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한 번 들으면 모르겠고, 두 번 들으면 알겠지만, 세번째 들으면 다시 자신이 모른다는걸 깨닫게 된다.” 나무위키로 ‘열역학’을 검색하면 첫 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구조론도 마찬가지다. 설명을 들으면 무릎을 치며 ‘아하 그렇구나’ 하지만 금방 본래상태로 되돌아간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볼 게 아니라 보는 구조 그 자체를 봐야 한다. 망원경부터 수리하라는 말이다. 안다는게 뭔지 생각하자. 사람들은 ‘경험한 것’을 안다고 여긴다. 처음 들으면 모르는 이유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 번 들으면 아는 이유는 기억을 뒤져 맞는 경험을 찾았기 때문이고, 세 번 들으면 다시 모르는 이유는 그렇게 경험으로 아는 것은 진짜로 아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리로 알아야 아는 것이다. 경험은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라.’ 하는 것과 같아서, 그게 글자라는건 아는데 정작 읽을 줄은 모른다. 구조론도 같다. 아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원리로 한 줄에 꿰어 일원론의 메커니즘으로 알아야 한다. 압도적으로 알아야 한다. 경운기를 타고 내리막길을 가면서 우회전을 하면 좌회전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헷갈리지만 경운기를 몰아본 사람은 안다. 구조론은 두 번 꼬여 있다. 엔진이 두 개다. 그래서 어렵다. 경운기는 조향클러치의 동력전달을 끊어 방향을 튼다. 내리막길에서는 중력이라는 엔진이 하나 더 있다. 트레일러에 짐을 실으면 내리막길에서 하중이 경운기를 밀어붙이는데 엔진브레이크가 걸리므로 그래도 가속되지 않는다. 내리막길에서 자동차의 기어를 중립에 놓으면 더 빨리 간다. 뒤에서 확 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리막길에서 경운기는 조향클러치를 끊는 반대쪽으로 꺾인다. 이렇게 말하면 더 헷갈릴 것이다. 주차장에서 후진을 못하는 사람에게 핸들을 이리 꺾어라 저리 꺾어라 하고 말해줘봤자 더 힘들 뿐이다.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 초보자는 내리막길에서 한 번쯤 경운기를 논두렁에 쳐박는다. 공업사에서 ‘데후’라는 ‘디퍼런셜 기어박스’를 부착하면 괜찮다. 문제는 엔진이 둘이라는 거다. 경운기 자체엔진과 내리막길에서 작동하는 중력엔진이 있다. 그래서 헷갈린다. 열역학은 엔진이 둘이다.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다. 위치에너지는 절대에너지고 운동에너지는 상대에너지다. 위치에너지는 꺼내 쓸 수 있고 운동에너지는 이미 쓰여지고 있다. 이미 쓰이고 있으므로 쓸 수 없다. 운동에너지를 쓰려면 특별한 조작을 가해야 한다. 쓰이고 있는 것을 쓰는 방법은 편승하는 것이다. 일은 에너지의 방향을 특정한다. 운동에너지는 이미 방향이 특정되어 있으므로 방향이 같을 때만 쓸 수 있다. 위치에너지는 언제든지 임의로 쓸 수 있다. 단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일은 공간을 소모한다. 그러므로 위치에너지는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다음에는 쓸 수 없다. 즉 거의 대부분 에너지는 쓸 수 없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에너지는 일 안에서 보존되지 않는다. 일 안에서 에너지는 열로 변하며 일을 못한다. 에너지를 일의 원인으로 정의한다면 열은 일을 할 수 없다. 열을 일로 변환하려면 조작을 가해야 하는데 거기에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수학적으로만 존재한다. 결론은 에너지에 대한 정의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는 본래 성격이 다르다. 구조론으로는 질에너지, 입자에너지, 힘에너지, 운동에너지, 량에너지로 볼 수 있다. 열은 운동에너지와 량에너지에 해당한다. 일 안에서 에너지는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량에너지로 바뀐다. 량에너지는 쓸 수 없고 쓰려면 조작을 질을 투입하고 운동을 복제해야 한다. 열로 물을 끓일 수는 있지만 식힐 수는 없다. 냉장고를 만들면 되지만 그 경우 외부에서 더 많은 열이 투입되어야 한다. 에너지가 일을 하는 능력이라면 열로 물을 끓일 수도 있고 식힐 수도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끓일 수만 있다. 열의 진행방향과 같은 경우에만 열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모순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건물을 때려부수는 회사가 있다면 일이 때려부수는 것이므로 일할수록 엔트로피가 감소된다. 이런 혼선은 용어를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용어를 엄격하게 쓰면 질에너지, 입자에너지, 힘에너지, 운동에너지, 량에너지로 구분해야 한다. 량에너지는 쓸 수 없다. 단 상대방의 일을 방해하는 용도로는 쓸 수 있다. 다된 밥에 재뿌리기로 쓸 수 있다. 역시 ‘쓴다’라는 용어 자체가 혼선을 빚는다. 이런건 언어학이 고민할 문제다. 운동에너지는 방향이 일치할 때만 쓸 수 있다. 방향을 일치시키려면 외부에 기관을 조직해야 한다. 계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닫힌계로 보면 안 맞는 이야기가 된다. 범선처럼 자전거에 돛을 달면 어떨까? 바다는 넓어서 지그재그 항해가 가능하지만 자전거로 좁은 도로를 지그재그로 달릴 수는 없다. 바람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으면 운동에너지를 쓸 수 없다. 이는 상대에너지라 하겠다. 질에너지는 어떤 경우에도 쓸 수 있다. 단 사용은 공간을 소비한다. 질은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서 밀도를 성립시킨 경우다. 척력이 발생하므로 에너지를 쓸 수 있지만 에너지 소모는 공간의 확대를 의미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너지의 사용이 공간을 소비한다는 의미가 된다. 무인도에 두 명이 있는데 두 명이 다 부자라면 돈이 있어도 쓸 수 없다. 즉 공간의 부재다. 돈으로 땅을 사려고 해도 무인도라서 땅이 없다. 홍콩에서는 집을 사려고 해도 집이 없다. 공간이 없으면 에너지는 사용할 수 없다. 질에너지가 공간을 조직하는 과정은 입자에너지와 힘에너지다. 운동에너지를 위치에너지로 바꿀 수 없다. 그게 가능한 듯이 착각되는 이유는 구조의 복제가능성 때문이다. 구조의 공간은 하나만 조직해도 반복해서 쓸 수 있다. 무인도의 두 부자 중에서 한 명이 100평의 땅을 마련하여 판다. 상대방은 다시 이를 되판다. 이 과정을 무한반복하면 된다. 우주는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여러형태로 변하므로 막연하다. 오해하기 딱 좋다. 우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 있다. 건드리면 기어나온다. 나오면서 공간을 소비한다. 질에서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갈수록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여 공간을 고갈시킨다. 돌려막기 방법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듯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되돌릴 수 없다. 에너지는 모두 빅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빅뱅으로 되돌릴 수 없다. 에너지는 일을 하는 능력인데 일을 하면 공간이 소비되므로 일할 수 없다. 마찰이 없는 영구운동은 일처럼 보이지만 일은 아니다. 영구운동은 외부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상태로 정지해 있는 것이다. 운동에서 에너지를 빼먹을 수 없으며 가속에서만 에너지를 뺄 수 있다.
자연은 두 개의 엔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적이고 하나는 상대적입니다. 엔진이 둘이라서 헷갈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엔진이 하나입니다. 상대적 엔진은 엔진이 아닙니다. 운동에너지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빌린돈은 은행돈이지 내 돈이 아닌데 편의상 그냥 돈이라고 하는 거죠. 임차인이 사는 집은 내집이 아닌데 그냥 편의상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여기라고 하는 거죠. 내가 사는 집과 법적으로 내 소유인 집은 다른 거죠. 대부분의 오류는 언어를 엄격하게 정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문장이 길어집니다. 열역학에 대해서 세 번 들으면 다시 모르는 이유는 학자들이 언어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운동에너지라는 말은 폐기해야 합니다. 일은 공간의 소비입니다. 공간을 소비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
"압도적으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