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길들이는 방법 달리는 기차는 멈추거나(NO) 그 멈춤을 멈출(NO-NO) 뿐이다. 이게 보수의 비애다. 자연은 달리는 기차와 같다. 자연법에는 오직 NO가 있을 뿐 YES가 없다. 이는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다. 진보는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이므로 YES와 NO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는 원래 가던 길을 가는 사람이므로 오직 NO만 구사할 수 있다. 보수는 자연법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개는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다. 썰매개 무리의 대장개는 오직 NO만을 말할 수 있다. 갈림길에서 개들이 잘못된 코스를 선택하면 대장개는 큰소리로 짖거나 목덜미를 물어 코스를 바로잡는다. 개들이 바른 길을 선택하면 대장개는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들은 차라리 대장개가 NO를 외쳐주기를 바라며 속도를 줄이고 머뭇거린다. 개사전에는 원래 YES가 없다. “대장이 왜 가만있지?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 대장개 – 멍(NO, 왜 멈췄멍?) ◎ 졸병개 – 아 코스를 바꾸라멍? 알았멍. ◎ 대장개 – 멍(NO, 아까 그 코스로 계속 가라니깐멍.) ◎ 졸병개 – 아 이 길이 아니구나. U턴이다. 근데 우리가 어느 길로 왔지? 개들은 애매한 YES보다 분명한 NO가 더 맘편한 것이다. 이는 진보의 원초적인 딜렘마다. 진보는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보수는 애초에 자기 의견이 없다. 단지 진보가 내놓는 의견을 비토할 뿐이다.
이때 보수는 일단 비토하고 보는 방법을 쓴다. 무조건 NO를 해야 한다. NO는 분명하지만 YES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NO는 그걸로 진로가 확정되지만 YES는 다시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 보수 – ‘오른쪽길입니까 왼쪽길입니까?’ ◎ 진보 – ‘당신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말입니까? 아니면 내 기준입니까?’ ◎ 보수 - ‘??? 헷갈려서 뭔 말인지 모르겠소. 죄송. 머리가 돌이라서.’ ◎ 보수 – ‘이 길이 틀렸습니까?’ ◎ 진보 – ‘NO’ ◎ 보수 – ‘아 그렇다면 이 길로 곧장 가면 되는군요.’ ◎ 보수 – ‘이 길이 틀렸습니까?’ ◎ 진보 – ‘YES’ ◎ 보수 – ‘그럼 어쩌지요??? 길은 삼거리다. 보수는 왔던 길 A와 자신이 임의로 찍은 길 B, 그리고 갈라지는 길 C 앞에서 찍은 길 B가 거부당하면 다시 A와 C 사이에서 헤맨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C로 가야하는지 판단을 못한다. 게다가 보수는 YES를 말하지 못하므로 ‘틀렸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밖에 없다. ◎ 이 길이 틀렸습니까?(하나의 길을 가리키면 된다.) ◎ 어느 길이 맞습니까?(두 개의 길을 가리켜야 한다. 이메가는 실패.) ‘이 길이 맞느냐?’는 질문은 개사전에 없다. 맞으면 계속 가지 왜 물어? 질문하려면 멈추어야 하고 멈추면 틀린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가 보수를 데리고 다닐 때는 조삼모사를 구사해야 한다. 빨간길로 인도하려면 파란길로 가겠다고 말해야 한다. 보수가 일제히 NO를 외친다. 그럴 때 빨간길로 가주면 된다. 국민의 80퍼센트가 햇볕정책을 지지한다. 그런데 선거만 하면 새누리당을 찍는 이유는 보수가 NO로만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자연어에는 NO와 NO-NO가 있을 뿐 YES는 없다. YES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보수의 사전에는 YES가 없기 때문에 진보가 뭐라하든 무조건 NO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수의 성공은 인류의 실패다. 보수는 노인복지를 원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요구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므로 노인복지는 오직 진보가 집권해서 노인복지를 하지 않을 때, NO를 외치는 방법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 진보가 집권해서 노인복지를 하면 그들은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로 복지해야 하느냐는 이차적인 판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복지를 하지 않을 때 그들이 NO를 외치면 진보가 복지를 하고, 이때 진보가 그들에게 재차 질문해서 원하는 바를 알아보면 된다. 보수들은 목표가 있을 때 존엄의 원리에 따라 일단 노인끼리 뭉친다. 대표를 뽑는다. 그런데 장님협회 회장은 장님이 맡아야 하는가? 노인회 회장은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맡아야 하는가? 그럼 곧 돌아가시잖아. 거지협회 회장은 거지 중의 상거지여야 하는가? 곤란하다. 노인회 회장은 청년이 해야 한다. 역설이다. 진보가 보수의 의중을 헤아려줘야 한다. 노인의 딜렘마다. 의사결정을 못하고 시간만 끄는 것이다. 메타포를 읽어야 한다. 빨갱이라는 말은 말이 안 통한다는 불만의 표현이다. 상대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우리는 불만을 말할 수 있지만 저쪽은 불만을 말할 수 없다. 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불만을 헤아리는 귀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 개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절차의 문제이다. 복지나 햇볕을 반대하는게 아니라 누구 허락맡고 하는가이다. 그들의 저항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삥 뜯을 권리를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이는 갑을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을은 갑에게 먼저 요구할 수 없다. ◎ 을 – 임금을 올려주시오. ◎ 갑 – 넌 해고야. ◎ 갑 – 임금을 깎겠어. ◎ 을 – 절대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한 번은 10만원 올려달라는 뜻. 안돼를 네 번 했으므로 40만원 인상을 요구한 셈이다.) ◎ 갑 – 그럼 올려주까? 얼마나? ◎ 을 – 백만원. ◎ 갑 – 넌 해고야. ◎ 을 – 주인님 뜻대로 하옵소서. 을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다. 말하면 해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해보는 일을 반대할 권리는 있다. 그 경우는 정당한 저항권의 행사이다. 보수는 제안권은 없고 단지 저항권만 있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게 되어 있다. 내심 찬성해도 발언권을 얻기 위해 일단 반대할 수 밖에 없다. 아들 – 결혼합니다. 엄마 – 이 결혼 반댈세. 아들 – 왜 반대하지요? 용돈을 적게 드려서 섭섭해서 그런가요? 엄마 – 꼭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엄마는 용돈올려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단지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방법으로만 간접적으로 의사표현이 가능하다. 권리에서 권력이 나온다. 권리가 갑이고 권력이 을이다. 권리를 진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보수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이러한 자연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근데 꼴통들은 무식해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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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진보에 동참하기.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구조론의 마이너스법칙 상 어떤 의사결정도 해롭습니다.
젊은이는 손해볼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무방하지만
기득권은 무조건 손해이므로 무조건 거부이지요.
젊은이는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경험쌓고
기득권은 성공하면 본전 실패하면 쪽박.
무조건 의사결정을 안 하는 쪽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사결정이든 결국 시스템 재구축으로 결정됩니다.
이 글을 읽고 문득 든 생각인데
한국을 비롯하여 러,중,북,일 등 동북아 국가들은
한결 같이 아무런 결정을 안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네요.
(동시에 개의 수준으로 하락)
그럼 이들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의사 표현을 하는 방법은
오로지 오바마의 결정에 No를 하는 것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네요.
특히 중국의 경우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포지션을 설정하고
주변 국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을 거부하고
과거의 사고방식에 머문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미국의 독주를 막고
힘의 균형을 잡는다는 의미에서는
가끔은 중국의 NO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만...
물론 그렇지만
중국이 지도자를 뽑는 방식을 보니
국제무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중국 지배층 엘리트들 개인 능력을 출중하고
중국이 아무리 큰 경제 성장을 한다해도
의사결정을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한다면
미국과의 관계에서
을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지금의 일본과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겠죠.
중국이 미국과 대등해질려면 경제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민주화 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1/5이
민주주의의 혜택을 못 받는 다는 것은
인류의 비극이지요.
중국이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이
인류에 대한 책임을 저버렸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뼈속 깊이 새겨볼만한 글이라고 생각되네요.
가슴아픈 글입니다.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소통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겪는 좌절은 선거제도 개정이나 헌법 개정 혹은
대연정을 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열린 우리당마저 해체되었을 때
이미 노무현 당신이 느꼈던 좌절을 이제서야 체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더욱 슬픈 것은 그의 좌절이 이만큼이나 절망적이고 가슴이 저미는
고통이란 걸 미처 몰랐다는 사실이고 그 고통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롯이 그에게 떠넘긴 채 방관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그 당시 노무현과 소통에 실패했던 한 사람일 뿐인 거죠.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는 없을 겁니다.
솔직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조차 그당시 사람들에게 배척당했던
걸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가 향하고자 하는 진보라는 길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길을 가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노무현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남긴 이 길을 차마 이대로 버려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당신의 그림자였던 문재인의 떠나는 뒷모습에서 부엉이 바위로
향하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더욱 슬프고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이 감당하고 참아왔던 고통이기에 결코 피하지 않을겁니다.
어쩌면 사람이 길들여진 개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은 희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꿋꿋이 이 자리를 지키려는 건
노무현 당신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을 그렇게 보낸 우리들의 속죄이기 때문입니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점수입니다.
돈오입니다.
보수는 자연의 한계에 갇힌 자들? 그러니 애초에 no or keep going 두가지 판단뿐?
혹시 에너지가 부족해서 보수일수 밖에 없는거 아닐까요?
에너지는 어떻게 해야 채워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