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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002 vote 0 2008.12.30 (23:18:43)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다. 교육의 참된 의미는 고립되어 있는 개인의 능력을 보다 넓은 사회로 끌어내어 공동체의 집단지능과 연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류문명의 진보에 기여하게 하는데 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 educatio에서 유래한 말이다. 겉(e-)으로 당겨(-duc)서 재능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e-’는 끝(edge) 혹은 밖(exit), ‘duc-’는 밖으로 ‘당겨서 끌어낸다.’

파생어로는 앞(pro-)에서 이끄는 프로듀서(producer), 사물의 가치를 끌어내는 생산(production), 안(in-)으로 끌어들이는 설득하다(induce),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뒤(de-)로 당겨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는 연역법(deduc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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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아마를 단련시켜 프로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되 장비를 갖추고 오르느냐 아니면 아무런 준비 없이 맨손으로 기어오르느냐의 차이와 같다.

정상을 꿈꾼다면 장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은 장비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눈에 보이는 장비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비’도 구비되어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이 베테랑은 장비를 쓴다. 교과서로 전달되는 하드웨어 장비는 누구라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성교육으로 전해지는 소프트웨어 장비는 훈련된 베테랑만이 가질 수 있다.

오늘날 교육계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프로페셔널과 베테랑만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장비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다.

그림을 배운다면 연필로 긋고 붓으로 칠하는 기교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구상하는 단계부터 작품을 완성하고 난 다음 학부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단계까지 1 사이클로 이루어지는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해서는 같은 길을 열 번 갔어도 막상 핸들을 잡으면 길을 찾지 못한다. 내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면 길치가 아닌 이상 한 번 가본 곳은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전체과정을 체험한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와 그날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그 ‘이야기’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교육은 실패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으로 이어지는 1 사이클의 완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엄마 앞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중에서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제실행뿐이라는데 있다.

동기유발과 성과보상에 대해서는 평가가 불능이다. 평가가 가능한 부분만 수업하는 기술교육에서 벗어나 평가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훈련하는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참된 교육이 그것이다.

전인교육을 위해서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다. 교과서나 학교건물처럼 눈에 보이는 장비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비다. 체험과 노하우가 또한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교과서 위주의 하드웨어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문제는 창의력이라는 소프트웨어다. 경험부족에 노하우 빈곤이다. 인간의 창의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 번도 선두에 서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베테랑과 풋내기의 차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되는가? 내 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추어 있는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카더라’ 말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프로라면 누구나 그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경험 있는 베테랑들은 다들 그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여 두고 있다.

자유방임이든 스파르타식이든 알려진 교육방법들은 그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교보재나 참고서로 이루어진 하드웨어를 판매할 뿐 체험과 노하우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있는데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앞에 털어놓을 것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요하게 말하려고만 드는 아이가 제대로 배운 아이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이라는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 없으면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곧 소통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모든 분야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아채기다.

그것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이다. 교육은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문명과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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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대 이래 고등교육이 널리 보급된 선진국 중에서 다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예는 없다. 왜일까? 한 국가의 운명이 그 집단 전체가 가진 집단지능의 질적 수준에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힘으로 선진국이 된 예도 없다. 침략전쟁이나 매장자원의 발견 혹은 쿠데타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문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공동체의 집단지능 계발에 의해서만 진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든 식민지 지배를 당한 나라이든 어떻게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일시적 좌절을 딛고 재도약에 성공하고 있다.

이로써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의 최종목표는 공동체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함에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다. 한 사람의 지식은 전체 지구촌 인류문명의 일부로 기능할 때 한해서 유의미하다.

알려진 교육사상들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전히 계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없는 교육은 실패다. 내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미술수업을 받아 실력이 늘었다 해도 그 실력은 손가락을 운용하는 하드웨어 장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싶어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한 만큼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 소통의 한 단위가 되는 이야기는 완성된다.

욕망을 일으켜야 하고, 성과를 달성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한다. 욕망과 성과와 보상이 한 줄에 꿰어져야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요건이 구성된다. 그 이야기를 획득할 때 인류의 집단지능과 소통할 수 있다.

참된 교육은 과제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타인과 공유할 때 완성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기를 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말듯이 모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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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에서 몬테소리, 로웬펠드로 이어지는 교육계의 경향도 구호가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교육포기이기 쉽다. 요즘 유행하는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은 환경을 조성하고 자극을 가하면 저절로 된다는 식이다.

교육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 그 장비는 소통의 장비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친구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공동체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지 못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모든 교육학자가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기에서 보상까지 전체과정의 체험이 없으면 창발성은 유도되지 않는다. 자연의 진리에 기초한 완성형의 재현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면 장비는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진리≫완성형 포착≫모방과 재현≫전체과정의 체험≫이야기의 획득’이라는 과정을 거쳐 교육의 성과는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한다. 자연의 진리로부터 완성된 패턴을 끌어내는 과정을 안내하지 않으면 창발성 유도는 실패다.

교육(education)은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밖(e-)으로 끌어내는(-duc)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끌어내려면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연역의 장비다. 연역(deduction)과 교육(education)의 어근이 같다는 점에 주목하라.

연역은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이를 뒤(de-)로 당겨(duc) 개별적 사실에 적용한다. 연역하기 위해서는 일반명제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명제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찾아진다. 창발성은 그로부터 연역하여 유도된다.

창발성은 자연과 접촉하고 자연에서 뒹굴며 그 자연의 완성된 모습 안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서 얻어진다. 자연의 내부에 감추어진 이야기와 동조화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평범한 하나의 바위,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부는 바람, 누워있는 흙들도 다들 자기 내부에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는 ‘결’이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질 때 자연의 ‘결’을 포착할 수 있다.

자발성과 창의성은 교실에 가둬놓지 않고 막연히 들판에 풀어놓는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자연의 완성된 모델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 의해 포착되고 거기서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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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이야기를 준다. 이야기는 가치의 배달이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완전한 자연에서 왔고 이상적인 사회로 간다. 자연과 나와 사회를 가치라는 끈으로 이어주는 것이 이야기다.

창의력에 주목하는 교육이론가들이 많으나, 교육이 끌어내는 것이며, 끌어내야 할 것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사전에 세팅하고 장착해야 하는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모른다. 존 듀이 이래 강조되어 온 실용주의 한계이다.

합리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합리주의는 연역법이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경험하다 보면 우연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식이다.

우연히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도 있다. 직관력이 뛰어난 어린이는 자연에서 뒹구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패턴을 읽어내고 이를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는 방임할 경우 저절로 PC방에 가두어져 버린다.

교육은 우연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 엄격한 지도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어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하고 온갖 장난감을 던져주면 우연히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는 추측은 무책임하다.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자연은 감옥과 같다. 저절로 갇혀버린다. 시골의 단조로움과 무료함 속에 갇혀 버린다. 자연의 완전성에서 숨은 규칙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어린이들에게 도시는 감옥과 같다. 저절로 게임방에 갇혀버린다. 미술관에서 걸작을 본다 해도 그 안에 숨은 미학적 완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그 완전성과 공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이야기의 획득이다. 그것은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는 것이다. 그것을 갖출 때 공명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할 수 있고 미술관의 걸작과 교감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반하게 된다. 빨려들게 된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써먹고 싶어 하게 된다.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 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과 소통하게 된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을 거쳐 성과보상으로 진행되는 전체과정에 참여하는 데서 이야기는 획득된다.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으므로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게 될 때 베테랑이 되고 프로가 된다.

나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체과정을 체험할 때 나이테를 품듯이 어떤 일의 전체과정을 체험하고서야 내 안에 결을 품을 수 있다.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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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규칙성에서 패턴을 읽고 그 리듬감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할 때 인간은 전율한다. 긴장한다. 고조된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공명시킬 때 이완된다. 편안해진다. 보상된다.

인간의 행동은 긴장으로 촉발되고 이완으로 보상된다.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긴장이 동기유발이면 밸런스가 과제수행이고 릴렉스가 성과보상이다. 이 셋을 한 줄에 꿰어낼 때 내 안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옛 친구를 만날 때 반가움이 사무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긴장이다. 동기부여다. 집중한다. 마주앉아 허물없는 대화를 나눔이 밸런스다. 그럴 때 엄마 품의 아기처럼 편안하게 이완된다. 릴렉스다. 보상이다.

‘긴장, 동기부여 ≫ 밸런스, 과제수행 ≫ 릴렉스, 성과보상’

긴장과 집중에 의한 동기부여, 밸런스와 교감에 의한 과제수행, 릴렉스의 이완에 의한 성과보상이 한 줄에 꿰어져 행동의 1 사이클을 이룬다. 긴장의 출발점과 이완의 종결점이 다시 만나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이야기는 완성된다.

긴장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고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완은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고 몸이 뇌를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완할 수 있는가이다. 릴렉스하기 어렵다. 릴렉스는 밸런스를 거쳤을 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긴장은 병사들이 정렬하여 연단 위의 대장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완은 병사들이 넓은 연병장에 자유롭게 흩어져 있으면서도 대장의 통제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확실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병사와 대장의 교감에서 밸런스가 성립해야 온전히 릴렉스할 수 있다. 병사 1인에게 일어난 일이 대장의 참모부까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제대로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럴 때 릴렉스는 가능하다.

최고의 팀은 구성원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각자 최고의 기량을 펼치되, 주장과 팀원들 사이에 완벽한 교감이 이루어져 최고의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 도달해야 팀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다.

온전한 밸런스가 완전한 릴렉스를 유도한다. 밸런스 없는 릴렉스는 팀을 붕괴시킨다. 반대로 밸런스 없는 긴장은 팀을 경직시킨다. 몸이 굳어져서 팀원들 각자가 가진 최고의 기량을 펼쳐내지 못하게 한다.

완전한 집중의 정신차리기가 완벽한 교감의 밸런스를 끌어내고 완벽한 밸런스가 완전한 이완의 릴렉스를 끌어낼 때 그것이 곧 깨달음의 경지다. 내 안에 이러한 구조를 갖추는 것이 이야기의 획득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동그라미가 있어야 한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긴장과 소통과 이완의 1 사이클이 이루어지는 전체과정을 유기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콘텐츠를 가질 때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고 작가는 이야기를 가질 때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깨달음은 소통의 수단을 얻는 것이다. 자연과도 소통하고 진리와도 소통하고 역사와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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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장비의 획득이다. 자연의 진리와 인간의 문명을 연결하기 위해서 자연과 접속할 수 있는 모뎀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 성과보상으로 이어지는 행동의 1 사이클 구조를 완성해야 한다.

간절한 만남의 기쁨으로 벅차오른 만큼, 나의 전부로 상대의 전부를 끌어내는 막힘없는 대화로 서로를 불태우고 그럴 때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해지는 릴렉스로 가라앉히기가 이야기의 구성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는 학교 건물과 교과서와 수업으로 이루어진 정규교육의 시스템이다. 소프트웨어는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체험에 의해서 세팅되는 프로페셔널과 베테랑만의 노하우다.

루소와 듀이 이래 강조되는 묻지마 방임주의는 극소수의 재능있는 천재를 우연히 찾아낼 뿐 체계적인 교육이 아니다. 서머힐 스쿨을 비롯하여 한국에 유행하고 있는 대안학교들도 투입한 비용에 비해서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주입식교육의 단점을 소극적으로 보완할 뿐 넘어서지 못한다. 참된 교육은 떠먹여 주는 주입식교육도 아니고 내버려두는 방임식교육도 아니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소통의 교육이다.

소통의 교육이어야 한다. 교육은 내 안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소통으로 끌어내고 이야기로 끌어내고 완성으로 끌어내고 미학으로 끌어내고 깨달음으로 끌어낸다. 동기부여로 끌어내고 성과보상으로 끌어낸다.

한 명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바른 이해가 아니다. 거꾸로 다수의 범인이 세팅해 놓은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장비가 그 한 명의 천재가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천재는 천재가 속한 그룹의 집단지능에 의해 탄생된다. 토대가 부실하고 바탕이 척박하다면 천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 명의 영재를 가르쳐서는 어떻게 가르쳐도 천재가 되어주지를 않는다.

천재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료 열 명의 존재라는 좋은 환경을 조성해줄 때 천재는 탄생한다. 참된 교육은 천재가 숨 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열 명의 대등하게 소통하고 공유하는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큰 집을 짓듯이 일 층부터 차례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강변에서 모래성을 쌓듯이 단순한 단계에서 먼저 전체를 완성하고 난 다음 그 완성된 모델에 밀도를 채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등교육에서 중등, 고등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1층 위에 2층과 3층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본형의 내부에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밀도를 채워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이야기의 완성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완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 유도한 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문명으로 전송하는 본질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 집단지능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어학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유아 수준의 낮은 단계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전체과정을 완성하지 않은 채 알파벳과 단어학습의 높은 단계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1백 단어 안팎의 낮은 단계에서 ‘결’이 완성되어야 한다.

알파벳에서 단어≫문장≫문법 순으로 점차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되짚어야 한다. 교육은 밖에서 안으로 하나씩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일이 없다. 자연에서는 작은 하나의 씨앗 속에 배아형태로 미래의 완성형이 예비되어 있다. 씨앗 속에 완성된 나무의 모습이 숨어 있다. 유전자 지도 속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방법은 기술적으로 완성된 배아에 수분과 당분을 집어넣어 크기를 부풀려 겉으로 드러내기다. 어학교육도 이와 같다. 1백 단어만으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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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단어보다 문법을 먼저 배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익힌 다음 단어를 그 문법의 틀에 집어넣어 의미의 밀도를 높인다. 아기가 비록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했어도 맥락으로 보면 이미 문장을 말한 것이다.

자연에서는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아기는 전체를 먼저 배운다.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나 ‘엄마’ 한 마디로 타인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아기의 문법은 완성되어 있다.

단어 위에 문법이 있고 문법 위에 상황이 있다. 가장 큰 전체는 상황이고 가장 작은 부분은 단어다. 전체가 먼저이므로 아기는 먼저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논리 안에서 문법을 체득한다.

그러므로 상황에 빠뜨려 놓아야 진정한 학습이 된다. 외국인과 맞닥뜨리는 일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이 필요하다. 교육은 끌어내는 것인데 그 끌어낼 상황에 빠지지 않았으므로 끌어낼 수도 없으니 학습에 실패하는 것이다.

아기는 현장에서 본능적으로 상황논리를 파악하고 그 상황논리 안에서 스스로 문법을 끌어낸다. 그러나 교과서 교육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시뮬레이션이 없으므로 상황논리를 인식할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죽은 교육이다.

자연은 언제라도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포착되는 규칙성이다. 완성이 먼저다. 일반명제가 먼저다. 전체가 먼저다.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운다. 형식을 완성한 다음 밀도를 채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먼저고 소통이 먼저고 이야기가 먼저다. 생각을 조직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유발과 성과보상의 일 사이클로 먼저 이야기를 세팅해 놓고 그 안에 사유를 채워넣는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이에 전율하면서 그 완전성과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면 교육은 실패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과 리듬감을 읽는 능력이 없다면 실패다. 상황파악과 상황재현이 안되기 때문에 실패다.

인간의 그릇 크기는 애초에 그 지점에서 정해져 버린다. 감응하지 못하는 작은 그릇에 고등교육으로 밀도를 높인들 한계가 있다. 원초적으로 큰 그릇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내 안에 재현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이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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