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톨스토이 페북에서 나온 이야기다. 구조론이 일부 니체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 있었다. 필자 입장에서는 불쾌한 이야기다. 구조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을까봐 일부러 구조주의 철학자의 책은 읽지 않았다. 다만 인류학을 좋아해서 몇 권을 읽었는데, 나중 알고보니 슬픈 열대의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주의 철학의 개조라는 것이었다. 그쪽으로 관심은 없고 우연의 일치는 있을 수 있다. 니체는 첫 인상이 안 좋았는데 한 마디로 궤변가다. 중딩때 염세주의였기 때문에, 이런 소피스트 아저씨들은 그 교만한 낯짝을 한 대씩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가지고 이기려고 하는 자는 하여간 괘씸하다. ‘신은 죽었다’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려는 작태인데 진중권스럽기 짝없다. 문제는 너무 일찍 니체를 읽었다는 거다. 한동안 철학서적을 섭렵했는데 그때만 해도 라캉이니 소쉬르니 들뢰즈니 하는건 없었다. 샤르트르니 까뮈니 야스퍼스니 비트겐쉬타인이니 하는 이름이 앞줄에 있었다. 니체는 왠지 연예인 느낌이다. 촌놈이 까분다는 생각. 니체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저급해 보인다. 나중에야 그때만 해도 서구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이라 니체의 생각이 제법 시대를 앞서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철학은 공자고 노자고 석가고 간에 일단 신을 때려죽여놓고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고? 2500년 전에 석가가 일찌감치 무신론을 해먹었는데 무슨 뒷북이여? 공자도 신을 뒷방에 쳐박아놓고 게임 시작하는 판에. 동양은 신이 죽어서 문제다. 니체를 먼저 읽었는데 조금 읽다가 던져버렸다. 나중에야 수백 명의 날고 긴다는 철학자 중에 니체만한 인간도 없더라 하고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건 나중이고. 영화도 그렇다. 고전명화 재미없다. 시대적 배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영화가 히치코크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모르면 히치코크가 재미없다. 영웅본색을 지금 본다면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잖아. 잼없어.’ 할 거다. 그 어디서 본 장면들이 영웅본색을 베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말이다. 프로이드도 오세준님 강의를 듣기 전에는 구조론적이라는 점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드≫리비도≫욕망의 전개가 구조론의 질≫입자≫힘의 전개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구조론은 맨 앞에 에너지를 둔다. 구조론의 질은 제로베이스에서 처음 에너지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다만 구조론은 에너지를 밖에서 조달하는데 비해 프로이드의 리비도는 내부의 성충동에서 조달하려는 점이 다르다. 차라리 융의 무의식이 구조론과 가깝다. 성욕은 에너지가 없다. 군중심리에서 명예심, 승부욕, 집단 히스테리, 광기와 같은 거대한 에너지가 나온다. 대승이 에너지를 조달하는 방법이다. 니체의 초인사상 역시 어디선가 에너지를 조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구조론과 유사하다. 기독교의 원죄의식은 에너지가 빈약하다. 문제는 초인 내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려 한다는 거다. 내부에서 조달하려 하면 우월주의, 인종주의로 가게 되어 있다. 구조론은 대승의 팀플레이에서 에너지를 조달한다. 밖에서 얻는다. 쇄국주의, 자력갱생, 고립주의는 구조론이 배척하는 태도이다. 석가는 소승이다. 내면의 깨달음은 에너지가 없다.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20세기를 흔들어 놓은 두 사람은 마르크스와 마오다. 그들은 어쨌든 동기부여에 성공했다. 다만 내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려 한 한계가 있다. 특히 마오는 스탈린의 과학을 내심 경멸하면서 지나치게 정신주의에 서 있었다. 그는 스스로 교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과학을 표방했으나 과학 그 자체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의 혁명 개념은 과학법칙이 아니라 정신주의다. 신념에 불과하다. 무엇인가? 인간의 내면에서 그 바깥으로 나와서 사회 안에서 팀을 찾아야 하고, 다시 사회의 바깥으로 나와서 자연을 찾아야 한다. 자연과 사회의 팀플레이, 사회와 개인의 팀플레이여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대승이다. 필자가 감화를 받은 사람은 톨스토이와 토스토예프스키, 소로와 조지 오웰이다. 이들은 모두 맨 몸뚱이로 대지와 박치기를 시도한 사람이다. 중딩때 염세주의였기 때문에 맨 몸으로 세상과 박치기해서 얻은 지식이 아닌 지식은 모두 가짜로 보았다. 사회 안에서 비교하고 차별하는 상대주의적 가치들은 모두 가짜다. ‘네가 이러면 나는 이럴거다’ 하는 게임의 논리를 들이대면 가짜다. 니체는 딱 봐도 게임이다. 놀구 있네. 톨스토이는 진짜로 농부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특히 말년의 톨스토이를 좋아한다. 토스토옙스키는 사형대에 매달렸다. 이상의 날개에서 정오의 사이렌소리를 듣고 점프를 한 사람이다. 그는 일생을 그 사형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죽음의 순간까지. 그런 인생이 진짜다. 조지 오웰은 노숙계의 원조다. 노숙의 달인. 소로 역시 한 노숙 하는 사람이다. 숲에서 몇 년 살아보지 않은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한 인간 개인에서 우주 전체를 넘어 신과 정면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어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 안에서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딴건 용납할 수 없다. 니체는 정신이 썩은 병자일 뿐이다. 제법 맞는 소리도 했지만 기독교를 때려줄때만 의미가 있다. 동양철학으로 보면 초딩 하고도 유딩이다. 초인? 석가의 부처 표절에 불과하다. 진정한 실존주의 원조는 톨스토이다. 물론 니체가 훨씬 더 아는게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썩은 놈이다. 신 앞에서 닥돌하지 않고 중간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놈이다. 니체를 가끔 써먹을 때도 있는데,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통하는 지점이 있으며 2500년 전에 이미 신을 해치워버린 석가, 신을 경원해버린 공자, 신을 까맣게 잊어버린 노자가 서양철학보다 확실히 앞서있다는 증거가 필요할 때 동원할 뿐이다. 구조론은 누구 영향을 받은게 아니다. 초딩때 아이디어를 계속 굴리다가 고딩때 만든 거다. 다만 구조론을 잘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사상이 있나 찾아본 거. 석가의 연기법, 헤겔의 변증법 따위로 구조론을 설명할 수 있나 검토해 본 거. 최근에는 마르크스,프로이드, 니체도 일부 구조론과 맥락이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래는 조지 오웰.. 이 매력쟁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462 참호 속에서 몸을 일으켰고 총알이 목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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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니체를 조금 읽다가 던져버려서
뭐라고 말씀드리긴 어려운데
니체가 생각보다 아는게 많은 넘이었군요.
니체는 구조론과 같은 이론이 있다기 보담은
아포리즘을 모아놓아서 '이죽거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진중권이 맞는 이야기 하면 더 얄밉죠.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는데.. 교만한 제자 한 넘이 갑툭튀 하더니
'전 이미 다 배웠걸랑요' 하고 제멋대로 하산
법가를 하고 있다면 .. 사실 법가는 유가에서 나온 거.. 때려주고 싶겠지요.
니체는 진정한 정상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태도와 방향만 논하지 말고 이론의 일 사이클을 밟아야 합니다.
직관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이어야 합니다.
다만 말씀 듣고보니 저의 짐작보다는 생각이 깊은 넘이긴 하네요.
오웰의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강추합니다.
이 외에 ... 이제 와서 얘기지만 (retrospectively) 언감생심 철학이란 걸 생각한다는 건 ... 그런 현실에서 '철학' 맛을 본다는건 개 발에 다갈. 아님 목숨을 걸든가.
"이제 와서 얘기지만" 그 당시를 보면 쓴놈도 모르고 읽는놈도 모르고 번역한 넘은 더더욱 모르는 그런 '철학서적' 많았죠.
말이 말이 아니고 글이 글이 아니었죠. 이제 와서 보니깐 말이죠. 철학에 관해서라면 우리나라는 내게 아직도 암흑입니다.
철학과 출신도 아닌 비전공자로서 읽을 책도 없고, 요즘은 그런 책이나마 점점 필요가 없어 지는 듯 하니까요.....
저의 사상은 신념에 근거한 도덕적, 윤리적 당위와 작위를 배제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시스템 내부에서 작동하는 에너지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는 넓은 의미에서 구조주의와 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시스템을 가동하는 에너지의 입출력을 포함한 이야기의 완결성에서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체의 완성된 모습을 가지며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생물은 진화를 통해, 자본은 성숙을 통해, 인간은 사회화를 통해 그 모습을 완성시키려 하는 데서 에너지를 조달합니다. 진보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자연의 완전성까지 바라보는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불행을 극복하겠다는 소극성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한계에 도전하겠다는 적극성을 가져야 합니다. 호연지기가 필요하고 기개가 필요합니다. 씩씩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니체는 강자와 약자를 나누는 이분법을 구사한다는 데서 이미 실패입니다. 저는 '이기는 팀에 들어라'고 말하지 '강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밥통들을 꾸짖다 보면 니체처럼 말하게도 되는데 그게 저의 본의는 아니죠. 니체는 기독교의 원죄개념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원죄개념이 인류를 하나로 묶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원죄는 잘못된 주장이지만 그 원죄의 자리에 있어야 할 인류의 어떤 원형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원죄를 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원빛을 이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마이너스 잃는중,,,생각이 짧아서 그런가여,,,,조금 생각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재밌는 건, 동렬님의 글쓰기 방식은 니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죠.
일단 비유와 은유가 많고, 수사적인 비약도 심심치 않아서 주장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사유의 근본은 다를지 몰라도, 이야기 방식이나 문체는 니체나 라캉, 들뢰즈 같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 하나로 니체가 수준 미달임을 알았습니다.
-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바라보고 있을 지어다.
열심히 모 종교 광신도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누가 끼어들어서 니체의 말이라면서 인용하더군요.
다시금 정리해주셔서 감사히 읽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또 토를 다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동렬님 말씀대로 니체는 흉내내는 것이기에 더욱 나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몇몇 부분들은 구조론에서 동렬님이 해주신것과 니체의 말의 맥락이 너무나 유사하게 느껴져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혹여라도 본문에서 언급하신 영웅본색이나 히치콕과 같이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들의 생각들과 닿으신 적은 없으셨나 싶기도 합니다.
*우선 저야 공부가 짧아 니체라고는 도올의 강의속 언급, 고병권의 책 한권과 고병권의 아트앤 스터디 동영상 강의가 전부입니다.
닯았다 싶은 부분을 조금 적어서 나눠보고 싶습니다.
1.
동렬님 : ‘네가 이러면 나는 이럴거다’ 하는 게임의 논리를 들이대면 가짜다.
고병권 동영상 강의록 11中 : 강자의 약션 그것은 그 스스로부터 시작한다. 이에 반해서 약자에게도 정의가 발동한다. 그것은 반동적인 원상회복이다.
-고병권의 니체는 지속적으로 약자란 무언가에 반응하는 존재로 이야기합니다.
2.
동렬님 : 동렬님은 짜장면에서도 이야기하셨듯이 하나 물러서서, 혹은 상부구조에서 봐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대략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고병권의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강의록 5中 : 니체는 진리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 바라보는 시각, 시대와 바라보는 자, 탐구해가는 과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강의록 7中 : 공리주의는 당한 자의 관점에 서고 있다. 어떤 행위가 당장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이득이 되는 문제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렬님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제가 구조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니체역시 겨우 혀끝으로 맛만 보았는데 이렇게 글을 쓰는게 많이 무례하다 싶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