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 내용을 추가한 글입니다. 복습이라 치고 두 번 읽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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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손으로 끌 수 있다. 인간의 손이 촛불과 직접 접촉한다. 반면 전등을 끄려면 별도로 스위치를 찾아야 한다. 이때 인간은 전기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인간은 눈, 귀, 코, 입, 피부의 접촉을 통해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세상의 많은 것들은 인간이 직접 접촉할 수 없는 곳에 있다. 타인의 겉모습은 시각적 접촉으로 알 수 있으나 속마음은 접촉할 수 없다. 접촉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의사결정 메커니즘으로 안다. 자연의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을 쓴다. 대칭의 작동에는 방향과 순서가 있다. 그 모형을 복제해서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향과 순서로 안다. 결정한 다음 실행한다. 여기에 정해진 방향과 순서가 있다. 이것이 메커니즘이다. 마음이 결정하면 몸이 실행한다. 우리는 몸의 실행과 접촉할 뿐 마음의 결정은 접촉할 수 없다. 그러나 결정과 실행 사이에는 정해진 방향과 순서가 있으므로 추론하여 숨은 마음의 결정을 알아낼 수 있다.
◎ 몸의 실행은 눈으로 보고 안다. 자연의 모든 것은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의사결정원리를 깨달아야 한다. 의사결정은 2층에서 1층으로 떨어지는 형태로 일어난다. 1층 위에 2층이 있다. 인간의 직접적인 관측이 닿지 않는 높은 세계가 있다. 몸이 1층의 실행이라면 마음은 2층의 결정이다. 전구가 1층이면 스위치는 2층이다.
◎ 실행하는 1층은 정보로 조직된다. 2층에는 모형이 있다. 모형은 대칭을 내장하고 있다. 2층을 보는 능력, 모형을 보는 능력, 방향과 순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는 능력, 의사결정원리를 보는 능력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훈련되어야 한다. 그냥 눈으로 보면 1층이 보인다. 의도적으로 2층을 보려고 해야 2층이 보인다.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있다. 2층이 있다. 모형이 있다. 메커니즘이 있다.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계가 있고 계 내부에 대칭이 작동하고 있다. 대칭이 움직여 방향과 순서를 생산한다. 우리는 1층에서 관측한 방향과 순서의 데이터로 2층의 모형을 추론해내고 그 구조를 복제하여 검증한다. 2층의 모형은 단단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으로 되어 있다. 개체가 아니라 팀의 형태로 되어 있다.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속적인 사건으로 되어 있다. 의사결정을 중심으로 닫힌계 속을 에너지가 관통하며 방향과 순서를 성립시킨다. 언제라도 답은 2층에 있다. 깨달을 일이다.
◎ 일층 위에 이층 있다. 반대로 결정하는 2층 밑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1층이 있다. 머리 뒤에 꼬리가 있다. 대장 뒤에는 졸개가 있다. 항상 뒤에 뭔가 있다. 여기서 방향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건 안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므로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문을 닫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그것이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상대성과 절대성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문을 닫아놓고 보면 언제나 절대성만 있고 상대성은 없다. 문을 닫으면 의사결정 메커니즘의 방향과 순서가 보인다. 대칭이 작동하는 모습이 파악된다. 모든 상대성은 사건 밖에서 관측한 즉 관점의 오류다. 절대적 상대성은 없다. 촛불은 손으로 끌 수 있지만, 입으로 불어도 꺼지고, 물을 끼얹어도 꺼진다. 그런데 외부를 차단시키면 촛불은 어떻게 꺼지는가? 그 초가 다 타야 꺼진다. 외부에서의 교란요인을 완벽하게 차단했을 때 2층과 1층이 구분된다. 2층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은 양초 자체의 결정방법이다. 인간의 행동은 남이 태클을 걸어서 밖에서 결정할 수 있지만, 마음은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 자체의 결이 보인다. 방해받지 않았을 때 이때 인간 자체의 순수한 본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절대적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닫힌 계를 설정하여 외부 환경의 간섭을 차단하면 구조가 드러난다. 작은 강물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상대성을 나타내지만, 큰 바다는 흔들림이 없으므로 절대성을 드러낸다. 진리는 바로 그곳에 있다.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2층에 진리가 있다. 내부의 대칭을 쓰므로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2층이 절대성이면 외부의 간섭을 받는 1층은 상대성의 세계다.
◎ 이층 밑에 일층 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과정도 탐구대상이 된다. 2층의 원인과 1층의 결과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있다.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의사결정을 더해서 다섯 포지션이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 원인 뒤에 결과 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다.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이라 햇다. 숫자가 아닌 모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너지의 일의성에서 입자의 대칭성이 나온다. 입자의 대칭성에서 공간의 비대칭성이 나온다. 비대칭이 공간의 방향을 정하면 반복성이 시간의 순서를 정한다. ‘에너지≫물질≫공간≫시간≫정보’ 순이다. 에너지는 불확정성을 내포하는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입자는 대칭성을 가져 2로 관측되고, 공간은 입자의 대칭을 틀므로 좌우대칭에 축을 더해 3으로 관측된다. 시간은 대칭의 반복적인 작동으로 관측된다. 정보는 이 구조가 깨져야 관측된다. 대칭은 균형으로 나타나고, 대칭이 깨지면 계가 해체된다. 대칭이 움직여서 깨지는 과정은 힘으로 나타나고, 그러다가 수습되면 운동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면 깨진 것을 본 것이다. 달리는 자동차가 멈추어야 살펴볼 수 있다. 깨진 것이므로 가짜를 본 것이다. 무엇을 보든 깨지고 난 다음 찌꺼기를 본 것이므로 추론이라는 복원과정을 거쳐야 한다. 눈으로 본 것은 믿을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귀로 들은 것은 더욱 믿을 수 없다. 본 것도 들은 것도 믿을 수 없으므로 깨달아야 한다. 감추어진 2층의 내부를 알고자 한다면 말이다.
◎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의해 세상은 연결된다. 봤다면 깨져 있다. 깨지면 상대성이다. 이미 뒤틀려 있다. 진리에서 멀어졌다. 깨지지 않는 2층 내부의 절대성을 알고자 한다면 모형적 사고를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미 모형을 쓰고 있다. 그 모형은 틀린 모형이거나 조잡한 모형이다. 낮은 단계의 모형이다. 기독교에 창세기모형이 있고, 불교에 ‘고집멸도’ 사성제모형이 있다. 유교에 주역의 원형이정모형과 성리학의 사단칠정모형모형이 있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모형과, 근대과학의 원자론모형, 뉴턴의 결정론모형, 아인슈타인의 상대성모형이 있다. 양자모형이나 통일장모형도 알려져 있다. 모두 반쪽짜리 불완전한 모형이다. 실제로 자연에 있는 모형은 다섯 뿐이다. 공간의 입체, 각, 선, 점이 구조로 엮여 모형을 이루었다. 모형은 대칭을 쓴다. 우리는 주변의 사물에서 공간의 밀도와 입체와 각과 선과 점의 대칭을 관찰할 수 있다. 축에 두 날개가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이다.
◎ 저울모형 - 내부경쟁을 통해 스스로 진보한다. 사건은 포지션들을 연결한다.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연결하여 사건의 기승전결을 진행한다. 원인에서 결과까지 과정을 진행한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자연의 밀도모형, 입체모형, 각모형, 선모형, 점모형을 쓰고 있다. 각각 저울과 됫박과 콤파스와 자와 눈금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을 고급한 정치의 전략이나 전술로 써먹지 못한다. 천칭저울이 작동하는 모습을 눈으로 뻔히 보고서도 어떻게 대통령이 축을 이루어 여당과 야당을 천칭의 두 날개로 주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중미일러 사이에 낀 한국이 천칭저울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모른다. 한국이 어떻게 외교수완을 발휘해서 미일과 중러를 대칭시켜놓고, 그 천칭저울의 축을 움직여서 일의성의 2층으로 올라서야 하는지를 그들은 모른다. 피상적 관찰로는 안 되고 보다 심도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의사결정은 언제나 2층에서 일어나며 그 실행은 언제나 1층에서 집행된다. 저울이 2층이면 됫박은 1층이다, 됫박이 2층이면 콤파스는 1층이다. 콤파스가 2층이면 자는 1층이다. 자가 2층일 때 눈금은 1층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2층에서 1층으로 의사결정의 화살을 쏜다. 이 순서를 알아야 계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2층은 대칭을 극복하는 일의성이다. 그러므로 승부사는 좌우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진 입체적인 인물 캐릭터를 가져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장악해야 한다. 박근혜의 국정교과서처럼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망한다. 저울의 축에서 좌우의 날개로 포지션을 옮기는 순간 망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망한다.
◎ 사물 위에 구조 있다. 어떻게 존엄을 축으로 삼아 행복을 조정하는지, 어떻게 관점을 축으로 삼아 사실을 조정하는지, 어떻게 의미를 축으로 삼아 성공을 컨트롤하는지, 또 어떻게 복제를 축으로 삼아 노력을 조율하는지, 또 어떻게 구조를 축으로 삼아 사물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언제나 2층으로 1층을 해결할 수 있을 뿐 그 역은 없다. 2층과 1층의 관계로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단 거기에는 충분한 시간과 적당한 크기의 공간이 요구된다. 그 시간과 공간의 고저장단을 조율하는 데서 적당한 정도의 감각을 익히는 것이 예술이다. 저울을 이해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풀린다. 단 저울에 에너지의 밀도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계에 중력이 걸려 있다. 가속도가 걸려 있다. 가만 두면 보이지 않지만 대상을 움직이려고 하면 그것이 불쑥 나타난다. 각자의 가슴 속에 저울 하나 품을 일이다. 깨달음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든 죽은 것을 보는 것이며, 살아있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거죽을 볼 뿐 뼈를 보지 못하며, 더욱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본다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뇌가 접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있다해도 이름이 없으므로 다시 떠올리지 못합니다. 대칭이 작동하는 의사결정 모형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깨달으려고 해야 메커니즘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