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원연구

'아도화상' 혹은 '묵호자'가 선산군(일선군)으로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도하였다 한다. 모례를 여성으로 보고 여성형 어미를 붙여 흔히 '털네'라 풀이한다. 구개음화 되어 '털>절'로 변하여 사찰을 절(寺)이라고 한다. 이 정도는 알려진 이야기일테고.

(### 필자의견으로 말하면 모례는 인명이 아니라 원래 절을 뜻하는 다른 나라 말. 사투리로 샘을 '샘에'라고 하듯이 장소에 붙는 '에'가 오해되어 이름이 되는 수가 있음. '절에 가다'의 '절에'를 모례로 표기했을 수 있음.)

http://blog.naver.com/ppagierin?Redirect=Log&logNo=140080289075

위 인용한 블로그에서 주장하는대로 석탈해의 '탈해'가 대장장이를 뜻하는 흉노어 '탈하이'라면 냉수리비의 '절거리'가 '털거리'였을 수 있다. '털'에서 '절'로 변하는 '모례규칙'을 적용하면 '석탈해'의 '탈해'라는 이름은 '절거리'의 다른 표기일 수 있다.

http://www.posco.co.kr/homepage/docs/kr/news/posco/s91fnews003v.jsp?idx=40189

야금기술을 가진 흉노족 석탈해가 남으로 이주하던 배 타고 들어왔다면(오다 보면 배를 탈수도 있고) 그 항구는 흥해읍 중성리 배꼬지마을일 수 있다. 탈해가 월성에 숱을 묻어놓고 사기쳐서 왕이 되었다는 구라는 당연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고, 숱은 원래 대장장이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다.

일전에 말한대로 '개'가 '해'로 되고 '게'가 '헤'로 발음되는 즉 K가 H로 변하는 광범위한 현상을 적용하면, 절거리는 탈하이로 되었을 수 있다.(북쪽 지역은 대략 H로 발음됨. 원래 대부분 H는 K가 변한 말)

냉수리비에 나오는 전세 2왕, 곧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실성왕과 눌지왕이라면 지증왕과는 무려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지증왕이 백년도 더 전에 있었던 묵은 가르침을 살려서 절거리라는 개인에게 특혜를 주었을 리는 전혀 없다. 절거리가 백살을 넘게 살았을 리도 없고.

바다쪽에서 온 대장장이 집단이 '털거리'라는 이름을 썼고, 그 중 1인이 냉수리비의 재판과 유사하게 소송에 이겨서 월성을 차지했을 수 있다. 그보다는 거꾸로 '냉수리비 판결사건'이 기억의 혼선으로 석탈해에게로 묻어갔을 수도 있다.

옛날 옛적에 대장장이 털거리가 말추와 사신지의 이권을 뺐었다는 기억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헛갈려서 대장장이 중에서 가장 출세한 석탈해에게로 옮겨붙었을 수 있다. 이런 식의 갖다붙이기는 설화에 흔한 형식이다.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간다'는 법칙에 따라 나중에 일어난 사건이 그 이전시대의 사건으로 옮겨져서 전해지곤 한다.

석탈해 이야기의 전체적인 이야기흐름이 절거리 재판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사유재산이 없고 토지는 씨족공유재산으로 되어 있을 시대에 재판으로 재물뺏기가 흔히 있는 일은 아닐텐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많은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신라무덤의 그 화려한 금붙이들과 상상력의 허를 찌르는 로만글라스의 출현과, 그 의미가 오락가락하는 첨성대와 포석정과 또 과연 한국어인지 의심스러운 인명 등 무수한 의문을 풀려면 더 높은 차원에서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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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한 이영희 교수 주장에 따르면 "▲말추= '끝’의 옛말은 ‘귿’이다. 추(鄒)는 음독으로 ‘추’라 읽는다. 두 자가 합쳐서 ‘귿추’, ‘굳힘’의 옛말이다"라 했는데 탈해가 '절거리'라면 탈해의 아들 '구추'가 '말추'다.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다니 놀랄 노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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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解’의 발음이야 한석봉 작품에 불과한 거,(원래 경상도 사투리는 세종대왕 한글로 표현 못함. 발음을 한글로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왜곡이 일어났을까?) 당시 신라인들은 남조에서 온 중국인과, 북조에서 온 중국인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해서 신라인들도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을테죠.

한자표기를 가지고 고구려, 신라 말이 달랐다고 말한다면 위험천만한 발상. 중국이라는 실체는 근래에 나온 개념이고, 선덕여왕의 황룡사 구층탑 관련 기록만 봐도 오월, 중화라고 따로 구분해 놨습니다.

중국 갖다온 사람 이야기 들으니,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웃 성 출신과는 대화가 안 된답니다. 보통화로 통역하지만 외국어나 마찬가지고.

중요한 사실은 신라초기 고분(오능)의 소박함과 이른바 원삼국시대라고 말해지는 거대고분기의 거대함,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부장품들의 말도 안되는, 소설 쓰는 거 같은 황당한 유물들입니다.

국가 모습도 못 갖춘 원삼국 신라. 겨우 지방관을 보낼까 말까 하는 수준. 시골사람 절거리에게 토지를 줄까말까를 왕이 나서야 하는 수준. 아프리카 부족같은 작은 마을에 왜 아랍이나 흉노땅에서 나와야 할 유물이 나오는가입니다.


더군다나 그 유물이 왜 고구려나, 백제, 가야, 일본에서는 나오지 않는가입니다. 신라 하대의 무덤에도 나오지 않고. 석탈해도 고분이 작고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부터 살살 커지기 시작하는데 뭔가 있는 거죠.


그 시기의 대사건은 영일만에 석탈해 일행이 상륙해서 대장간을 운영했다는거 빼놓고는 없지요. 석씨왕들이 등장하면서 곧바로 말갈과 충돌하며 죽령을 개척하는데 이 또한 뭔가 있는 거죠. 북쪽과 통해야 할 필요성 같은거. 흉노세력이 석탈해를 고리로 지속적으로 넘어왔을 수도 있고.

냉수리 비문의 표현들은 솔직히 인구 10만~30만명 정도를 지배하는 소규모 부족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인구 300만 이상의 절대왕정 국가에서 나올법한 규모입니다. 부족국가를 막 면하려 하는 5세기 신라가 페르시아까지 무역선을 보냈을 리는 없구요.


탈해가 혼자 덜렁 온 것이 아니라, 신기술로 무장한 일단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영일만으로 상륙한 것은 확실하겠고. 대장장이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대단히 높고. 이 정도는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고.


그렇다면 탈해가 경주로 옮겨갔을 때, 추종자 무리도 전부 경주로 이주했겠는가? 탈해가 영일만에 상륙했다면 영일만에 뭔가 그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있다면 중성리비가 나온 미실성과 냉수리비가 나온 토성리다.


미실성과 중성리비 사이의 거리가 대략 500미터 정도, 토성과 냉수리비의 거리가 또한 500미터 정도라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산성도 아니고 평지에 야트막한 성이 있다면 전투용이라기 보다는 어떤 지방세력의 거점일텐데.


토성리는 산중이라 성이 필요할 거 같지도 않은데 뭣하러 성을 쌓았을까? 냉수리비가 발견된 토성리 주변을 샅샅히 훑어봐서 뭔가 제철흔적이라도 좀 나오면 탈해세력의 세거지로 볼만한 이유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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