은 집단적 의사결정을 더 잘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폐해도 크다. 집단에 책임을 미루는 개인의 책임회피가 유교권의 고질병이다. 개인의 의사결정능력을 강조하는 석가로부터 배워야 한다. 지식인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 몰려다니지 좀 말라. 충효가 어떻고 하는 가르침의 내용은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 시대의 환경이 반영된 것이며 시대가 바뀌면 달라져야 한다. 중국사는 출발부터 서양사에 비해 기본 700년 이상 뒤떨어졌다. 그래서 그런 거다. 일본의 변발이나 중국의 전족만 봐도 알 수 있다. 도무지 기본이 안 된 거다. 이런 세세한 부분은 무시해야 한다. 본질은 팀이다. 기독교팀과 불교팀과 유교팀의 의사결정방식이 다르다. 기독교는 목사가 집회를 열어 결정하고, 불교는 스님이 토굴에 짱박혀서 기어나오지 않고, 유교는 스승과 제자가 좁은 공간에 모여 무릎 맞대고 결정한다. 장단점이 있지만 유교가 가장 긴밀하다. 핵가족 시대에 결혼제도의 단점도 부각되는 판인데 사제관계의 단점이 없을 리 없다. 일본이라면 회사가 개인의 사생활까지 지배한다든가 하는 식의 문제가 부각된다. 강자에게 비굴하기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걸려 있다. 배워서 겨우 아는 주제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므로 그러한 의사결정이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새로운 의사결정을 못한다. 공자를 배우면서도 공자의 과감한 의사결정을 본받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 부모가 자식을 내다버리지 않는다는 것, 남녀가 모르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 낯선 사람과 의기투합하여 뜻을 모은다는 것이 굉장한 인류의 진보라는 점이 각별하다. 그거 생각처럼 잘 안 된다. 봄이면 여자를 죽여서 강에 던져버리므로 하천마다 죽은 처녀가 줄줄이 떠내려 온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한국에 없고 일본에 있다. 그러한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봐야 문명이 진보하는 방향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가 끔찍하다고 여기는 분은 외국인 눈에 비치는 한국의 개고기 식용도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사람과의 의기투합 잘 안 된다. 도원결의 쉽지 않다. 친구간에 동업을 해도 깨지는게 보통이고, 돈을 빌려주면 떼이는게 보통이고, 고향친구라면 등쳐먹는게 보통인 세상이다. 쓰러진 사람은 못본척 하는게 당연하고, 자신을 구해준 은혜는 원수로 갚는게 보통이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중국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인간은 꽤나 진보했다. 그 진보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작은 차이로 보여도 실상은 크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하여' 모인다. 결혼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식이다. 틀렸다. 내 안의 넘치는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랑의 호흡을 이어가기 위해 파트너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자기 안에 사랑이 그릇가득 흘러넘쳐야 한다. 상대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렇게 이유대고 사랑한다면 틀렸다. 자기 안에 존엄과 자유가 넘치게 갖추어지면 손에 쥐어진 총을 어떻든 격발하고 말듯이 사랑을 격발하고야 마는 것이, 노름꾼의 손에 들어온 패와 같아서, 경위를 따져보기도 전에 일단 패부터 돌리고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유교라는 것은 총을 갖추는 것이지 그 총으로 누구를 겨냥하라는 것이 아니다. 존엄이 없고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유교는 존엄에 방점을 찍고, 불교는 자유에 방점을 찍고, 기독교는 사랑에 방점을 찍는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입으로 사랑을 떠들 뿐 본인이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가 있지 않다. 먼저 존엄에 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존엄과 자유를 거치지 않은 사랑은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겁니다. 노예가 주인을 짝사랑해봤자 실패입니다. 공자에게서 존엄트레이닝을 받고, 석가에게서 자유트레이닝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예수에게서 사랑트레이닝을 받고, 잡스에게서 성취 트레이닝을, 마지막 천상병의 행복트레이닝을 받으면 하산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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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여기에 끼일 짬밥이 아닐텐데요.
구조론적으로 어떤 사상이 질, 입자, 힘으로 전개되어
밑으로 갈수록 망가져서 결국 쓸모없게 됩니다.
그게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
그러므로 남의 생각을 취할 때는 질을 취하고 입자를 버리며
공자를 취하고 맹자를 버리며,
맹자를 취하고 주자를 버리며
공자와 맹자와 주자를 취하고 삼강오륜 따위 싸그리 다 버리며
예수를 취하고 바울을 버리며
바울을 취하고 베드로를 버리며
신을 취하고 예수를 버리고
예수를 취하고 성경을 버리며
마르크스의 이상을 취하고 방법론을 버리며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멸치똥들은 버리는게 정상입니다.
우리 사회의 근간인 유불기 세 종교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하신 부분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어 스승님 태클은 아니고요.
제가 작년 여름 즈음에 맹자라는 책을 자그마치 십여장을 읽다 말았는데요 서문에 기억하기로
공자가 仁을 주장하였고 맹자가 거기에 義를 추가하여 맹자가 인의를 주장하였다 하더라고요.
해서 그 당시 생각하기를 공자보단 맹자가 구조론과 가까운 인물아닌가.
맹자가 좀 날카로와보이고 구조론과 가까운건가? 요런 생각을 한것이 기억이 나서요.
다만 부분적 체계를 스스로 정리함에 있어서 혼동이 되어 여쭤보는겁니다.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구조론사이트 스승님에 의해서 공자와 맹자가 몇번 언급된것을 기억하는데 제가 생각했던것과는 달리 맹자가 구조론에서 몇 번 까였던 기억도 있고요^^;
뭐 기억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