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뻘소리다. 이 말에서 각별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건 데카르트가 여기서 언급한 ‘존재’야말로 모든 인문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유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존재가 모든 판단의 1 단위이기 때문이다. ◎ 존재는 판단의 최소단위다. 숫자는 1이 단위다. 문자는 자字가 단위다. 책은 권이 단위고, 음악은 곡이 단위고, 그림은 점이 단위고, 음식은 끼가 단위다. 배추는 포기, 열무는 단, 바둑은 국局, 스포츠는 시합이 단위고, 컴퓨터는 1 byte가 단위고 삶은 평생이 1 단위를 이룬다. 단위를 지정하는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문제는 존재가 사건이냐 사물이냐다. 우리는 무심코 사물을 존재로 치지만 실제로는 사건이 존재다. 한 채의 집이 있다면 그것을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집 앞에 집을 한 채 더 지으면 그 사이에 골목길이 생긴다. 문제는 집을 지었을 뿐 골목길을 짓지 않았다는데 있다. 골목길은 저절로 생겨난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그 사이에 사랑이 생겨난다. 축구선수가 모이면 시합이 생겨나고, 바둑기사가 모이면 대국이 생겨나고, 국가가 모이면 그 사이에 국경선이 생겨난다. 존재를 사물로 보는 관점은 존재의 이러한 측면을 담아낼 수 없다. 이는 인식의 오류이다.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 ◎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 인문학의 이해는 사건의 맥락을 아는데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의미를 추구하지만 맥락은 의미에 선행한다. 맥락은 바깥의 관계이고 의미는 안쪽의 내용이다. 바깥을 먼저 알면 안쪽은 자연히 알게 된다. 바깥쪽의 맥락보다 안쪽의 의미를 추구하는 관점은 존재를 사물로 여기는 관점의 착오 때문이다. ◎ 맥락은 의미에 선행한다. 사람들이 사건이 아닌 사물에 집착하고, 맥락이 아닌 의미에 집착하는 이유는 관점의 착오 때문이다. 자신이 사건에 개입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객관이 아닌 주관이며 비과학적인 방법론이다. 대국이 아닌 바둑알을 보고, 시합이 아닌 축구공을 보고 사랑이 아닌 남녀를 보는 관점이다. ◎ 사건의 맥락 – 축구공이 아닌 경기를 본다. 모두에서 말한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그러하다. 그 생각은 게임 속의 아바타가 가진 망상일 수 있다. 이미 자신을 사건에 개입시켜 우물 안의 개고리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기의 진행을 보지 못하고 축구공만 보고 있다. 레이저 포인트를 향해 달려드는 고양이 같다. 인문학은 사유를 도구로 삼아 판단하며 그 판단의 기초 단위는 존재이며 그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의 존재이며, 사건은 내부의 의미가 아니라 바깥의 맥락을 포착할 때 바르게 파악된다. 개구리가 우물안을 벗어남과 같다. 정상에 올라 전모를 바라보는 것이다. 축구공의 움직임에서 시합의 진행을 포착하고 남녀의 조우에서 사랑의 드라마를 포착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문명을 포착한다. ◎ 인문학≫사유≫판단≫존재≫사건(사물)≫맥락(의미)≫지식의 체계 인문학의 대전제는 세상이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서로 구분되나 사건은 서로 연결된다. 사물은 서로 구분되어 흩어지므로 지식의 체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지식의 체계란 하나의 지식으로부터 다른 지식을 연역하여 지식이 지식을 낳아 무한히 번영하는 것이다. 지식의 나무가 커다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다. 지식이 스스로 번식하여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인터넷 네트워크가 확대되듯이, 구글 서버에 데이터가 쌓이듯이 생명성을 얻어 생물처럼 스스로 진화하여 나아가는 것이 지식의 체계다. 사물은 다르므로 집합되어야 한다. 흩어진 사물을 집합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물이 스스로 집합하지 않으므로 세상은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명백하며 우리가 이를 받아들일 때 인문학은 비로소 출범한다. 그 다음은 페이스북 페이지뷰 늘어나듯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 사건 – 맥락 사건은 자연의 인과법칙에 따라 시공간의 그물로 망라하여 널리 연결되어 있다.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하나로 뭉쳐지지 않음에 비해 사건은 이미 연결되어 통짜덩어리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장한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촉발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은 일어난다. 인과법칙에 따른 사건의 전개과정을 기승전결로 나타낼 수 있다. 사건은 시공간 상에서 기승전결로 전개하며 이에 따라 서로 연결되는 것이 맥락이다. 이때 기승전결의 전개 중에서 아직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은 의미다. 사건의 감추어진 부분은 공간을 확장하거나 시간을 확장하면 확인된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볼 때는 축구공이 보였을 뿐인데 다가가서 공간을 넓게보니 시합이 보인다. 처음에는 바둑알 하나가 보였을 뿐인데 시간을 오래 기다리니 이창호와 구리의 대국이 보인다. 그 사이에 사건의 기승전결이 있다. 이때 앞서는 기起 포지션은 뒤따르는 승전결承轉結 포지션을 지배한다. 그것이 권리權利다. 기승전결의 포지션들 중에서 앞서는 포지션이 따르는 포지션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에 서는 것이 가치다. ◎ - 기 ≫ 승 ≫ 전 ≫ 결 - 사건은 인과법칙에 따라 시작에서 끝까지 1 단위의 존재를 완성한다. 여기에 시간과 공간을 대입하여 펼쳐내면 기승전결이 된다. 이를 구조론에서는 질≫입자≫힘≫운동≫량의 5단계로 설명한다. 각 단계는 사건≫맥락≫의미≫권리≫가치로 전개한다. 하나의 존재는 사건으로 시작되고 가치로 종결된다. ◎ 존재는 사건으로 시작하여 가치로 종결하며 그 사이에 맥락과 의미와 권리가 있다. 인문학의 의미는 존재를 구성하는 사건과 맥락과 의미와 권리와 가치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일work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일work은 주사위를 한 번 던지는 것이다. 바퀴가 구르거나 피스톤이 왕복하듯 에너지의 지속적인 투입에 의해 같은 일이 반복될 때 겹치는 부분을 배제한 것이 일work이다. 주사위를 한 번 던졌을 때, 시합을 한 번 치렀을 때, 삶을 한 번 살았을 때, 그 1 회의 존재단위 안에 기승전결이 있고 사건과 맥락과 의미와 권리와 가치가 있다.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러한 절차를 무시한다. 주사위를 던지지 않고 6의 눈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격이며,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되기를 바라는 격이며, 씨앗을 뿌리지 않고 추수하기를 기대하는 격이며, 시합을 치르지 않고 우승하기를 바라는 격이다. 인문학은 최종적으로 가치를 달성하지만 봄에 파종한 농부만 가을의 결실을 추수할 수 있고 사건과 맥락과 의미와 권리를 따라간 사람만이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인문학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사건이 맥락을 낳고, 맥락이 의미를 낳고, 의미가 권리를 낳고, 권리가 가치를 낳는다. 그리고 인간은 그 가치를 획득하고 만족해 한다. 당신이 인문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 가치의 획득이다. 그러나 파종하지 않고 추수하려 드는 과오를 범하지 말라. 맥락을 무시하므로 실패하고 과정을 생략하므로 실패하고 절차를 회피하므로 실패한다. 권리를 추구하면 가치는 저절로 따라온다. 의미를 추구하면 권리는 따라온다. 맥락을 추구하면 의미는 따라온다. 사건을 유발하는 자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P.S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려도 좋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서구인은 소유지향적이고 동양인은 존재지향적이라 한다. 소유는 사물에 대한 태도이고 존재는 사건에 대한 태도이다. 존재가 윗길이다. 사건이 윗길이다. 무엇보다 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을 교정할 일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확 바꾸는 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출범한다. ###
인문학은 사유하여 가치를 창출합니다. 사유의 대상은 존재입니다. 첫 단추를 잘 꿰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전개됩니다. 사유의 첫 단추는 존재의 파악입니다. 존재에 대한 대응은 의사결정입니다. 바른 사유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도출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인문학의 목적입니다. 사건 안에 뛰어들어 사물을 지배하려 하므로 닭쫓던 개가 됩니다.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신세가 됩니다. 사물 밖에서 사건을 조직할 때 목적은 달성됩니다. 사물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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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쳤습니다.^^
모두에서 말한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그러하다. 그 생각은 게임 속의 아바타가 가진 망상일 수 있다. 이미 자신을 사건에 개입시켜 우물 안의 개고리 > 개구리
글이 쏟아져 내린 밤인가 보오.
개고리가 더 감칠 맛이 있잖소?
동감하오. 개고리가 감기는 맛으로는 더 났소..ㅎㅎ
옳소!
막판에 한 줄 추가했습니다.
P.S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떠올려도 좋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서구인은 소유지향적이고 동양인은 존재지향적이라 한다. 소유는 사물에 대한 태도이고 존재는 사건에 대한 태도이다. 존재가 윗길이다. 사건이 윗길이다. 무엇보다 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을 교정할 일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확 바꾸는 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출범한다.
사건을 유발하는 자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정말이지 훌륭한 글입니다.
O사건 -맥락
O사물 -의미
밑에 밑의 줄
"사건"이 서로 분리되어 하나로 뭉쳐지지 않음에 비해 는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하나로 뭉쳐지지 않음에 비해 로 바로 잡아야 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