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3696 vote 0 2002.09.22 (14:17:14)

'성소'의 성공과 실패

영화로 써먹을만한 소재와 방법들은 이미 다 알려졌고, 먼저온 사람들이 오래전에 다 써먹어버렸다. 후발주자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야 한다.

우리가 판단해야할 내용은 과연 장선우의 방법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루트가 건설되어 있는가이다. 장선우는 많은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1회용에 그쳤다. 실험이 실험으로 끝난 것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전인미답의 새로운 산을 발견하고 거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는 것이 장선우의 역할이다. 장선우는 이산 저산에다 부지런히 캠프를 쳤다. 그러나 장선우의 베이스캠프를 활용하여 거기에다 제 2, 제 3의 전진캠프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결론은 언제나 "이 산이 아닌게벼!"였다.

성소는 무리한 기획으로 돈을 낭비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충분히 베이스캠프 역할을 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성소에서 영감을 얻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실험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고 2라운드와 3라운드가 계속될 것이다. 장선우가 하지 않으면 누구 다른 사람이 할 것이다.

'성소'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열가지도 넘게 찾아낼 수 있다. 블록버스터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것이 무리였다.

간단하게 세가지만 짚고 넘어가면 첫째 드라마왕국인 한국에서 드라마가 없다면 게임 끝이다. 드라마는 복수극이다. 악당이 사고를 치면 정의의 사나이가 짠하고 나타나 악당을 응징한다는 헐리우드식 수법이다. 유치하지만 흥행을 하려면 헐리우드식의 복수극이어야 한다.

둘째 멜로가 약하다. 한국에서는 코미디 아니면 멜로다. 한국은 영화시장이 좁기 때문에 모든 관객의 구미를 맞추는 쪽으로 기획할 수 밖에 없다. 드라마, 액션, 코믹, 멜로, 스타시스템 중 하나라도 빠지면 흥행을 기대해서 안된다.

셋째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너무 낮다. 청소년만 등장하는 성장영화는 절대로 망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나 '세친구'를 연상할 수 있다. 청소년이 주인공이면 반드시 '브루스 윌리스' 쯤의 노숙한 아저씨와 콤비를 이루어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를 관찰해보면 청소년이 어떤 계기로 성숙해진다는 성장영화에는 반드시 원숙한 아저씨가 콤비로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소'에서는 그 어른이 없다. 굳이 꿰맞추자면 '추풍낙엽' 명계남이 어른역할이 되지만 약하다.

이 밖에도 제목부터 시작해서, 10여가지 이상에서 흥행공식과 맞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여부를 떠나 성공한 측면 두가지를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는 소재주의의 극복이다. 조폭영화를 예로 들수 있다.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이 절로 들어가거나 '두사부일체'에서 조폭이 학교로 가거나 '조폭마누라'에서 마누라가 조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거나는 조폭을 소재로 빌렸을 뿐 조폭영화가 아니다. 가짜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시리즈는 마피아를 소재로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피아를 다루고 있다. 이건 진짜다.

게임을 소재로 빌려서는 진짜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재미없는 만화에 잘 등장하는 꿈이야기와 비슷하다. 흥미진진한 장면이 한참 이어진다. 재미있다 싶을 때 '꿈이야!'하고 침대위에서 벌떡 깨어난다. 이건 정말 한심하다.

'매트릭스'는 거대한 꿈이다. 막판에 기술적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주인공들은 시험관 안에 갖혀 꿈을 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관에 갖힌 인간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시점에서 영화는 끝났다. 그 이후는 군더더기이며 이는 본질에서 실패한 영화를 기술적으로 매끄럽게 마무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상현실'은 결국 꿈이다. 눈뜨고 꿈을 꾸면 게임이고, 눈 감고 꾸을 꾸면 dream이다. 차이는 없다. 아바론도 환청이 시끄럽고 환상이 요란한 지루한 꿈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소'는 두가지 버전의 결말이 제시된다. 하나는 꿈에서 깨어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뻥이야!"를 외치고 3류만화로 돌아간 것이다. 졸렬하다. 두 번째 버전은 꿈인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라 현실이더라는 이야기다.

(이 부분은 다수의 관객에 이해되지 못했다. 너무 어렵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선우는 첫 번째 버전으로 편집을 마치고 기자시사회까지 열었다가 "이거는 망하는 버전이야!"하면서 두 번째 버전을 추가하였다 한다. 망하는 버전 뒤에 안망하는 버전(?)을 억지로 끼워넣다니 엉망진창이다. 이렇게 뒤죽박죽이어도 되나?)

어쨌던 두 번째 버전이 이 영화의 정답이다. 어떤 경우에도 "뻥이야!"를 외쳐서는 안된다. 영화는 꿈이기 때문에 드라마는 결코 꿈이 아니어야 한다.

앞부분에 '주'가 이 영화의 제작사인 튜브엔터테인먼트에 짜장면배달을 오는 신이 있다. 라조기, 류산슬, 깐풍기 등 고급요리를 잔뜩 배달한다. 직원들은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으니 그냥 나가라고 한다. 주는 배달통에서 기관총을 꺼내 갈겨버린다. 재미있다.

잠시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박살났던 회사는 멀쩡하다. 그렇다면 조금전 총으로 갈겨버린 사건은 주의 상상이었단 말인가? 깨몽이다.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사실 이 부분은 각본과 편집의 실패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실은 기관총을 갈겨버린 상황이 현실이고 짜장면 배달이 오히려 가상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이해못하는 것은 이 영화가 롤role플레잉playing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플레이어(관객)들에게 롤role을 부여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메시지는 대다수 관객들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장자의 나비꿈이 아니라 나비의 장자꿈이다. 즉 관객이 이 게임의 플레이어(주)가 되는 것이다.

그 회사가 다른 회사가 아니고 이 게임(영화)을 제작한 튜브엔터테인먼트라는 점에 주목했어야 한다. 게임에 접속한 플레이어(주)가 게임회사를 부숴버린 것이다. 왜 회사를 부숴버렸을까? 그것은 관객인 여러분이 이미 게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다.

관객들은 주가 부숴버린 회사가 이 영화를 제작한 '튜브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장선우 혼자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아니다. 직관적으로 느꼈을 뿐 어쩌면 장선우 본인도 이해 못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 게임이라 하지만 실은 게임이 아니라 영화다. '주'가 영화사인 튜브엔터테인먼트를 부숴버렸으므로 영화는 사라졌다. 관객 여러분이 게임 속에 들어와있는 상황에서 그 게임의 출구가 되는 영화사 튜브엔터테인먼트가 박살나버렸기 때문에 게임에서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문은 사라져버렸다. 여러분은 게임 속에 갖혀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내 손에는 마우스와 자판이 주어지고 눈앞에 모니터가 켜진 것이다. 영화 스크린이 컴퓨터 모니터로 바뀌어버렸다.(그 장면에서 감독이 관객인 자신에게 롤role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관객이 몇이나 될까? 어렵다.)

연극이라면 이런 일은 흔히 있다. 배우가 관객인 척하고 객석에 앉아 있기도 하고, 관객을 무대로 불러 배역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관객에게 롤role을 부여하는 이런 시도는 아마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밖에도 영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롤을 부여한다. 끊임없이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러한 장면들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짜증난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무지 재미있다.

현명한 관객들은 그 순간 감독이 자신에게 롤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롤플레잉을 벌여나간다. 롤플레잉이라면 게임마다 유행하는 공성전을 들 수 있다. 성벽을 사이에두고 수백명의 캐릭터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난투를 벌인다. 집단 패싸움이다.

거기에는 미션이 없다. 전략시뮬레이션과 달리 플레이어에게는 미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롤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롤을 깨닫지 못하고 미션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많은 장면들에서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감독의 잘못도 크다. 관객들이 '주'에게 '성소를 구출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실은 '주'가 성소를 구출할 이유는 없다. 원래 롤플레잉게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미션이 없다. 공성전은 패싸움 자체를 즐기는 것이지 승패는 상관없다.

장선우가 롤플레잉게임과 전략시뮬레이션을 구분 못하므로서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는 했지만 이러한 점을 볼 때 스타일의 혁신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곧 게임을 소재로 한, '게임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거꾸로 영화가 곧 게임이 되어버렸다.

관객은 게임을 하는 주인공들을 객석에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뛰어들어 배우들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 튜브엔터테인먼트가 박살나는 순간 모든 관객은 공성전에 가담한 플레이어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느 독자분이 성소가 갑자기 라이터를 사지 않는 시민들에게 총을 쏴대는 이유를 필자에게 질문하였기에 롤플레잉게임의 의미를 덧붙이겠다.

성소가 총을 쏘는 이유는 그것이 성소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라이터를 사라고 해서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상대방을 죽이는 게임이다. 라이터를 사야 플레이어가 이기고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지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규칙을 시스템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가 멋대로 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는 '성소버그'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의미없다. "아 버그 때문이구나. 게임에 버그가 발생했구나!" 이렇게 받아들인 관객들은 이 영화를 즐기지 못한다. 버그가 아니라 그의 게임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개구리왕자이야기에 댈 수 있다. 공주가 키스를 하면 개구리가 왕자로 변한다. 성소는 주와 하룻밤 동숙했기 때문에 마법이 풀려 인간으로 변했다.(둘은 뽀뽀라도 했을거다. 15세미만 관람가로 만드느라 키스신을 안넣었지만 성인버전이면 섹스신이어도 좋다. 처녀와 총각이 한 방에서 하룻밤 잤다면 얘기 끝난거 아닌가?) 근데 어디까지나 게임이므로 이런 논리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영화가 아니라 게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게임이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대응이 즉석에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롤(캐릭터)을 가지고 있다. 즉 각자 자신만의 게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게임 특유의 즉흥성은 영화에서 여러번 강조된다. 예컨데 '일당들이 어디로 갔지?" 하고 묻자 '어디로 가긴 나이트로 갔지." 하며 곧장 나이트클럽을 습격하는데 과연 일당들이 나이트클럽에 모여 있다.

이런 부분은 영화가 아니라 게임임을 부각시키는 장치다. 요런 장치들이 기가 막히게 재미가 있다. 게임은 로드가 한정되어 있다. 축구게임이라면 모든 선수는 그라운드 안의 어느곳에 있다. 이쪽에 아니면 저쪽에 있다. 이쪽에 없으므로 저쪽에 있다.

롤플레잉게임에서 각자는 각자의 롤(게임)을 가지고 있다. 오뎅의 게임은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먹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게임이다. 라라의 게임은 '라라 크로퍼트'를 흉내내는 것이다. 5인조의 게임은 조폭놀이를 하는 것이고, 추풍낙엽은 정보를 팔아먹는 것이 그의 게임이다. 각자는 각자 자신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미션mission이 아니라 롤role이다)

주인공인 '주'의 게임은 성소를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규칙'은 주가 멋대로 정한 것이다. 원래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에 '성소를 구출하라'는 미션은 없다.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은 '성소를 얼어죽게 만들라'는 것이다.

주는 임의로 '성소를 구출하라'는 자기만의 게임을 만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게임이다. 성소는 자기 게임이 없다. 성소는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의 키스를 받고 마법이 풀린 개구리왕자처럼 주와 하룻밤 동숙하고 성소는 문득 플레이어가 된다. 성소의 게임은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재밌다.

이 영화의 재미는 관객 각자에게 각자의 롤role을 부여하는 과정에 있는데 어려웠으므로 대다수 관객들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는 미션을 찾으려 했다. 이는 패러디영화에서 패러디장면을 찾으려 들지 않고 줄거리를 따라가려 하는 것과 같다.

패러디영화는 이 장면이 어떤 영화를 패러디하고 있는지를 모르면 조금도 재미가 없다. 주인공에게 성소를 구출하라는 미션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면 재미가 없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더욱 재미가 있다. 오락실 알바생 희미는 '성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희미가 곧 성소라는 판단은 관객 여러분이 멋대로 정한 것이다. 영화는 관객들이 그러한 착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말하자면 감독이 관객 여러분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리자. 필자는 이 영화가 눈에 띄는 허접함들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이유 두가지를 말하려 한다. 하나는 스타일의 혁신여부이고 하나는 구도영화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장선우식 구도영화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를 엿보기로 하고 스타일의 혁신 여부만을 논하기로 하자.

매트릭스와 달리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다. 문득 꿈에서 깨어나 꿈을 한탄하는 즉 "뻥이야!"를 외치는 '깨몽영화'가 아니라, 이를 뒤집어 꿈이 오히려 현실임을 알리는 '전복의 영화'가 되는데 적어도 절반은 성공하고 있다.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전복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아바론은 깨어나 보니 꿈이더라는 식의 소재주의에 함몰되고 있다. 성소는 매트릭스의 남긴 국물을 우려먹은 것이 아니라 전인미답의 새로운 산을 발견하고 거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것이다.

물론 이제 겨우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을 뿐이다. 아직 그 에베르스트가 정복된 것은 아니다. 장선우는 20여년간 이산 저산에다 캠프를 쳤지만 언제나 결론은 "이 산이 아닌게벼!"였다. 실험은 실험으로 끝났다.

한번 금기를 깨고 어떤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면 거대한 새로운 지평이 펼쳐진다. 거기에서 신천지를 발견해도 좋다. 그것은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 게임과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진 다음 감독과 관객이 서로 짜고 게임을 벌이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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