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read 3019 vote 0 2008.12.31 (00:38:35)

 

종교에서의 구원

기독교에서 구원의 의미는 다양하나 중심은 죄(罪)로 부터의 구원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moksha)이라 한다. 불교의 구원은 욕망 혹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곧 열반(涅槃)이다.

구원에 대하여

평범한 종교인이라면 구원의 개념을 천국이나 내세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학계나 교계에서도 안쳐주는 거다.

‘의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의미로 볼 수 있는가이다. 바로 이 지점이 깨달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인생모드’가 확연히 갈라지는 지점이다.

좀 안다는 사람이 있다. 아제님이나 신비님 글을 보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대략 알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두마디 대화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이건 확실히 구분되는 거다.

의미로 볼 수 있다면 곧 깨달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의미로 본다는 건 도무지 어떠한 것인가?

예컨대 당신이 80살에 병으로 죽어 천국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치자. 천국에서 당신은 몇 살일까? 병든 80살 할아버지? 그건 아닐 것이다.

당신은 체격이 당당한 사람이 아니고 얼굴이 잘 생긴 사람도 아니다. 당신은 영어도 모르고 히브리어도 모르고 ‘천국어’도 모른다.

천국의 당신은 지금 그 얼굴 그대로일까? 천국의 당신은 황인종일까? 천국에서도 당신의 한국어가 먹힐까? 당신의 신통치 않은 지능으로 ‘천국어’를 처음부터 새로 익혀야 하는 걸까?

천국에서 새로 태어난 당신이 이승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행복해 질 수가 없다. 당신은 천국어의 학습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어린이가 금방 말을 배우는 것은 머리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가슴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당신이 이승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천국에 이른다면 그곳에서 설사 젊은이의 몸을 가지더라도 당신은 흥미를 잃고 기력을 잃어버린 노인일 수 밖에 없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여 노인스러운 당신은 천국어를 배우지 못한다. 천국의 생소한 문화와 환경과 천국의 첨단기술문명(!)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천국의 당신에게 있어서 손실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갈 일이 있다면 일단은 까마귀 고기를 먹고 가는 것이 좋다. 이승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천국의 당신에게 유익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천국의 나와 이승의 나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이다. 의미로 따져보면 그러하다.

당신은 내세와 지금의 기억이 연결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악(惡)한 것이다. 당신이 천국에서 이승을 기억해내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지금 악한 욕망을 가진 것이다.

그 악한 욕망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 천국에서의 당신을 돕는다.

천국에서 악이 허용될 리 없으므로 당연히 천국에서 당신은 이승의 기억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국의 나와 이승의 나는 전혀 별개의 다른 사람이다.

아니라고? 그래도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너와 나는 어째서 다른 사람인가?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 천국의 나와 이승의 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이라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이 글을 쓰는 나도 역시 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 나는 너인 것이다. 의미로 보면 그러하다. 둘 사이에 차이는 전혀 없다. 의미로 보면 너는 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배짱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전생에서의 나와 내세에서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만약 같은 사람이라고 우긴다면 역시 너는 나, 나는 너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너, 너는 나를 인정한다면 굳이 우리가 천국을 필요로 할까? 왜 천국이 필요하지? 당신이 나라면, 그 연장선상에서 신(神)이 나라면 천국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구원을 천국이나 내세와 연결지어 생각하는건 허무하다. 전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으면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을 건널 때 굉장히 많은 것이 거기에 연동되어 동시에 변한다. 의미로 보기를 훈련하고 받아들일 때 인생이 통째로 연동되어 움직인다.

어떤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가늠하기는 매우 쉽다. 그 사람이 의미로 보는 훈련이 되어 있는가 이 하나만 보면 된다.

의미로 보기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이런 훈련을 해야 한다.

“친척이 돌아가셔서 슬프다.” <- 그러는 당신은 영생할 것이라 믿는가? 인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미리 슬퍼해두지 않았는가?

“시험에 떨어져서 슬프다.” <- 당신이 고작 그 정도의 부지런함과 그 정도의 나쁜 머리를 타고 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작 환멸해 두었더라면 지금 슬프지 않았을 텐데. ㅎㅎㅎ

“돈을 벌어서 기쁘다.” <- 당신은 그돈으로 여러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그 때문에 지금 기쁘겠지만,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그 시간에, 세상을 위하여 더 멋진 계획을 세워둔 사람에게로 그 돈은 자연히 흘러들어가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이런 식으로 끝까지 치고 들어가면 세상에 기뻐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게 된다. 즉 인간이 꾀하는 일의 99프로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허망하다고 판단하는 일 조차도 허무하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세 가지가 남는다. 첫째는 자유고, 둘째는 사랑이고, 셋째는 미학이다. 미학의 논리가 ‘제시’와 ‘전개’와 ‘재현’이라면 첫째 깨달음은 ‘제시’고 둘째 자유는 ‘전개’고 셋째 재현은 ‘사랑’이다.

의미의 길로 나아갈 때 인간은 첫째 깨닫고, 둘째 자유를 얻고, 셋째 사랑을 완성한다.

왜 자유인가? 인간의 꾀하는 일의 99프로가 허무해지기 때문에 그만큼 부담을 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깨에 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일과 같다.

좋은 점수로 선생님께 잘보여야 하고, 착한 행실로 부모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돈 벌어서 친구들 앞에서 우쭐해야 하는 따위가 다 허망해져서 그 무거운 짐들을 땅에 내려놓으므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진정으로 의미있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된 것이다.

인간은 언제 자유를 추구하게 되는가? 사랑이라는 동기부여가 시작되었을 때다. 소년은 첫 몽정을 경험하면서 형들로부터 독립된 자기방을 요구하게 된다. 소녀는 시집갈 꿈을 꾸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꾀하게 된다.

사랑이 없다면 자유는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한 소식이라도 들어서 좀 안다는 사람이 말하는 즉 사랑이 결여된 혼자만의 자유는 애초에 자유도 아닌 것이다.

인간이 돈을 벌어 성공하려는 이유는 돈으로 자유를 사려는 것이다. 물론 실패한다. 그 자유가 사랑을 위한 자유가 아닐진대 정작 돈을 벌어서 자유를 사놓고 보아하니 그 사랑이라는 동기가 증발하고 없다.

거리에서 소일하고 있는 노인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자유도 있다. 결정적으로 사랑이 없다. 그들은 자유조차가 무거운 짐이 되어 있다.

정리하자.

인간이 무언가 성취하려는 이유는 돈으로 자유를 사들이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유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자유라는 이름의 가꾸어진 정원에 사랑하는 그대를 초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다면 한소식을 얻었다는 선사의 자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신이 없다면 그 사랑조차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꾸어진 당신만의 미학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하여, 한 번의 완전한 만남을 위하여, 자유를 필요로 하고 또 그 자유를 위해서 돈을 혹은 자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

돈을 가진 이는 약간 자유롭고, 자랑을 가진 이는 제법 자유롭고, 깨달은 이는 매우 자유롭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그 자유로움 조차가 신기루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돈을 버는 데 까지는 도달하곤 한다. 그 돈으로 자유를 사는 데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돈을 버느라 자유의 질을, 그 자유의 밀도를 구분하는 지혜를 닦아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60세쯤 되어서 겨우 자유롭게 되지만 그들에게는 자유의 밀도를 구분하는 지혜도, 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의욕도, 욕망도, 기운도 없다. 자유는 가꾸어져야 하는 바 그들의 가꾸어지지 않은 자유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혹 한 소식을 들은 이 있어 제법 자유를 구가하지마는 그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 자유를 누리느라 정작 가꾸어야 할 그 정원을 훼손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초대에는 응하는 이가 없다.

신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은 실패다. 완전하지 못한 사랑은 추한 것이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가짜다. 온전하지 못한 자유는 허망한 것이다. 자유가 없는 성공은 혼자만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신과 그 신의 완전성이 존재하며, 그 완전성을 인간이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에서 재현하는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을 위한 자기만의 독립적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자유이며, 그 온전한 자유를 위해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 자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의 99프로를 버려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 짐을 내려놓을 때 당신은 슬픔도 기쁨도 불행도 행복도 잃어버릴 것이다. 대신 당신이 해야할 임무는 작아져서 단 하나의 목표와 승부하게 될 것이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90 매력이 있어야 한다 김동렬 2008-12-31 3981
89 진정한 아름다움에 관하여 김동렬 2008-12-31 3389
88 미학 김동렬 2008-12-31 3037
87 사랑은 미학이다 김동렬 2008-12-31 3243
86 모든 욕망은 사랑에 관한 욕망이다 김동렬 2008-12-31 3473
85 철학은 질문하고 미학은 답한다 김동렬 2008-12-31 3229
84 긍정어법에 대하여 김동렬 2008-12-31 3389
83 자아에 대하여; 셋 김동렬 2008-12-31 3667
82 자아에 대하여; 둘 김동렬 2008-12-31 3250
81 자아에 대하여; 하나 김동렬 2008-12-31 2989
80 단어들 김동렬 2008-12-31 2989
79 원하는게 뭐야? 김동렬 2008-12-31 3468
78 사랑은 깨달음이다 김동렬 2008-12-31 3025
77 부자와 어부 김동렬 2008-12-31 5081
» 구원에 대하여 김동렬 2008-12-31 3019
75 사랑은 구원이다 김동렬 2008-12-31 3238
74 구원 김동렬 2008-12-31 2977
73 멀린스키 드라마 김동렬 2008-12-31 3341
72 ● 마음보고 반하기 김동렬 2008-12-31 3280
71 나쁜 남자의 엔딩 김동렬 2008-12-31 3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