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이든, 인터넷 토론이든, 목욕탕 아줌마들의 수다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느 때라도 토론이 있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론이 다 같은 토론은 아닌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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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한정률' 차원에서 토론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차원에서 토론한다는 것은 토론이라기보단 말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이 담긴 데이터만 제시하면 금방 참과 거짓이 가려질 문제를 놓고 '맞다 혹은 맞지 않다'며 열을 내니까요. 하지만 어떤 때에는 이런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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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일상 대화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과율' 차원의 토론을 하는 듯 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무엇이고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옳다 혹은 옳지 않다'고 습관처럼 종종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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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토론을 잘 하신다는 분들은 주로 '모순율' 차원에서 토론을 하시죠. 어떤 명제가 있다면 그것의 부정이 동시에 참이 될 수는 없다는 전제가 있으므로, '가치 혹은 본질'이 '같다 혹은 다르다'는 이야기가 논의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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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자들의 토론은 대부분 '동일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듯 합니다. 모든 대상은 그 자체를 표상한 단어와 같다는 논리학상의 근본 요구에 따라 어떤 '개념'이 '있다 혹은 없다'를 '긍정설 혹은 부정설'등의 이름으로 논의하니까요. 이렇게 정리된 개념만이 동일률에 따라 계속 사용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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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뜻 보기에 가장 고차원적인 토론이 될 듯한 '배중률' 차원에서는 절대 토론이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참이니까요. 하나의 '원리'가 이미 참이고 '무엇이다'라면, 다른 원리는 이미 원리가 아닌 거짓인 '무엇이 아니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세계에서 에너지는 일반적으로(귀납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이론적으로) 두 번 반복하면 벌써 반복이 아닌 연속, 두 번 연속하면 벌써 연속이 아닌 가역, 두 번 가역하면 벌써 가역이 아닌 분할, 두 번 분할하면 벌써 분할이 아닌 순환... 이런 식으로 우리 두뇌에 인식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의 인식일 뿐이죠. 보편적으로(연역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앞의 이론을 뒤집어 논리로써 생각해야겠죠. 도올 선생님도 강의에서 종종 설명하시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순환 단계에서 반복 단계로 에너지가 전달될 뿐입니다.(저는 세부 그림을 그릴 정도로 이해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의 틀은 이렇게 잡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반복, 연속, 가역, 분할, 순환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지적해 주시구요.)
명제는 한정률->인과율->모순율->동일률->배중률의 순서로도 우리 머리속에서 얼마든지 고찰될 수 있지만, 토론은 자연의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명제(생명, 인권, 사랑 등)에 대하여 배중률 차원에서 갈라져 있다면 상호간에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는거죠.
다들 같은 나라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인데... 대통령과 국민간, 여당과 야당간, 부자와 빈자간... 이들 사이에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는 듯 합니다. 어쩌면 이들 사이에 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배중률 차원의 심각한 갈림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하버마스의 공론장은 아직도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드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입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끄적거려 봤습니다.^^;
요즘 포천에서 저녁마다 라디오 토론 듣다보니 많은 토론이 현재의 원인(도입하는 제도의 1안 2안, 절충안)과
미래의 결과(나아짐, 나빠짐, 현상유지)가지고 싸우더이다.
그리고 사실문제를 따질 때도 야구에서 결과(양?)인 승패를 가지고 따지면
쉽지만, 투수와 타자의 능력을 따질 때는 다양한 잣대가 존재하고...
예를 들면 추신수가 낫냐, 이치로가 낫냐할 때
(타율?,출루율?, 장타율?,,몇가지를 합산한opp? 통산타율?, 상반기 기준? 이번달 기준?)으로 충돌하고..
하긴 추신수도 작년 하반기와 올해 상반기 실력으로 하면 당근 올스타인데...
토론에서 진정성 자체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너무 많고,
말씀하신대로 사실 자체를 확정하는 문제가지고 7~80%가 소요되더이다.
맞은 것(사실)을 맞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에 토론은 더 힘들고...
토론을 보는 사람들의 수준이 올라가면,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이 이익보다 이상을 우선할 때(이상이 나중에는 더 큰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때)
토론이 의미가 있고,
토론할 일도 줄어들고,
토론의 질적 수준도 높아지겠죠.
배중률 차원의 심각한 엇갈림이 있으나 한쪽은 그것을 속이고 있지요.
이미 진정성이라곤 전혀 없는 뻔한 속임수나 주먹을 내밀어 보이는 상대와 토론을 할 수가 없지요.
토론하려 들면 들수록 대꾸하면 할수록 상대의 존재만 확인시켜줍니다.
지식인 기득권을 가장한 깡패와 토론할 수가 없습니다.
한정률,인과율에 일부러 묶어놓고 지리한 헷갈림을 유도하며
모순율로 진전되는 것조차 거짓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토론으로 상대방을 꺾으려들거나 승부를 내거나 하는건 불가능이오.
우리는 우리끼리 토론하고
저쪽은 저쪽끼리 토론하고
따로 토론해서 시청률로 결판내는게 좋겠소.
'우'는 전혀 토론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고,
(쪼인트 까면 되고, '반듯'하면 되니까)
'좌'또한 그놈의 정통성과 서열관계로 묶여있어서 토론이 안되고,
인터넷 세력만이 토론이 가능한데, 토론의 언어가 통일될 필요가 있죠.
인터넷 도량형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는 뜻.
제쪽에서, 수학으로 예를 들면, 내용이 많은 사이트보다는,
건조하게 현상을 분석하는 사이트에 관심...이 감.
http://mathworld.wolfram.com/
싸움은 싸움, 겨룸은 겨룸이지요.
이해찬과 유시민의 겨룸은 가능해도,
유시민과 정동영의 겨룸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이었죠.
싸움을 겨룸이라고 우기고 지지하라 땡깡을 부려도 땡깡일 뿐,
싸울 넘들과는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토론하는 세력이 대세를 장악해야 토론이 성립하지요.
뭉둥이로 일이 된다면 구지 말로 하지 않는 넘들이 있습니다.
넘들 세상이 열렸으니, 토론은 물건너 간거지요.
토론과 전쟁은 구분되어야 함.
전쟁에서는 이겨야 함.
상대에게 말려들지 않기.
상대의 수를 읽고 허를 치는 전략.
정면승부가 가능하게끔 힘과 세력을 확충하기.
배중률의 단계까지 가려면, 상대방과의 '반사놀이'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명제에 대해서 '완전성'을 가질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토론의 목적은 의견의 절충에 있는게 아니라,
각의견의 '극한'에 가보는 일에 해당합니다. (김동렬님의 옛글 '극한'에서 참조)
수학에서 극한의 법칙으로 복잡한 주기 함수 (periodic function) 들이 간단해지거나,
sine, cosine, tangent 함수로 귀결된다는 것을 봐도 알수 있습니다.
특히 Fourier series 와 같은 경우는, 어떤 주어진 함수도, 위의 sine 과 cosine 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음을 밝히고 있고, 현대의 컴퓨터의 이미지 변환, 파일 압축, 시그널 프로세싱등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복잡을 간단화시키는 과정이 토론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