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망의 세계관을 깨달음
공(空)이나 무(無) 혹은 비움이나 내려놓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에 집착하고 내려놓는다고 말하며 내려놓음에 집착한다.
관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비우는 것이 도리어 채우는 것이고 놓는 것이 도리어 붙잡는 것이다.
석가는 인연(因緣)이라 했다. 인연이 곧 관계다. 비우고자 하는 즉 비움의 인연에 붙잡히고 내려놓고자 애쓰는 즉 내려놓음의 인연에 붙잡힌다.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알갱이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망의 네트워크로 되어 있다. 존재는 원자(原子)가 아닌 구조로 되어 있다
관계로 보면 세상에 고유한 것은 없으며 만유는 관계를 맺는 양 당사자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물질의 세계는 점과 선과 각과 입체와 공간으로 단계적인 집적상을 이룬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상과 같아서 우리는 이를 거꾸로 보고 있다.
관계로 보면 점(點)은 ●이 아니라 맞닿아 있는 두 당구공 사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두 당구공 사이에 만남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만남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色)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이고 공(空)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두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처럼 서로의 모습을 거꾸로 비춘다.
존재는 ●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이’들의 집합이다. 나와 너 사이다.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만남이 있다. 만남이 곧 인연이다.
원자 알갱이들이 모여 물질 존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은 색의 세계요 만남의 인연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 공의 세계다.
색의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과 같은 허상의 세계요 그림자의 세계다. 진상으로 보면 세상은 만남이 있고 관계가 있고 인연이 있을 뿐이다.
만남이 모여 맞물림을 이루고 맞물림이 모여 함께서기를 이루고 함께서기가 모여 하나되기를 이루고 하나되기가 모여 소통을 이룬다.
◎ 색(色) - 세상은 ●들의 집합이다.
◎ 공(空) - 세상은 ●와 ●의 사이에 있는 만남들의 집합이다.
●와 ●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아니다. ●와 ● 사이에 만남이 있다. 세상은 만남의 집합이다.
입버릇처럼 비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비우지 못한 사람이고 입버릇처럼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움도 만남이고 내려놓음도 만남이다. 비움도 관계고 내려놓음도 관계다. 비움도 인연이고 내려놓음도 인연이다. 그렇게 인연은 쌓여만 간다.
무(無)는 무가 아니고 공(空)은 공이 아니다. 무(無)는 사이고 사이에 만남이 있고 만남은 인연을 이루고 인연은 관계맺기다. 이미 관계를 맺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의 인연을 쌓고 놓는다고 말하며 놓음의 인연을 쌓는다. 비움과 놓음과 공(空)과 무(無)에 집착하는 한 그 인연 끊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때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이 비운 사람이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비운 사람이다.
맥락을 깨달음
언어와 그 언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철학자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은 내가 구축한 나의 언어들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누군가가 반론하여 ‘아니다. 나는 인생을 낙(樂)으로 본다’ 하고 대든다면 어떨까? 틀렸다.
고집멸도의 사성제 전체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성제 안에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율의 시스템 구조가 숨어 있다.
비판하려면 석가의 고(苦)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인과논리의 이야기구조를 비판해야 한다. 이렇듯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 맥락이다.
나는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비참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비참과 구원을 짝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인가 아닌가를 논하려 든다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석가가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짝지어 보이듯이 비참과 구원, 단절과 소통을 짝지어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선과 악이 짝을 짓듯이 미와 추가 짝을 짓듯이 자유와 억압이 짝을 짓듯이 구원과 비참이 짝을 짓는다. 어떻게 짝을 짓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개념들을 짝 지어 보인다. 하나의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그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맥락이다.
내가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꽃도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다'고 우기며 참견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내가 미인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미인의 뱃속을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면 전혀 예쁘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세상이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이와 같은 무지는 극복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 있다.
꽃이 아름다운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관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간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아직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꽃이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움을 매개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이 선하면 그 선을 매개로 사회는 의사소통을 한다.
물론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 미인도 화장실에서는 추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인간도 악한 점이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소통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맥락을 아는 것이다. 맥락을 알게 되면 세상에 논쟁할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논쟁은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니 보수니 혹은 좌파니 우파니 혹은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세상의 모든 논쟁이 언어와 맥락에 대한 깨달음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과 대립과 갈등과 오해가 일거에 해소된다.
선과 악, 음과 양, 여와 남, 밤과 낮, 하늘과 땅이 대립하지 않는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흐름 가운데 있다.
달리는 자동차의 앞과 뒤는 대립하지 않는다. 앞과 뒤가 대립하는 것은 그 자동차가 쓰임새를 잃고 그만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인생은 비참한가 아름다운가 만약 그렇게 질문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자동차를 멈추어 세운 것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말했지만 이는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당신이 ‘인생은 낙(樂)이야’ 하고 반론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집과 멸과 도가 스스로 그 고(苦)를 해체해 버린다. 위대한 반전이 그 가운데 있다.
나는 인생은 비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격하려는 찰나 바로 이어지는 구원에 의해 그 비참은 해소되어 버린다.
석가의 인연은 곧 인과법칙이다. 인과는 색과 공 그리고 공과 색 사이의 인과관계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숨은 것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도(道)가 있다. 고집멸도의 도(道)다. 도(道)는 길이다. 길은 정거장과 정거장을 잇는다. 잇는 것이 관계다. 도가 관계다.
인생은 비참과 구원 사이에 있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는 말은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더 완성되어지기를 소망해야 하고 스스로 더 세련되어지고 고상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는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만나고자 하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조언은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려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창호를 만나 바둑을 두려면 이창호 만큼은 두어야 한다.
이창호와 한 판을 두고 싶은데 두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참이다. 이창호만큼 실력이 늘어서 이창호와 한 판을 둔다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럴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은 최고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그 이외에 인생에 신통한 일은 없다.
언어의 쓰임새를 깨달음
‘자유는 사랑할 자유다.’ 이것은 나의 말이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지어 보이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춘향의 사랑은 춘향의 자유에 연동되어 있다. 춘향은 기생이고 기생은 천민이다. 그러므로 춘향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므로 사랑할 수 없다.
춘향이 자유를 쟁취한 즉 사랑을 쟁취한 것이다. 자유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다. 선과 악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듯 비참과 구원이 동전의 양면이 되듯 자유와 사랑은 한묶음이다.
자유와 사랑과 함께 선다. 자유가 서면 사랑이 서고 자유가 쓰러지면 사랑도 쓰러진다. 깨달음은 대자유에 서는 것이고 그것은 큰 사랑을 세우는 것이다.
사랑없는 자유가 무의미라면 자유 없는 사랑은 불가능이다. 자유가 약했던 왕조시대에 사랑도 약했다. 그때는 정략결혼이 다반사였다.
인류의 자유가 신장되어 온 만큼 사랑도 심화되어 왔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자유의 폭을 신장하는 것이며 그 결실은 사랑의 질을 심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얼핏 보기에 관련이 없어보이는 두 단어를 짝지어 보임으로써 자유와 사랑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확장해 보인다.
이렇듯 나는 미학을 이야기하고 소통을 이야기한다. 영성을 이야기하고 관(觀)을 이야기하고 심(心)을 이야기하고 날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깨달음은 그렇게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고 확장해 보이기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논쟁이 해소되고 모든 분란이 가라앉는다.
공(空)이나 무(無) 혹은 비움이나 내려놓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에 집착하고 내려놓는다고 말하며 내려놓음에 집착한다.
관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비우는 것이 도리어 채우는 것이고 놓는 것이 도리어 붙잡는 것이다.
석가는 인연(因緣)이라 했다. 인연이 곧 관계다. 비우고자 하는 즉 비움의 인연에 붙잡히고 내려놓고자 애쓰는 즉 내려놓음의 인연에 붙잡힌다.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알갱이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망의 네트워크로 되어 있다. 존재는 원자(原子)가 아닌 구조로 되어 있다
관계로 보면 세상에 고유한 것은 없으며 만유는 관계를 맺는 양 당사자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물질의 세계는 점과 선과 각과 입체와 공간으로 단계적인 집적상을 이룬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상과 같아서 우리는 이를 거꾸로 보고 있다.
관계로 보면 점(點)은 ●이 아니라 맞닿아 있는 두 당구공 사이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두 당구공 사이에 만남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만남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色)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이고 공(空)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두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처럼 서로의 모습을 거꾸로 비춘다.
존재는 ●들의 집합이 아니라 ‘사이’들의 집합이다. 나와 너 사이다. 나와 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만남이 있다. 만남이 곧 인연이다.
원자 알갱이들이 모여 물질 존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은 색의 세계요 만남의 인연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 공의 세계다.
색의 세계는 거울에 맺힌 상과 같은 허상의 세계요 그림자의 세계다. 진상으로 보면 세상은 만남이 있고 관계가 있고 인연이 있을 뿐이다.
만남이 모여 맞물림을 이루고 맞물림이 모여 함께서기를 이루고 함께서기가 모여 하나되기를 이루고 하나되기가 모여 소통을 이룬다.
◎ 색(色) - 세상은 ●들의 집합이다.
◎ 공(空) - 세상은 ●와 ●의 사이에 있는 만남들의 집합이다.
●와 ● 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것들의 집합이다. 아니다. ●와 ● 사이에 만남이 있다. 세상은 만남의 집합이다.
입버릇처럼 비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비우지 못한 사람이고 입버릇처럼 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움도 만남이고 내려놓음도 만남이다. 비움도 관계고 내려놓음도 관계다. 비움도 인연이고 내려놓음도 인연이다. 그렇게 인연은 쌓여만 간다.
무(無)는 무가 아니고 공(空)은 공이 아니다. 무(無)는 사이고 사이에 만남이 있고 만남은 인연을 이루고 인연은 관계맺기다. 이미 관계를 맺었다.
비운다고 말하며 비움의 인연을 쌓고 놓는다고 말하며 놓음의 인연을 쌓는다. 비움과 놓음과 공(空)과 무(無)에 집착하는 한 그 인연 끊지 못한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때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이 비운 사람이고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비운 사람이다.
맥락을 깨달음
언어와 그 언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한다. 철학자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는 사람이다. 이 기록은 내가 구축한 나의 언어들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누군가가 반론하여 ‘아니다. 나는 인생을 낙(樂)으로 본다’ 하고 대든다면 어떨까? 틀렸다.
고집멸도의 사성제 전체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성제 안에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율의 시스템 구조가 숨어 있다.
비판하려면 석가의 고(苦)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인과논리의 이야기구조를 비판해야 한다. 이렇듯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 맥락이다.
나는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비참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렸다. 비참과 구원을 짝 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인가 아닌가를 논하려 든다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석가가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짝지어 보이듯이 비참과 구원, 단절과 소통을 짝지어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선과 악이 짝을 짓듯이 미와 추가 짝을 짓듯이 자유와 억압이 짝을 짓듯이 구원과 비참이 짝을 짓는다. 어떻게 짝을 짓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개념들을 짝 지어 보인다. 하나의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그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맥락이다.
내가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꽃도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다'고 우기며 참견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내가 미인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누군가가 미인의 뱃속을 내시경으로 들여다 보면 전혀 예쁘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그 사람과 논쟁해야 할까?
세상이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이와 같은 무지는 극복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에 있다.
꽃이 아름다운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관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색즉시공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간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논쟁하는 사람은 아직 관계망의 세계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다. 관계로 보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꽃이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움을 매개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한다. 인간이 선하면 그 선을 매개로 사회는 의사소통을 한다.
물론 장미에도 가시가 있다. 미인도 화장실에서는 추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인간도 악한 점이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소통하지는 않는다.
소통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맥락을 아는 것이다. 맥락을 알게 되면 세상에 논쟁할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논쟁은 언어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니 보수니 혹은 좌파니 우파니 혹은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세상의 모든 논쟁이 언어와 맥락에 대한 깨달음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과 대립과 갈등과 오해가 일거에 해소된다.
선과 악, 음과 양, 여와 남, 밤과 낮, 하늘과 땅이 대립하지 않는다. 소통의 관점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흐름 가운데 있다.
달리는 자동차의 앞과 뒤는 대립하지 않는다. 앞과 뒤가 대립하는 것은 그 자동차가 쓰임새를 잃고 그만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인생은 비참한가 아름다운가 만약 그렇게 질문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자동차를 멈추어 세운 것이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라고 말했지만 이는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가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당신이 ‘인생은 낙(樂)이야’ 하고 반론하려는 찰나 이어지는 집과 멸과 도가 스스로 그 고(苦)를 해체해 버린다. 위대한 반전이 그 가운데 있다.
나는 인생은 비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격하려는 찰나 바로 이어지는 구원에 의해 그 비참은 해소되어 버린다.
석가의 인연은 곧 인과법칙이다. 인과는 색과 공 그리고 공과 색 사이의 인과관계다.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숨은 것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도(道)가 있다. 고집멸도의 도(道)다. 도(道)는 길이다. 길은 정거장과 정거장을 잇는다. 잇는 것이 관계다. 도가 관계다.
인생은 비참과 구원 사이에 있다. 비참은 고립이고 구원은 만남이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는 말은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더 완성되어지기를 소망해야 하고 스스로 더 세련되어지고 고상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글쓰기는 당신이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만나고자 하는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조언은 이상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미학적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려면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창호를 만나 바둑을 두려면 이창호 만큼은 두어야 한다.
이창호와 한 판을 두고 싶은데 두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참이다. 이창호만큼 실력이 늘어서 이창호와 한 판을 둔다면 그것이 구원이다.
그럴 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은 최고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그 이외에 인생에 신통한 일은 없다.
언어의 쓰임새를 깨달음
‘자유는 사랑할 자유다.’ 이것은 나의 말이다. 자유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지어 보이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구축하여 보이는 것이다.
춘향의 사랑은 춘향의 자유에 연동되어 있다. 춘향은 기생이고 기생은 천민이다. 그러므로 춘향에게는 자유가 없다. 자유가 없으므로 사랑할 수 없다.
춘향이 자유를 쟁취한 즉 사랑을 쟁취한 것이다. 자유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뗄 수 없다. 선과 악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듯 비참과 구원이 동전의 양면이 되듯 자유와 사랑은 한묶음이다.
자유와 사랑과 함께 선다. 자유가 서면 사랑이 서고 자유가 쓰러지면 사랑도 쓰러진다. 깨달음은 대자유에 서는 것이고 그것은 큰 사랑을 세우는 것이다.
사랑없는 자유가 무의미라면 자유 없는 사랑은 불가능이다. 자유가 약했던 왕조시대에 사랑도 약했다. 그때는 정략결혼이 다반사였다.
인류의 자유가 신장되어 온 만큼 사랑도 심화되어 왔다. 인류문명의 진보는 자유의 폭을 신장하는 것이며 그 결실은 사랑의 질을 심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자유와 사랑이라는 얼핏 보기에 관련이 없어보이는 두 단어를 짝지어 보임으로써 자유와 사랑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확장해 보인다.
이렇듯 나는 미학을 이야기하고 소통을 이야기한다. 영성을 이야기하고 관(觀)을 이야기하고 심(心)을 이야기하고 날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깨달음은 그렇게 언어의 쓰임새를 구축하고 확장해 보이기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논쟁이 해소되고 모든 분란이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