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세계의 양자현상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그림은 옛날 이야기다.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없다.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관측에 의한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전자의 존재를 격발한다. 관측하기 전에 전자는 핵 주변 진공의 일부다. 수학적 밸런스로만 존재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분명한 존재로 우뚝서려면 입자의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심과 날을 갖추어야 입자가 된다. 심은 내부를 지탱하고 날은 외부를 담당한다. 눈사람을 만들려면 손의 체온으로 눈을 살짝 녹였다가 다시 굳혀서 단단한 얼음을 만들어 심으로 삼아야 한다. 심이 없으면 눈이 흩어진다. 공을 던지려면 회전을 주어 날을 일으켜야 한다. 날이 없으면 외력의 간섭을 견뎌내지 못한다. 빛은 진공을 진행하며 심과 날을 조달하여 입자가 된다. 금속을 가열하면 빛 입자가 나온다. 금속 안에서 빛은 불완전하다. 금속 안에 빛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에너지를 받은 그 순간에 심과 날의 구조를 얻어 빛은 탄생한다. 관측하기 전에 전자는 불완전한 반쪽 존재다. 자궁 속의 아기와 같고, 발견되기 전의 한반도지형과 같다.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부구조에 포함되어 있다. 기생생물처럼 불완전한 반존재가 자연에 무수히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거운 가마솥 뚜껑은 간헐적으로 들썩거리며 불연속성을 나타낸다. 뚜껑을 누르는 중력과 내부의 증기압력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가마솥뚜껑이 들썩이는 위치에서 발견된다다. 전자의 위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원래 없는 거다. 존재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기 때문이다. 상호작용 때문이다. 그 사건은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핵 주변에서 일정한 층위를 유지한다. 가마솥 안에 작은 가마솥이 들어있다. 첫 번째 가마솥을 가열하면 증기는 두 번째 가마솥으로 이동한다. 증기의 이동과정은 관측되지 않는다. 뚜껑이 열려서 층위를 점프하게 되기 때문이다. 증기가 바깥으로 이동했다면 바깥쪽의 압력이 낮은 거다. 바깥공간이 증기를 빨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가 핵을 도는 궤도의 이동은 없다. 태풍의 진로는 태풍 자신이 결정하지 않는다. 주변의 공기압력과의 상호작용하여 진로를 결정한다. 자동차의 진로는 자동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와의 상호작용이 결정한다. 상호작용은 그 순간에 연출되므로 미리 알 수 없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겠다는 말은 전자가 이미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숨은 전제다. 공은 존재한다. 그러나 투구는 타자가 들어와야만 발생한다. 선수는 존재한다. 그러나 펀치는 링 위에 올라가야만 발생한다. 투구나 펀치도 반복되면 존재다. 남산 위의 바위가 흔들린다. 바위는 유(有)로 존재하나 흔들이는 존재하지 않는 무(無)다. 그런데 바위가 계속 흔들리면? 진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리는 공기의 흔들림이다. 소리가 계속 나면 소리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빛깔이 계속 나면? 그림이 거기에 있다. 골목의 인형뽑기 기계와 같다. 인형이 살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사람이 동전넣고 빼내는 것이다. 키질과 같다. 농부는 다만 키를 흔들 뿐 곡식을 손으로 집어내지 않는다. 물고기는 가만이 있었는데 이미 몸은 물 밖에 있다. 물고기가 스스로 물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부가 못의 물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타이밍은 포수가 결정한다. 투수만 관측해서는 공을 언제 던지는지 모른다. 물고기만 관측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공간이 움직여서 전자의 위치를 조정하므로 전자의 이동경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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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고착된 사물이 아니라 영화처럼 스크린에 연출되는 사건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의문은 단 번에 해소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조건에서만 기능하는 불완전한 반존재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어야만 존재의 지위를 획득하는 반존재입니다. 필름 안에 갇혀 있을 때는 그저 셀로판에 입힌 무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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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링크했었던 블로그에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글이 있는데요.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더군요.
구조론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특히 켤레라는 용어가 재밌군요.
물리적 실재(實在)에 대한 모든 성질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쌍을 이룬 켤레(conjugate)로서만 존재한다.
실재(實在)의 속성으로서 갖고 있는 물리량은 측정 과정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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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rre2000/12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은
양자역학에 대한 중심이 되는 해석으로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등
코펜하겐의 이론 물리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과학자들에 의해 탄생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보어의 매우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이 양자역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보어는 1927년 이탈리아의 코모에서 열렸던
알렉산드로 볼타 서거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
'상보성의 원리'에 기초를 둔 양자역학의 해석을 제안한다.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를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물리적 계의 한 측면에 대한 지식은 그 계의 다른 측면에 대한 지식을 배제한다”
물리적 실재(實在)에 대한 모든 성질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쌍을 이룬 켤레(conjugate)로서만 존재한다고 닐스 보어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적 현실은 켤레를 이루는 물리량들의
상호보완적 속성이 결정하는 한계 안에서만 정의되고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성이 있는 물리량이다.
만약 이 전자의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하려고 하면,
전자의 운동량에 대한 정보는 그만큼 불명확해진다.
이것은 전자의 위치를 명확히 진술할 수 있는 정확도(precision)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정의 궁극적인 한계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정량적(定量的)으로 구할 수 있다.
입자 또는 파동으로 나타나는 이중성도
실험의 종류에 따라 하나의 성질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빛은 간섭이나 회절과 같은 실험에서는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고,
광전효과 실험에서는 입자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한 가지 실험에서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자나 양성자와 같은 입자들도 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어는 상보성 원리에 추가하여
실재(實在)의 속성으로서 갖고 있는 물리량은
측정 과정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해석은 어떤 대상의 물리량은 측정과는 관계없이
객관적인 양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기존의 지배적인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측정 과정과 분리된 물리량은 아무런 가치도 없을 정도로
양자역학에서는 측정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