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맞물려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밤과 낮이 맞물려 하루를 이루고 여성과 남성이 맞물려 한 가족을 이룬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짝을 가지며 더불어 더 큰 하나의 세계로 나아간다. 나와 우주가 맞물려 하나를 이룰 때 존재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 있다. 만유가 서로 맞물려 있어서 하나가 결정되면 다른 하나도 결정된다. 내가 바뀌어야 천하가 바뀌고 천하가 바뀌려 할 때 나를 불러낸다. 내가 완성될 때 천하가 완성되고 천하가 완성되려 할 때 나를 부른다. 깨달음은 인생을 깨닫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미학과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곧 철학이다. 그러므로 철학과 깨달음은 같다. 이를 특별히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라 하여 구분하는 뜻은 원래 의미와 가치는 경험으로만 터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핸들을 한 번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운전을 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지적 영역에는 반드시 경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자동차를 발명하고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도 직접 핸들을 잡아보기 전까지는 운전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피해갈 수 없다. 경험은 절대로 필요하다. 경험만의 인식 역시 불완전하다. 자동차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어깨너머로 배워서 운전을 할 수 있다. 이는 경험적인 터득이다. 운전은 할 수 있지만 불완전하다. 진정한 운전은 이론의 학습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경험이 필요하지만 경험만으로 터득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수는 없다. 세상에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말이다. 이때의 방법은 응용하는 것이다. 다른 경험을 원용하는 것이다. 진리의 특성은 보편성이다. 두루 통하는 성질이다. 이곳에서 얻은 경험을 저곳에 응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저곳에서도 통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지적 영역에는 학습으로 되는 부분이 있고 절대로 경험을 필요로 하는 부분도 있다. 경험해야 할 그 대상이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면?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 원용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의 경험을 불러내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은 응용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배운 사람은 오토바이를 쉽게 배운다. 오토바이를 배운 사람은 자동차를 쉽게 배운다. 비행기 조종을 배우려면 자동차 정도는 떼고와야 한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다른 곳에서도 응용될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성질은? 맞물려 있음이다.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는 부분과 전체가 맞물려 있다. 세상은 크게 맞물려 있다. 부분과 전체가 통할 때 인간은 오르가즘을 느낀다. 거기에 전율함이 있다. 울림과 떨림이 있다. 공명함이 있다. 즐거움이 있다. 깨달음에는 즐거움이 있다. 만유는 패턴으로 되어 있다. 패턴은 닮아 있다. 눈앞에 닥친 사실이 과거에 경험한 일과 닮아있음을 알아챌 때 무릎을 치고 깨닫는다. 세상은 맞물려 있다. 그것은 구조다. 그러한 맞물려 있음으로 해서 가치는 배달된다. 그것이 의미다. 세상은 닮아있다. 그것은 패턴이다. 그러한 닮아있음으로 해서 미(美)는 서로 통한다. 그것은 소통이다. 자전거는 부분이고 오토바이는 전체다. 오토바이는 부분이고 자동차는 전체다. 자동차의 운전석은 부분이고 비행기의 조종간은 전체다. 부분과 전체는 통한다. 부분을 앎으로써 곧 전체에 도달한다. 그 방법으로 통달하는 것이다. 부분의 인식이 전체와 공명하는 순간 번뜩이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강단의 방식과는 다르다. 우리는 수학수업에서 수학사를 배우지 않고 과학수업에서 과학사를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수업에서는 철학을 배우는 사람은 없다. 대신 철학사를 배운다. 옛날 사람의 철학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의 실패다. 공자와 맹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운들 그것은 옛날 사람의 철학일 뿐이다. 이 시대의 철학이 필요하다. 부분과 전체는 통한다. 그러므로 옛 사람의 철학에서 이 시대의 철학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소통(疏通)이다. 철학은 통한다. 언제 통하는가? 깨달음에 이르러 통한다. 무엇이 통하는가? 의미와 가치와 미학이 통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가치란 ‘같이 선다’는 뜻이다. 존재는 맞물려서 대칭구조를 이룬다. 하늘과 땅, 밤과 낮, 여자와 남자처럼 서로 마주보고 맞물려 쌍을 이루고 있다. 이 원리에 의해 의미는 가치를 배달한다. 그것이 구조라고도 한다. 이러한 구조의 원리에 의해 의미가 배달된다. 가치창조는 소통에 있고 가치보존은 미학에 있고 가치실현은 구조에 있고 가치전달은 의미에 있고 가치획득은 인생에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첫째 인생을 깨닫는 것이며 둘째 의미를 깨닫는 것이고 셋째 구조를 깨닫는 것이고 넷째 미학을 깨닫는 것이고 다섯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어야 한다. 깨달음의 의미는 외부에서 주입되는 지식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체험으로 우러나와야 한다는데 있다. 그것은 곧 창조한다는 것이다. 깨달은 이는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데서 다르다. 먼저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은 이러한 짝짓기의 원리를 활용하여 짝을 지어 전달하는 것이다. 화물을 운반하려면 자동차에 실어야 한다. 짝지어야 하는 것이다. 아기를 얻으려면 파트너를 얻어야 한다. 짝지어야 하는 것이다. 가치는 이러한 짝짓기의 가치며 구조는 곧 짝짓기의 구조다. 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다. 구조를 이해하면 전부 이해할 수 있다. 처음은 인생으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짝지어져 있다. 부모와 국가와 조직과 집단의 일원으로 짝지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에서 버려진 존재다. 그것은 허무다. 부모도 국가도 조직도 집단도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질병이 찾아온다. 죽음이 다가온다. 소외와 고독이 엄습한다. 이때 허무를 발견한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때가 위기다. 위기에서의 탈출방법은 짝을 짓는 것이다. 학벌이라는 이름이 짝짓기 자격증이라는 이름의 짝짓기 배우자라는 이름의 짝짓기로 그 난관을 돌파하려고 한다. 인생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을 깨닫는다는 것은 허무를 깨닫는다는 것이며 누구도 당신의 보호자가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이며 너의 짝을 너 자신의 힘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공(空)을 발견하는 것이다. 모두 비어있다. 크게 텅 비어 있다. 당신이 든든해 하는 것들 돈도 가족도 친구도 국가도 조직도 자격증도 기술도 그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필요로 할 때는 외면하고 돌아앉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벌도 배우자도 조직도 본질에서 당신을 보호하지 않는다. 허무의 끝에서 의미를 만난다. 의미는 가치의 배달이다. 의미는 하이퍼링크다. 의미는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다. 의미는 짝짓기다. 의미가 있느냐는 말은 짝이 있느냐는 말이다. 의미는 뜻이다. 뜻은 태운다는 의미가 있다. 마차에 짐을 싣듯이 태우는 것이 뜻이다. 짝짓는 방법으로 태워가는 것이다. 의미는 그렇게 타고 가는 것이다. 의미는 루트다. 의미는 길이고 도(道)고 방법이다. 의미의 위에 가치가 있다. 가치는 대칭이다. 하늘과 땅, 앞과 뒤, 좌와 우 처럼 뗄 수 없다. 의미는 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가치는 마침내 짝이 지어진 것이다. 의미의 위에 평형이 있다. 의미가 가치의 전달이라면 구조는 가치의 실현이고 평형은 가치의 완성이다. 그것은 미학이다. 인생은 사실이고 의미는 루트이고 가치는 구조이고 평형은 미학이다. 미학은 완성이다. 완성되면 소통한다. 미학은 소통하기 위한 미학이다. 소통은 가치를 창조한다. 미학은 가치를 보존한다. 구조는 가치를 실현한다. 의미는 가치를 배달한다. 인생은 가치를 획득한다. 깨달음은 첫째 인생을 깨닫고 둘째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셋째 의미의 가치를 깨닫고 넷째 가치의 미학을 깨닫고 다섯째 미학의 소통을 깨닫기다. 이 과정이 전체로서 하나임을 깨닫기다. 정상에서 보면 전모가 보인다. 소통에 이르지 못한 미학은 실패다. 미학에 이르지 못한 가치는 실패다. 가치에 이르지 못한 의미는 실패다. 의미에 이르지 못한 인생은 실패다. 인생은 당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당신은 그것을 종잣돈으로 얻어 세상을 방문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은 곧 허무로 반전되고 만다. 당신은 그 인생이라는 종잣돈을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열걸음도 못 가서 종잣돈은 바닥나고 만다. 무지와 가난과 질병과 친구들과의 격차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다. 가족과는 나이를 먹을수록 멀어진다. 친구와는 배움의 차이만큼 멀어진다. 국가와는 당신이 가진 힘의 차이 만큼 멀어진다. 당신의 종잣돈은 완전히 바닥나고 만다. 인생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허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버려진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초발심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무도 당신을 보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당신이 떠날 때다. 허무를 절절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가치는 결국 언젠가는 당신의 곁을 떠난다. 그것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나야 한다. 3살 아기는 신처럼 떠받들어지지만 17살 소년은 심판대에 선다. 여전히 허무를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 글을 더 읽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제 허무를 깨달았다면 의미가 그대를 구원해 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미의 끈을 잡고 쫓아가보면 가치의 로타리를 만나게 된다.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미학의 집을 방문할 수 있다. 미학은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또다른 정상과 만난다. 정상에서는 또다른 정상과 소통한다. 그것이 가치의 창조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이 거기다. 소통이 새로이 가치를 창조하는 그곳이 정상이다. 당신은 어디까지 깨달았는가? 당신은 하마 인생을 깨달았는가? 당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미를 깨달았는가? 당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치를 깨달았는가? 당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학을 깨달았는가? 당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통을 깨달았는가?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다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너를 유혹하려는 바다. 이 독배를 마시겠는가? 가치란 무엇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판단기준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어떤 것이 더 나은가? 정사(正邪) 중에는 정(正)을 선택해야 한다. 진위(眞僞) 중에는 진(眞)을 선택해야 하고 성속(聖俗) 중에는 성을, 미추(美醜) 중에는 미(美)를, 선악 중에는 선을, 자유와 억압 중에는 자유를, 효율과 낭비 중에는 효율을 선택해야 한다. value(가치)의 어원을 살펴보면 바람을 불다blow, 바람에 의해 거품이 부풀다bubble, 바람(생기)이 들어가서 팔팔하다vivid, 빵빵하다valid는 뜻이다. 왜 팔팔할까? 살아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살아있는 것, 생기있는 것, 팔팔한 것을 의미했다. 죽은 것 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좋은 값을 받았던 것이다. good의 어원은 가득하다이다. 텅 빈 것 보다는 빵빵하게 속이 가득찬 것이 더 나은 값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은? 더 가득한 것은? 그것은 더 높고, 더 좋고, 더 고상하고, 더 예쁘고, 더 자유롭고, 더 새로운 것이다.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왜 가치를 추구하는가? 가치가 심(心)에 가깝기 때문이다. 심(心)은 중심이고 핵심이다.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다. 연필심이나 볼펜심과도 같다. 무엇인가? 심은 속이 가득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속이 빵빵하게 들어찬 것, 그것은 유체에서 밀도차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치있는 것은 팔팔한 것이다. 팔팔하다는 것은? 울림과 떨림에 공명한다는 거다. 그것은 무엇인가? 반응한다는 것이다. 호응한다는 것이다. 응답한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속이 가득찬 것이 반응한다. 심이 있는 것이 반응한다. 심지가 있는 것이 반응한다. 존재의 심지는 무엇인가? 생명이다. 양초의 심지에 생명을 불꽃을 켤 때 존재는 환하게 빛난다. 울림과 떨림이 있다. 미인과 추남은 무엇이 다른가? 미인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그때 내 심장은 뛴다. 서로는 마주본다. 그리고 반응한다. 한 떨기 꽃의 미소에는 벌과 나비가 반응하고 찬란한 태양의 미소에는 초목의 잎새가 반응한다. 산 것과 죽은 것은 무엇이 다른가? 산 것은 반응한다. 살아있는 강아지는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든다. 죽은 석상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산 것을 추구한다. 비어있는 것은 아무 반응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속이 가득찬 것을 추구한다. 무엇이 들어차야 하는가? 정(正)이 들어차야 한다. 진(眞)이 심지로 들어차야 한다. 선(善)의 심이 박혀있어야 한다. 미와 생명과 효율이 있어야 한다. ● 가치있는 것은 팔팔한 것이다. ● 팔팔한 것은 속에 심(心)이 들어 있다. ● 심은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스스로 반응한다. ● 반응으로 소통하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 가치있다. ● 부분과 부분이 소통하여 전체의 심(心)을 만들어간다. 정사 중에는 정이 반응하고, 진위 중에는 진이 반응하고, 성속 중에는 성이 반응하고, 미추 중에는 미가, 선악 중에는 선이, 자유와 업악 중에는 자유가, 효율과 낭비 중에는 효율이 반응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더 가치있다. 효율이 아닌 것은? 낭비된다. 낭비하면 소모된다. 소모되면 결국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반응할 수 없다. 악(惡)은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결국 죽어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반응할 수 없다. 성(聖)은 산의 정상처럼 스스로를 뾰족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속(俗)된 것은 무리들 속에 묻혀 흘러가 버린다. 그러므로 속된 자는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속물은 신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고 진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거짓은 반응하지 않는다. 삿(邪)된 것도 반응하지 않는다. 업악된 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 가지 않는 것이다. 점차 소모되어 사라져갈 것들이다. 다만 자유로운 자가 반응한다. 생명이 있기에 반응한다. 한 그릇의 밥을 먹는다면 어떨까? 나의 혀가 그 단맛에 반응한다. 그것은 가치있다. 모래를 씹는다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가치없다. 한 곡의 음악을 들어도 그러하고 한 폭의 그림을 보아도 그러하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는 것, 나의 몸에서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솟구치게 할 수 있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다. 그것은 반응하는 것이며 반응하는 모든 것은 속에 심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환경에 반응하는 이유는 머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체에서는 머리가 심(心)이다. 정치에서는 권력이 중심이고 생물체에서는 심장이 핵심이다. 심장이 죽으면 생명이 죽는다. 그래서 심장(心腸)이라고 한다. 삶에는 무엇이 심인가? 사랑이 심이다. 학문에는 무엇이 심인가? 깨달음이 심이다. 존재는 무엇이 심인가? 자유가 심이다. 역사에는 무엇이 심인가? 진보가 심이다. 세상은 무엇이 심인가? 문명이 심이다. 그래서 그것은 가치가 있다. 사랑이 가치있고 깨달음이 가치있으며 자유가, 진보가, 문명이 가치있다. 그것을 살아있게 하고 반응하게 하고 함께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는 신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영성지능 의미와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 패턴을 읽는 능력 미감을 판단하는 능력 규칙을 이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능력 응용력과 창조력 깨달음은 영성지능의 개발이다. IQ는 언어, 수리적 추론능력 EQ는 흉내내기 본능에 기초하여 타인의 표정을 읽는 능력, 타인의 정서를 이해하는 능력, 영성지능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능력이다. 정글에서는 타이슨과 같이 운동신경이 진화된 자가 유리하다. 아이큐는 쓸모가 없다. 타이슨과 아인슈타인이 무인도에 표류한다면 아인슈타인이 먼저 죽는다. 아이큐는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것이며 그 계발은 협력에 기초한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집단지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혼자서는 생존하지 못하고 여러 아인슈타인이 협력을 통하여 생존에 성공하며 그 배경에는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