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의사결정을 위한 근거이다.
역사나 과학, 경제, 사회적 데이터들은 모두 이를 위한
정보가 된다.
이러한 정보를 가장 잘 사용하는 분야가 경제와 군사분야인데
그 중 학문으로 잘 정립된 경제분야에서 정보의 개념을 빌려
좀더 살펴본다면,
경제에서 정보란 대개 재무정보를 말하는데 그 재무정보를
다루는 학문을 회계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회계학에서는
필연적으로 정보란 두가지 질적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신뢰성(다양성) vs 목적적합성(유용성)
이 두가지를 나누는 기준은 간단하다.
정보가 가공되었는가? 가공되지 않았는가?
즉 있는 그대로의 정보가 정보사용자에게 제공될 경우
이 정보는 신뢰성(다양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정보는 그만큼 광범위하므로
이를 그대로 의사결정에 사용하기엔 난점이 많다.
즉 목적적합성(유용성)이 떨어진다.
이와 반대로 정보가 정보제공자에 의해 취사선택된 경우
이 정보는 신뢰성(다양성)이 낮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보제공자에 의해 취사선택된 경우 정보란 이미 의사결정에
용이하게끔 취합되고 가공되어 있으므로 목적적합성(유용성)이
높아진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이 신뢰성과 목적적합성이 반비례관계
라는 점이다.
즉 신뢰성 있는 정보를 강조하다보면 목적적합성이 떨어지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두가지 정보의 질적특성이
결코 상충되는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신뢰성만 따진다면 내가 얻는 정보만이 가장 신뢰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주체가 개인으로 한정된 만큼 정보량이 부족하므로 크게
본다면 정보가 편중될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신뢰성의 하락으로 연결된다.
그에 반해 타인들을 통해 구전 혹은 책과 다양한 소통창구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면 일시적으로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므로 정보가 편중되는 것을 막아
그만큼 신뢰성의 회복으로 연결된다.
즉 목적적합성과 신뢰성은 상충의 관계라기 보다는 상보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자와 후자의 상황이 똑같은 신뢰성의 수준을 충족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1보다 2를 선택하듯 파이가 훨씬 큰 후자의 상황이
상호작용의 총량을 늘릴 수 있는 방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신뢰성의 회복을 위해 필연적으로 정보의 파이가
확장되어야하는 난맥이 있다.
즉 타인이 가공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그만큼 정보의 양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다는 건 이 경우에 단점이 된다.
왜냐하면 정보의 양이 증가한 만큼 그만큼 취사선택해야할 정보의 양
또한 증가하므로 본래의 목적인 의사결정에도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점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즉 이 단점이 생기는 지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점이란 바로 정보주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증가된 정보가 타인의 목적 혹은 관점에 의해 가공된 정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의사결정기준과 나의 의사결정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내 의사결정의 근거로서
목적적합성에 도움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정보의 신뢰성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해보자.
타인이 나와 같은 의사결정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말해 정보주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면?
그 타인이 제공하는 정보는 내가 수집하려는 정보와 그만큼 차이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즉 의사결정기준을 공유함으로써 정보의 신뢰성을 크게 높일
수 있고 또한 목적적합성 또한 크게 높일 수 있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가 상호작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보가 수반된다.
그렇다면 정보의 질적특성인 신뢰성과 목적적합성이 상호작용을 늘리는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같은 기준을 공유한다면 정보의 신뢰성도 높아지고
또한 목적적합성도 높일 수 있어 짧은 시간과 적은 노력으로도 효율적인
상호작용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다시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은 그렇다면 그 의사결정의 기준이란
것을 무엇으로 정하느냐하는 것이다.
즉 개인과 타인의 집합으로 새로운 정보주체인 집단이 등장함으로써
이 집단의 상호작용을 관장하는 이 상위차원의 의사결정이란 바야흐로
정치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의사결정의 기준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될 수 밖에 없고
그결과 보수와 진보라는 방향의 논쟁으로 회귀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역사 교과서문제는 정보의 신뢰성과 목적적합성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고 필연적으로 신뢰성과 목적적합성을 동반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정보주체인 집단이 지향하는 의사결정의 기준에 대한 논쟁으로
치환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교과서를 가지고 강용석과 이철희가 서로의 정치색을 가지고
논쟁하는 이러한 장면이 연출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열거한 이 전체의 틀을 빌려 역사교과서에 대한
강용석의 주장을 살펴본다면 어떨까?
강용석이 주장하는 바는 결국 다양성(신뢰성)이다.
즉 역사적 사실에 대해 좋은 점 나쁜 점을 있는 그대로 보이자는 말이다.
물론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양성(신뢰성)이지만 좀더 깊이 파보면
이미 확장되어 있는 정보주체의 틀 즉 집단을 무시한 말이 된다.
우리는 이미 개인 혼자만의 정보 수렵채취 단계를 지나 웹으로 대변되는
광활한 타인들의 정보를 취합해 의사결정에 사용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는 암묵적으로 타인과 내가 의사결정기준을 공유했다고 믿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각 분야마다 다르게 설정이 되지만 역사에 있어서 그 기준은 간단하다.
바로 국가이다.
즉 나와 타인이 속한 국가가 같다는 전제하에 역사는 서로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용석이 말하는 식민사관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깨뜨린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한국사람인데 일제시기에 대해 그렇게 평가할 수 있지?"
이 말은 바로 그 전제가 깨진데서 비롯되는 반응이 된다.
정보의 신뢰성과 목적적합성의 윈윈을 위해 공유하고 있던 의사결정
기준이 깨졌다면 우리가 속해있던 정보주체의 틀 역시 해체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상황은 간단해진다.
다시 정보의 주체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타인이 아닌 나로 한정되고
나라는 개별주체가 다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단계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그게 과연 현실적인 이야기인가?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되묻고 싶다.
아니 쉽게 바꿔 말해보자.
우리나라 모든 학생들이 교장이 선택한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가 선택한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가?
그 교과서에 맞는 역사선생을 선택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즉 역사사관에 다양성(신뢰성)에 대해 주장하고 싶다면
역사사관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다양성(신뢰성)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강용석이 말하는 식민사관은 부당한 것이 된다.
즉 선택의 권리가 없는 초중고생에게는 이러한 역사사관의 다양성은
결코 선택의 다양성으로 존중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모든 과목을 취사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대학생이라면?
가능하다. 식민사관 아니 동북공정을 교과서로 가르친다고 해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대학생에게는 사관의 다양성은 선택의 다양성으로 존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했던 원인인
연환계와 같다.
즉 우리는 얽혀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얽힌 매듭을 자르면 지금 이 논란은
해결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많은 병사들이 멀미하고 구토를 하며 전투
불능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강용석이 주장하는 이야기는 위나라의 육군이 아니라 오나라
수군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정보의 주체 하나 하나가 일당백에 해당되는 정보의 풀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러한 딜레마는 해결된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 결정할 수 있는 강한 개인이
성립되어야만 강용석의 이야기는 가능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적벽대전을 앞둔 이 나라가 과연
위나라인지
오나라인지 말이다.
너무 심플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