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 이전에 ‘힘’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팔뚝의 힘, 마차의 힘, 바람의 힘은 있어도 그냥 힘은 없었다. 뉴턴이 처음으로 힘이 다른 어떤 것에 빌붙어 있지 않고 자기 법칙대로 가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간파했다.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힘 안에 질량과 가속도라는 식구가 세들어 있다. 세 식구 사이에 일정한 질서가 있다. 힘은 팔뚝이나 마차나 바람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식구들인 질량과 가속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통제된다는 거다. 바깥의 팔뚝이나 마차나 바람은 제멋대로여서 종잡을 수 없다. 반면 안쪽의 질량과 가속도는 확실히 파악된다. 왜? 갇혀있으니까. 고삐에 묶인 소와 같고 재갈을 물린 말과 같다. 이에 인류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 길로 곧장 갔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단지 시선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바깥의 팔뚝이나 마차나 바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 안쪽의 질량과 가속도를 살핀 것이다. 단지 고개를 살짝 돌렸을 뿐인데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다. 구조는 안쪽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동차의 구조, 건축의 구조, 인체의 구조는 알아도 그냥 구조는 모른다. 아무도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뉴턴이 힘을 독립시켜 보았듯이,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 구조가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자임을 알아챌 때 위대한 인식의 혁명은 일어난다. 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마 위의 생선과 같고 독 안의 쥐와 같다. 요리할 수 있다. 체포할 수 있다. 구조는 만유가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붙잡아놓고 통제할 수 있다. 그 안에 핸들과 브레이크가 갖추어져 있다.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엄청난 자신감을 얻는다. 구조 안에 축과 대칭이라는 식구가 세들어 있다. 바깥의 자동차나 건축이나 인체가 아니라 안쪽의 축과 대칭을 살펴보라. 어렵지 않다. 단지 고개를 살짝 틀어주면 된다. 바깥이 아닌 안쪽을 보면 된다. 인식의 비약은 일어난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마찬가지다. 내부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질서가 있다. 그러나 인류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 수요와 공급, 소통과 고립처럼 둘씩 짝지어진 상대개념으로 본다. 이는 뉴턴 이전에 힘의 존재를 몰라서 팔뚝을 논하고, 바람을 논하고, 마차를 논했던 것과 같다. 힘이 질량과 가속도를 양 손에 틀어쥐었듯이, 어떤 대칭된 것에는 반드시 둘을 통제하는 제 3의 포지션이 있다. 소실점이 원경과 근경을 틀어쥐듯이 고삐를 잡고, 재갈을 물리고 있다. 어떤 것이든 전체가 한 줄에 꿰어진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시야를 얻을 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내부에 시소가 있다. 질서가 있다. 에너지가 치고 나가는 결이 있다. 루트가 있다. 회로가 있다.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바로 그것을 포착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기수가 말을 다루듯이, 혹은 운전사가 핸들을 다루듯이 그 내부의 질서를 틀어쥠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조종할 수 있다. 제어할 수 있다. 조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길 수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 보는 방향부터 바꾸어야 한다. 안쪽을 볼 것인가 바깥을 볼 것인가? 절대성을 볼 것인가 상대성을 볼 것인가? 시소의 축을 볼 것인가 날개를 볼것인가? 내 안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방향판단이 문제해결의 첫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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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지하
내안의 질서가 존엄이고, 방향성이 자유입니다. 편안하고 묵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