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출범 


어떤 사상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반대편을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상은 기존의 사상에 대한 안티의 형태로 출발한다. 진화론은 창조론의 안티다. 자본론은 국부론의 반대다. 지동설은 천동설의 안티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서구 구조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중앙집권적, 권위적 요소에 반기를 든다. 이런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포지셔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안티가 없다. 구조론은 총괄이론이다. 모든 이론에 선행하는 이론이다. 산의 기슭은 앞뒤가 있지만 정상은 앞뒤가 없다. 홀로 우뚝할 뿐이다. 시소의 마주보는 두 날개가 아니라 가운데 축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교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구조론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구조론의 안티는 원자론적 세계관이다. 구조론은 어떤 대상 내부의 고유한 속성 혹은 그 구성요소들이 가지는 고유한 성질에 의해 그 존재가 결정된다는 일반의 통념에 반기를 든다. 세상 모든 것은 포지션이 결정한다.

 
요소가 가진 속성의 합이 전체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일반의 통념은 틀렸다. 예컨대 이런 거다. 이스라엘의 구성요소는 유태인이다. 유태인이 가진 성질의 합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 경우 이스라엘을 알고자 한다면 유태인의 성질을 분석하면 된다.

 
과연 그럴까? 이런 식의 접근은 저급한 인종주의를 낳을 뿐이다. 포지션을 봐야 한다. 누구든 골키퍼가 되면 손으로 공을 잡으려 하고 공격수가 되면 발로 공을 차려고 한다. 역할이 존재를 규정한다. 일본인도 한국에 데려다 놓으면 한국인이 된다. 중국인도 한국에 오면 한국인이 된다. 한국인의 기질은 반도라는 포지션이 만든 것이며, 중국인의 기질은 역시 대륙이라는 포지션이 만든 것이다. 일본인의 섬나라 기질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유태인이 대륙을 방랑할 때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성질을 가졌으나 지금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에게 포위되어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유태인도 국가없는 민족의 절박한 생존의지가 작동하여 일부 배타적인 측면은 분명히 있었다. 유태인의 개방적 측면과 배타적 측면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의 관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스템 안에서 각자 어떻게 포지셔닝 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므로 어떤 대상이든 그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낱낱이 분석할 필요는 없고 단지 포지션만 파악하면 된다. 곧바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일이 매우 줄어든다. 유태인을 낱낱이 분석하면 일이 매우 많아진다. 배가 산으로 가서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유태인도 각자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로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포지션으로 보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