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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사람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써놓고
자기가 쓴 주장을 진심에서는 안 믿는다는 거.
즉 방어적 태도가 보인다는 거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니들도 더 이상 시비하지는 못하지 ㅎㅎㅎ' <- 이런 표정.
'니들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ㅋㅋㅋ' <- 요런 태도.
관측값에 이론을 꿰어맞추는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한 인식론의 귀납일 뿐
인간은 원래 선험적으로 이론에 기초해서 답을 찾아냅니다.
단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만 급조한 가짜 이론을 들이대는 거죠.
자기 안의 진짜는 언어로 표현을 못하는 겁니다.
물론 구조론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지만.
원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딱 걸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는 어떤 의사결정을 거쳐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글의 글쓴이는 관측을 딱 걸리는 소실점으로 내세웁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기 심리를 들킨다는 거죠.
글쓴이의 주장.. '모든 과학적 견해는 관측이라는 소실점에 딱 걸린다. 피해갈 수 없다.'
즉 이 글의 글쓴이는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엄청난 주장을 하고있는 거죠.
이론과 관측이 만나는 접점이 있으며 그 지점은 누구도 속일 수 없다. 피해갈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이론을 결정하는건 아니죠.
모든 아기는 자궁에서 산도를 통과하여 탄생합니다.
옆구리로 탄생하지는 않는다 말입니다.
제왕절개같은건 없었다구요.
제왕이고 종놈이고 간에 다 산도를 통과해서 태어난 겁니다.
자 여기서 딱 걸리는 지점. 두 세계의 만남.
즉 관측과 이론의 피해갈 수 없는 만남.. 여기서 전율해야 하지 않습니까?
헛소리는 여기까지. 진지모드로 돌입해야 하는 지점.
귀납을 뒤집으면 연역이 됩니다.
관측과 이론이 딱걸리듯이 존재와 관측도 딱걸리는거죠.
글쓴이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도 본인도 그것을 느낍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설명하는건 귀납이지만
이 법칙을 이용하여 과학적 진보를 이루어내는건 연역이라는 말이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관측이죠.
또다시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건 존재죠.
어제까지 없던 아기가 새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아기는 관측자가 출동한 다음에 새로 태어난 겁니다.
여기서 관측자가 서 있는 지점은 어디죠?
자 천동설 들어가서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습니다.
그럼 안드로메다에서 또 태양이 지구를 도는걸 찾아내면 되잖아요.
물론 거기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장면을 찾아낼 수 없죠.
이해를 못했다는 분을 위해 부연하면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다 귀찮고
신에게 부탁해서 우주를 또 하나 만들어보면 됩니다.
어쨌든 우리는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고 무언가를 만들고 있죠.
연역은 곧 창조입니다.
도자기를 만들든 놋그릇을 만들든.
물건을 먼저 만들고 거기서 이론을 도출하는 거죠. 관측에서 이론을 도출하는게 아니라.
관측이 진리값이 아니라 창조가 진리값입니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어놓고도 비행이론을 못만들었지만.
그런데 잘 생각하면 인간의 관측도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라는 거죠.
천문학자가 별을 보고 있다면 관측이죠.
아니죠. 지식을 만들고 있는 거죠. 제작입니다.
모든 창조는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
원형의 복제이며 여기서 딱걸립니다. 피해갈 수 없죠.
점을 두 개 찍어놓고 시작합니다.
왜 점이 두개냐 이거죠. 이제 이해했습니까?
이런건 자세하게 설명하려면 한없이 길어지는 건데
어떤 하나의 사실을 관측한건 의미있는 데이터가 안 됩니다.
수주대토의 고사와도 같은데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죠.
두 번 연속으로 토끼가 그루터기에 박고 죽었다면 의미있는 데이터입니다.
2번 연속해서 일어난 일은 세 번 연속해서 일어날 수도 있는 거죠.
그러므로 세 번 연속해서 일어나야만 입증이 되는 건데
이 글의 원문 작성자가 하는 말은 세 개의 점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는 문제입니다.
직선 위에 점을 두개 찍어놓고 시작하며 세번째 점을 찾는 거죠.
A=B, B=C, 고로 A=C를 성립시키는 세 개의 점이죠.
최초의 점 두 개는 관측으로 얻어집니다.
그런데 세 번째 점은 과학자가 예언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일식을 통해 상대성이론을 입증했을때의 예언과 같죠.
그 예언을 연역이라고 하는 거죠.
하여간 이를 충족시키려면 세개의 점이 하나의 연속된 선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선이 직선이든 원이든 2차함수든 상관없는데
천동설은 여러 개의 원을 그리고 있는데
두 원이 하나의 원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원문의 천동설 그림에는 그게 없죠.
그러므로 천동설은 연역이 아니고 따라서 오류인 거죠.
이건 구조론이 말하는 일의성입니다.
두 개의 점을 찾은 사람이 세 번째 점을 예언하여 적중시켰다면
거기서 이론이 나와준다는 거죠.
그 이론은 당연히 연역이라는 거죠.
그런데 원문을 잘 읽어보면
원문의 작성자가 하나의 선 위에 무려 세개의 점을 찍고 있다는 거죠.
즉 이 글의 글쓴이는 귀납이 아니라 연역을 구사하고 있는 겁니다.
2 개의 점을 찾았으니 세 번째 점도 어딘가 반드시 있다고 예언하고 있다는 거죠.
관측이 세 개의 점을 찍는 문제에 딱 걸리듯이
복제도 세 개의 점을 찍는 문제에 딱 걸리는데
원문의 작성자가 관측된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게 아니라
어디서 베낀 것을 복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베낀 것이기에 본인도 못 믿는 거군요 ㅋㅋㅋ
그런 뜻이 아니구요. 베끼는건 잘하는 행동입니다.
뇌가 무의식 중에 베낀 거죠.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글쓴이는 모르죠.
글쓴이는 자신의 주장과 행동이 상충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뭔가 이상해서 계면쩍어 하는 행동이 보이죠.
글쓴이의 논리전개야말로 선 하나에 점 세개 찍는 거죠.
아 그렇군요~
이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귀납과 연역은 같은 겁니다. 귀납=연역이라는 거죠.
미분=적분이듯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동시에 탄생하는 거죠.
땅이 탄생하면 하늘도 탄생합니다.
하늘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땅이 탄생하는 순간
땅 아닌 부분이 하늘로 정해지는 거죠.
귀납과 연역은 상보적인 관계이므로
귀납이 틀리면 연역은 맞는 겁니다.
그리고 귀납을 했을 때 이미 연역도 한 것입니다.
나무에 개미 두 마리가 있는데 이 두 마리 개미가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개미가 아니라 다람쥐라도 상관없고 원숭이라도 무방합니다.
1) 가지끝으로 간다.
2) 줄기쪽으로 간다.
답은 2번입니다.
1번은 귀납, 2번은 연역입니다.
이때 개미는 무질서한 배회법을 쓰므로 아무데나 막 갑니다.
개미가 가지로 갔는데 만나지 못했다면?
반대쪽으로 가면 백퍼센트 만납니다.
귀납이 틀렸다는 사실이 연역이 맞다는 증거죠.
이때 개미는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이미 만난 것이나 같습니다.
가지 끝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줄기에서 만나게 될거라는 증거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범인입니다.
A가 범인이 아니면 B는 자동으로 범인인증입니다.
A가 동전의 앞면을 선택하면 B는 뒷면으로 결정됩니다.
원문의 글쓴이는 귀납이 엉터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연역이 옳다는 말과 같죠.
과학은 하나의 선에 점 셋을 집어넣기입니다.
한 개의 점은 수주대토죠.
논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달착륙음모론처럼 되도 않은 소리를 할때
저는 점을 세어보고 1초만에 판단합니다.
그거 판단하는데 2초 걸리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거에요.
그냥 점이 몇개인지 세어보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집에서 사람을 봤는데 얼굴이 떡판이다.
이건 암것도 아니죠.
근데 또 떡판을 만났어요.
의미있는 단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형제다하는 판단이 서는 겁니다.
이건 귀납입니다.
귀납은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형과 동생 그리고 막내까지 떡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형제가 닮았음을 보고 막내가 그 집에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연역입니다.
점은 반드시 셋이라야 합니다.
동사무소의 인감과 같죠.
서류의 도장, 동사무소 인감, 그리고 실제 인감도장 셋이 있는 거죠.
범인이 지문을 남겼다면
즉 두 개의 지문을 보고 세번째 지문
그 지문은 범죄현장에서 지문을 남기는 그 순간입니다.
그것을 예측해서 적중시키는 것은 연역입니다.
원문의 글쓴이는 귀납에 근거한 이론이 엉터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말은 맞는 말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우기죠.
횡설수설이죠.
과학이 엉터리인데 왜 지 말은 믿어야 한다는 거죠?
왜냐하면 글쓴이는 복제를 통해 연역을 했기 때문이죠.
자기가 연역했다는 사실을 자기가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연역했으므로 무의식적인 확신이 있는 겁니다.
엔트로피는 귀납에 의해 발견된거지만 거기까지는 추측입니다.
엔트로피를 적용하여 무언가를 성공시키면 그게 연역이죠.
즉 원리를 복제하여 새끼를 쳐야 입증이 된 것입니다.
한번 이기면 운
두번 우승하면 실력
세번 우승하면 이론입니다.
김성근이죠.
우승을 하면 이론이 되는게 아니고
이론이 있어야 세번 우승을 합니다.
이론은 옥이 깨지는 결입니다.
늘 같은 코스로 깨집니다.
반복된다는 거죠.
복제되는 거.
대포를 쏠때 탄도수정하는 것과 같죠.
한 발을 쏘면 어디에 떨어질까요?
모릅니다.
관측병이 무전을 보내오면 탄도를 수정하고
두 발을 쏘면 어디에 떨어질까요?
모릅니다.
다시 탄도를 수정하고 세 발을 쏘면 어디에 떨어질까요?
그건 압니다.
알기 때문에 포사격을 할때 몇 번 반복해보고 쏘는 거죠.
바다에서 적선을 만났을 때 거리를 육안으로 알 수가 없어요.
대포를 두 방 쏴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대포알이 두 방 날아오는 시간까지 잽싸게 도망치면 됩니다.
두방 쏘면 안 맞는다는게 귀납이고
세방 쏘면 맞는다는게 연역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탄도를 수정하기 때문이죠.
제가 과학 분야에는 지식이 짧아서 인지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관찰 값을 토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론이 나온 것이 아니라
관찰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이미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형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그 원형에서 비롯된 것이
이론이다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