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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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160 vote 0 2008.12.30 (23:14:37)

 

낳음이 희망이다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이다.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세상은 ‘결’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쪼갤 수 없다는 신념은 막연하다.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모든 알맹이는 쪼갤 수 있다. 내부에 결이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방법으로 그 내부에 숨은 결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 두드려 보고 반향을 읽어 그 속을 알듯이 다 알 수 있다.

● 원자론의 아톰 - 쪼갤 수 없다 ≫ 구조론의 결 - 쪼개짐과 합쳐짐의 단위

전근대란 종교적, 관습적, 미신적인 것이다. 근대란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원자 개념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 근대의 토대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므로 시대구분을 다시 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원자의 근대’를 뛰어넘는 ‘구조의 현대’이다. 원자가 근대를 특징짓는다면 구조는 현대를 특징짓는다. 구조란 무엇인가? 들여다볼 수 없다고 믿어져 온 원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현대는 상대성이론과 함께 시작된다. 상대(相對)란 곧 맞섬이다. 무엇이 맞서는가? 겉의 작용에는 속의 반작용이 맞선다. 작용과 반작용이 맞서는 1 단위가 ‘결’이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 결이 있다. 구조가 있다.

합리주의는 리(理)를 주장한다. 리(理)는 곧 결이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장인이 옥(玉)을 가공할 때 원석의 결을 따라 커트한데 따른 말이다. 구조란 곧 존재의 결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상대성에 의해 작용하는 겉의 요(凹)를 보고 이에 맞서 반작용하는 속의 철(凸)을 알 수 있다. 요(凹)와 철(凸)은 정확히 대칭된다. 그 요철의 맞물림에서 정보가 성립된다.

그 정보의 스위치가 켜질 때 화살은 발사되고 자동차는 구동되고 씨앗은 싹이 튼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1 사이클이 전개된다. 존재의 작용은 에너지의 운동

이 아니라 정보의 촉발에 의해 일어난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으로 기폭한다. 원자폭탄은 TNT로 기폭하고, TNT는 뇌관으로 격발하고 뇌관은 공이로 격발하고 공이는 스위치로 격발한다. 최종적으로는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가 격발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맞물려 있다. 수폭과 원폭, 원폭과 TNT, TNT와 뇌관, 뇌관과 공이, 공이와 방아쇠가 한 줄에 꿰어져 사슬을 이루고 있다. 연쇄적으로 링크가 걸려있다. 그 맞물려 있음이 정보다.

세상은 맞섬이다. 열쇠와 자물쇠의 맞섬, 요(凹)와 철(凸)의 맞섬, 인풋과 아웃풋의 맞섬, 원인과 결과의 맞섬, 부분과 전체의 맞섬, 동기와 보상의 맞섬이 근대 합리주의 사상을 구성하는 합리의 리(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이를 풀어놓은 것이다. 삼단논법은 2개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정보를 전달하는 요(凹)와 수용하는 철(凸)이 두 전제를 이루고 요와 철을 통일하는 정보가 결론이 된다.

동기와 보상이 두 전제라면 양자를 잇는 소통이 결론이다. 곧 삼단논법은 원인과 결과, 열쇠와 자물쇠, 凹와 凸, 인풋과 아웃풋이라는 두 전제 사이에 링크되어 있는 정보를 끌어내는 기술이다.

삼단논법은 이음새를 찾는다. 결을 찾는다. 리(理)를 찾는다. 구조를 찾는다. 요와 철이 만나고 자물쇠와 열쇠가 만나는 접점이 구조다. 건축구조라면 기둥 위에서 주두와 대들보가 맞서는 결합과 분리의 지점이 결이다.

주두와 대들보라는 두 전제 사이에 숨어 있는 중력이라는 정보가 바로 삼단논법에 의해 도출되어야 할 결론이다. 지구 위에서 건축의 본질은 중력이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은 지구 중심을 향하여 수직으로 정렬하고 있다.

쇠사슬은 두 동그라미와 하나의 걸림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구조다. 그 구조가 삼단 논법이 두 동그라미 사이에서 찾아낸 결론이다. 구조는 외부의 작용에 대해서 수용할 것인가 반작용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이 정보다.

봉건은 가고 현대가 온다. 무엇이 현대적인 것인가? 구조적인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 메커니즘적인 것, 상대론적인 것, 맞서는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 그곳에 정보가 있다. 거기서 갈라질 것인지 합쳐질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렇게 결정된 정보로 하여 세계의 질서를 이룬다. 그 질서로 하여 세상은 크게 이루어진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보아야 한다. 세상은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다. 원자가 아니라 구조다.

세상을 구조로 본다는 것은 질서로 보고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시스템으로 보고 체계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맞서련다’는 대응의 논리로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나오면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 대응논리가 없다면 내 안에 이야기를 품지 못한 것이다. 결을 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실존적 삶의 자세를 획득하고 한 사람 몫의 인격으로 독립한다.

그것을 얻어야 사랑할 자격이 주어진다. 소통할 자격이 주어진다. 우르르 몰려다니기 잘하는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강한 개인으로 독립한다. 비로소 철이 들어서 한 사람 몫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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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보아야 한다. 맞섬으로 보고 상대성으로 보고 관계로 보고 접속으로 보고 리듬으로 보고 밸런스로 보아야 한다. 절차로 보고 과정으로 보고 현재진행형으로 보고 메커니즘으로 보아야 한다.

원자는 단단하나 구조는 무르다. 그러므로 강(剛)이 아니라 유(柔)로 보아야 한다. 유가 강을 이긴다는 노자의 역설로 보아야 한다. 물질은 강하고 생명은 유하다. 그러므로 구조로 본다는 것은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다.

생명은 세포가 결집하여 신경망으로 소통하면서 네트워크를 이룬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본다는 것이다. 곧 집단지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 집단지능을 성립시키는 양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질과 생명은 무엇이 다른가? 물질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나타내어 증명할 수 없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환경의 간섭에 맞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증명할 수 있다.

존재는 어느 지점에서 완성되는가? 세상과 맞서 독립적인 영역을 주장할 때 완성된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완전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본다는 것이다. 전모를 본다는 것이다.

원자론의 세계관은 위험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면? 원래부터 그렇다는 말이 된다. 타고난 본성이 그렇다는 말이 된다. 인종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인종주의 편견을 낳는다. 흑인은 본성이 그렇고 백인은 본성이 그렇다?

원자론에 따르면 한번 흑인은 영원히 흑인이고 한번 백인은 영원히 백인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니 더 이상 합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보할 수도 없다. 변화할 수 없다. 상승할 수 없다. 미래가 없고 꿈이 없다.

더 쪼갤 수 없으므로 만유는 본래 그렇게 타고난다는 생각이 원자론이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비난되어야 할 인종주의를 낳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차별과 불화가 원자론에 기초하고 있다.

걸인은 걸인으로 태어나고 왕자는 왕자로 태어나고 양반은 양반으로 태어나고 상것은 상것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원자론이다.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조로 보면 쪼개진다. 여자와 남자에서 끝이 아니다.

더 쪼개면? 남자와 여자 이전에 인간이 있다. 흑인과 백인 이전에 인간이 있다. 인간 이전에 토대가 되는 자연이 있고 그 자연의 모습을 조직하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의 주인이라 할 완전성의 표상으로서의 신(神)이 있다.

여자도 남자도, 흑인도 백인도, 집시도 유태인도, 도시민도 부족민도 최초의 신의 완전성에서부터 비롯하여 전개된 거룩한 존재이다. 누구든 수십억 년 전 태초의 작은 생명에서 시작하여 진화하면서 거쳐 가는 한 정거장에 불과하다.

구조는 쪼개질 수 있으므로 합쳐질 수도 있다. 쪼개진 개인의 존재는 불완전하다. 씨앗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음으로 완성되듯이 개인은 소통하여 인류문명이라는 집단지능과 접속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구조는 만남으로 보고 과정으로 보고 현재진행형으로 본다. 남자든 여자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먼 생명의 여행길에 거쳐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다. 태초의 작은 생명에서 미래의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을 건설해 가는 과정의 존재다.

개인은 그 과정에서 하나의 운반체다. 당신은 대한민국이라는 정거장에서 남자 혹은 여자의 포즈로 쉬고 있다. 당신의 진정한 가치는 당신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통하는 60억 인류 공동체의 집단지능에 의해 결정된다.

60억 인류 전체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그것이 당신의 값어치다. 소통할 때 그러하다. 우주 전체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그것이 60억 인류의 값어치다. 진리와 소통하고 신과 소통할 때 그러하다.

세상은 결이다. 결은 만유에 공통된 자신의 내면에 깃든 조형적 질서다. 결과 결이 이어져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를 이룬다. 당신은 인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작은 하나의 그물코다. 그러므로 소통할 때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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