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수행법
[아무것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했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이다' 했다. 삿된 길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 말을 금과옥조로 떠받든다. 참된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단 어떤 것을 알기 이전에 앎을 먼저 알아야 하고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함을 먼저 행해야 한다. 아느냐 모르느냐,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알고 행함에 있어서 그 순서와 방향을 지키는가가 중요하다.
'모른다, nothing, 無' 어떤 명상가는 늘 이 한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곤 한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다. '당신은 아까부터 줄곧 /모른다/ 이 한마디를 언제 써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차있었지 않소?'
'아무것도 모른다'는 귀납적 지식을 이끌어내는 외부의 단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배후에서 모든 것을 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식은 신의 것을 빌린 바 되므로 인간은 알 필요가 없다. 만사는 신이 하는 일이므로 인간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는 신을 친구로 사귀어 둔 사람만 할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의 언어는 100프로 연역의 산물이며 연역은 외부의 단서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내 언어는 모두 나의 지어낸 바 되니 소설일 뿐이다. 나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설을 지어내었을 뿐이다.
진리의 보편성에 의하여 그 소설이 소설의 원리에 맞다면 또한 우주의 원리와도 일치할 수밖에 없으니 구태여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외부와 일체의 접촉을 차단하고 100프로 나의 내부에서 지어낸 소설이 과학자들이 1000년을 연구해서 알아낸 지식과 다름이 없다. 진리가 그렇게 연출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한다]
無知의 知와 無爲의 爲,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사상은 비슷하다. 그러나 남긴 길은 정반대이다. 플라톤과 이후 서양정신사의 계보는 소크라테스의 無知에서 知로 옮아왔다. 장자 이후 동양정신의 계보는 무위에서 실천으로 옮아가지 않고 무위 그 자체를 체화해버렸다.
소크라테스가 있던 집을 무너뜨리고 터를 닦았다면 플라톤은 주춧돌을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지속적으로 층수를 높여온 것이 서양정신사이다. 그들은 힘을 합쳐 거대한 집을 지었다. 동양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명의 소크라테스는 필요없다. 두명의 노자는 필요없다. 소크라테스가 터를 닦았으면 플라톤은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가 넓힌 터를 더욱 넓혀놓았다. 그들은 영원히 터나 닦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2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플라톤목수의 쓸만한 집은 2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너무 낡고 비좁은 집이 되어 있다. 이젠 깨부셔야 한다. 죄다 헐어버리고 다시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발달된 건축기술이 남아있다. 노자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21세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다시 소크라테스와 노자로 돌아가야 한다. 둘은 손잡아야 한다.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두 정신이 2500년만에 만나 하나된다. 우리에게는 닦아놓은 너른 터와 비축된 에네르기가 있다. 그들에겐 발달된 건축기술이 있다.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이 힘을 합쳐 새로운 정신의 집을 짓는다.
[깨달음에서 실천으로]
산파법이란 무엇인가? 귀납적사고는 반드시 외부에서 유입된 어떤 단서로부터 출발한다. 그점을 잊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추궁한다. 결국 고백한다. 그들이 막연하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단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단서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리 빛나는 논리도 반드시 씨앗이 되는 어떤 단서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은 대개 터무니없는 맹신이었음이 폭로된다.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플라톤은 더욱 많은 단서, 쓸만한 건축자재를 모아왔다. 일견 그럴 듯 해보인다. 25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집짓는 기술은 쓸만하나 집은 가짜다.
노자들은 어떤가? 공자 맹자 목수들이 집을 짓고 있으면 옆에 와서 잔소리를 한다. '이봐요 공목수 맹목수 그게 아니라니깐. 그건 가짜라구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들은 가짜를 비토할 뿐 진짜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서양집이 비록 엉터리이나 건축기술은 남았는데 비해 동양집에는 남은 것이 없다.
딴지걸기에 재미붙어서 안된다. 반대하기 위한 반대여서 안된다. 무위하기 위한 무위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재미들어버렸다. 놀이로 만들어 버렸다. 참된 길은 무엇인가?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진정한 만남이다.
깨닫기 위한 깨달음은 가짜다. 실천하기 위한 깨달음이다. 노자는 하나로 충분하다. 모두가 노자가 되려해서는 안된다. 이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을 한다.
[대승적 자세와 소승적 자세]
플라톤의 계승발전은 대승의 길이요 장자의 훈고답습은 소승의 길이다. 실천에 있어서는 전술적, 대승적자세이어야 하고 삶에 있어서는 전략적 소승적이어야 한다. 자기 앞에서는 노자같아야 하고 타인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아야 한다.
우리 이 둘을 착각해서는 안된다. '모른다, 無, nothing'는 자기자신에게 해야할 말이지 타인에게 할말이 아니다. 무릇 타인 앞에서, 사회 앞에서는 대승적, 전술적이어야 하고 자기 앞에서는 소승적 전략적이어야 한다.
명상법은 타인에게 인사하는 법이요, 수행법은 자기에게 인사하는 법이다. 둘은 하나이나 다르다. 명상은 간단하고 쉬우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수행은 어렵고 치열하며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무릇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기에게 엄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정신의 길은 타인에게 하는 식이요 노자 이후 동양정신의 길은 자기에게 하는 식이다. 우리는 줄곧 이를 혼동해왔다. 양자는 만나야 한다. 우리는 대승적 관대함과 소승적 치열함을 겸해야 한다.
명상법은 간단하다. 정신차리면 보인다. 수행법은 험난하다. 換骨奪胎가 아니고서 안된다. 타인에게는 명상을 권하고 자기에게는 수행을 권한다. 수행은 명상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마저도 깨는 것이다.
판소리꾼은 먼저 배우고 다음 독공한다. 먼저 깨닫고 다음 수행한다. 수행은 필요없다. 돈오돈수다.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은 자는 수행하지 않을수 없다. 미끄러지듯 빨려들어간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소크라테스를 이해한 자는 소크라테스의 길을 가지 않는다. 노자를 이해한 자는 타인에게 노자의 길을 권유하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수행한다.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는 없다. 수행자는 수행은 권유하지 않는다.
제자가 스승이 갔던 길을 두 번 갈 필요는 없다. 내가 간 길을 가라고 말하는 스승은 가짜다. 나는 수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사로운 체험이다. 이 길을 가라는 것이 아니다. 한번 빠져든 자는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
하나의 구역에 두사람이 산다면 마찰한다. 해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규칙을 정하는 것이 하나이고 영역을 넓히는 것이 다음이다. 규칙정하기가 윤리와 도덕이라면 영역넓히기는 자유와 해방이다.
철학의 법은 자유와 해방의 길이요 과학의 방법은 윤리와 도덕의 틀이다. 해방은 내면의 영토확장이며 자유는 해방의 외화이다. 명상은 자유에 가깝고 수행은 해방에 가깝다. 깨달음은 해방의 완성이자 자유의 시작이다.
윤리, 도덕 그리고 자유와 해방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흔히 수행자는 세속적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진다. 과연 교리나 계율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여기 혼동해서 안되는 미묘한 함정이 있다. 규칙정하기와 영역넓히기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의 세속적 가치를 얻는 길이요 필연 타인의 인생에 대한 개입을 전제한다. 자유와 해방은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의 초극에 이르는 길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획득이다.
깨달음이 사랑과 행복을 준다면 거짓말이다. 깨달아 얻을 것은 없다. 세속적 가치와 명상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세속적 가치를 부인할 수는 없다. 허나 그에 앞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수행을 통해 세속적 가치를 얻으리라는 착각은 말라. 자유와 해방으로서 사랑과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을 버림으로서 자유와 해방에 이른다. 수행의 가치는 인생 전반을 규율하는 보편가치요 사랑과 행복은 어떤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 하나의 행동에 대한 특수가치다.
게임에 비유될수 있다. 그 게임을 할것인가 말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이라면 게임을 하기로 작정한 후 게임에 충실하는 것이 윤리와 도덕이다. 윤리와 도덕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러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는 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여 관계를 맺었다면 책임져야 한다. 곧 윤리 도덕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지의 여부는 그대의 자유이다.
수행은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개입하지 말라한다. 이미 개입하였거든 그 관계를 최고레벨의 관계로 끌어올리라 한다. 주종관계, 의속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 사랑할수도 있고 행복할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사랑과 행복에 이를수는 없다.
수행의 가치는 따로 있다. 외부로부터의 가치획득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가치성립이다. 수행자는 사랑과 행복을 떠나서 있다. 더 낫다. 그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기 게임에서 승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게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좁은 구역에서 두 사람이 마찰을 피할수 없다면 내면의 영토확장에 나서라.
[해방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의 심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외화하여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의 인격성으로 나타난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은 그 실현이다. 그러나 실패한다. 하나의 구역에 두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누구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긴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모든 사람이 다같이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할 수는 없다. 필연 한사람은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해방이다.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은 해방으로 가는 초극의 코스이며 (영적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은 자유로 가는 깨달음의 코스이다.
수행자들은 내면의 자유를 노래하지만 해방없는 자유는 방종에 가깝다. 두 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마찰하지 않기 위하여 영토를 늘리지만 그 넓혀진 영토에서 길을 잃는다. 자유는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며 해방은 자기만의 영토를 가지는 것이다.
해방이 없이 자유가 있는가? 자기만의 영토가 없으면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을수 있는가? 자유의 이름으로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침임해놓고 책임을 방기하지는 않는가? 삿된 길은 해방없이 자유를 얻겠다는 말이니 거짓된다.
인간은 불행을 미워하고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살면서 마찰한다는 게임의 규칙을 전제하고서 성립되는 말이다. 영토확장의 방법으로 마찰할 이유가 없는 즉 불행도 행복도 뛰어넘는 또다른 지평이 있다. 초극이다.
[바른 수행의 길]
수행은 내면의 영토확장이니 밖으로는 한걸음도 내디뎌서 안된다. 부처가 되겠다면 이미 밖의 것을 탐냄이니 버려라. 마음의 평정을 얻겠다면 또한 밖의 것을 쳐다봄이니 출발점으로 돌아가라.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타방의 존재에 침투하지 않고 밖의 것을 안으로 끌어오지 않고 스스로 자기자신을 만들어가라.
생각하면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삶을 임의대로 변형시키기 게임이니 잘하면 인생의 성공이 된다. 부부간이든 부자간이든 혹은 어떤 단체나 회사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자기가 개입한 흔적 뿐이니 관광지에 와서 낙서를 남기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른 수행은 (영적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의 길 뿐이니 이는 하나의 정연한 순서이며 다른 길은 없다. 사마타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법, 간화선법 들이 있으나 정신체계에 기초하지 않아 산만하다. 수행의 본질은 우뇌와 좌뇌로 구성된 두뇌의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일깨우는데 있으니 정신체계의 작동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정신체계도>
(창의력,직관력)(상상력,어휘력)(판단력,사고력)(추리력,이해력)(기억력,인지력)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
: : : : :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
인간은 동물에 없는 창의력 직관력 등 특별한 두뇌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로서 마음이 유도되니 마음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바탕이다. 오성, 이성등의 마음들이 서로 어우러져 인격성을 유도하니 존엄성, 주체성들이다. 소유나 지배는 인격성의 외화로서 자기실현이다.
소유하므로서 존엄해지고, 지배하므로서 주인(주체)되며, 성취하므로서 정체(자기다움)를 얻고 사랑하므로서 사회인되고 행복하므로서 문명인된다. 이는 세속적 가치로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다운 삶을 누구도 부정할수 없다.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에 기초하여 그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을 지향하는 성질로서의 인격성에 비롯한 욕망의 추구를 통한 자기실현은 건강한 삶이며 명상가는 이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명상이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길은 따로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한 유능한 인간이 있어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에 성공하고 있다면 명상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그리 잘살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므로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의 추구를 통해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의 획득하고 그러한 자기실현으로서 완전성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다.
잘살고 있는 인간에게 다가가 '인생은 苦海이니라'하고 위협할 필요는 없다. 유복한 인간들에게 인생은 행복이지 고해가 아니다. 우리 그들의 건강한 행복을 질투해서 안된다. 명상이 필요함은 우리 유능하지 못하므로 하여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기암환자에게 그 어떠한 방법도 해결책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답은 없다. 사랑을 잃은 소년에게 진정한 보상은 불능이다. 길은 전혀 없다. 암환자가 요행 수명을 연장한대도 결국 죽을 것이다. 소년이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해도 그것은 별개의 사건이며 한번 지나간 사랑은 다시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든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영역에 있어서 해결책이란 없다. 만약 해결책이 있다면 애초에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해소될 뿐이다. 인생의 근본문제는 패배한 게임을 문제삼지 않음에 의해 해소되는 것이지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인생의 근본문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삶의 의미는 존엄성, 문명성 등의 인격성을 실현하는데 있으나 본질에서 게임이다. 정해놓은 어떤 규칙 안에서만 유효한 상대적 가치일 뿐이다. 또한 그 규칙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 영원한 것은 규칙에 대한 규칙 뿐이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은 인간이 타자의 내부로 개입하여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연 하나가 소유를 얻으면 하나는 상실을 얻는다. 하나가 지배하면 하나는 소외된다. 하나가 성취하면 하나는 고독해진다. 하나가 사랑하면 하나는 상심한다. 하나가 행복할 때 하나는 일탈한다. 하나의 구역에서 두사람이 마찰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문제다.
들판에 한송이 국화꽃이 피어있다면 인간은 그 꽃을 꺽는다. 인간이 꽃을 얻을 때 꽃은 생명을 잃는다. 인간은 기어코 타자의 내부로 개입한다. 꽃을 꺽지 않고 순수하게 꽃의 존재 자체를 기뻐할 수 없는가? 왜 타인의 마음 안으로 침투해서만 안심하는가? 상처를 남기면서 말이다.
왜 꽃을 꺽는가? 꽃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꽃을 인식하기 위해서다. 꽃을 장식하기 위해서다. 꽃을 꺽는다는 것은 꽃을 내게로 가져온다는 것이며 정신의 내부로 침투하게 한다는 것이다. 꽃을 자기 내부 깊숙히 가져올수록 꽃은 상한다.
즉 인간의 두뇌기능 중 오성(꽃의 존재), 이성(꽃의 인식), 지성(꽃의 판별), 덕성(꽃의 사랑), 감성(꽃의 장식)들을 골고루 일시키기 위하여 꽃을 자기내부로 깊숙히 가져오는 것이다. 꽃을 꺽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여서 오성을 일시킬 뿐 이성, 지성, 덕성, 감성들은 할 일이 없다. 그것이 인간이 꽃을 꺽는 이유, 타방의 내부 깊숙히 침투하는 이유이다.
반면 그러할수록 꽃을 피우는 꽃밭, 꽃밭을 가꾸는 날씨, 날씨를 내는 하늘, 하늘을 여는 신에게서 멀어지고 만다. 하나를 자기내부로 가져오므로서 인간의 심성을 두루 충족시키지만 반면 그만큼 그 대상의 실재와 멀어지는 것이다.
해방, 그 내면의 영토확장은 꽃을 꺽지 않으므로서 그 꽃을 키우는 꽃밭과 꽃밭을 가꾸는 하늘과 땅과 우주와 신과 친구가 되자는 것이다. 사회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윤리와 도덕은 상대의 내부로 깊이 침투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이요 자유와 해방은 대신 상대의 존립근거가 되는 배경을 향해 팔을 벌리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는 꽃을 꺽어 가지는 서구적 교양과 꽃에 손대지 않는 동양적 교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자는 소크라테스의 계보요 후자는 노장의 전통이다. 이치를 인간에게로 가져오는 서구적합리주의전통과 인간을 이치로 가져가는 동양적보편주의 전통을 대비시키고 있다.
꽃을 꺽어 취하는데는 윤리와 도덕의 훈화가 필요하나 꽃을 가꾸는 데는 자유와 해방의 깨달음이 요구된다. 꽃을 취하는 자 행복을 얻고 꽃을 가꾸는 자 자기를 이룬다. 서구합리주의의 자기현시는 흔적을 남겨 증명함이요 동양보편주의의 자기완성은 자기를 감추므로 배경된 신을 드러내기다.
인간은 꽃을 취하므로서 자기존재를 과시하지만 꽃은 꽃잎 떨구고 사라지므로서 자기를 키운 거름과 비와 볕과 하늘과 땅을 증명한다. 전자는 윤리도덕이요 후자는 자유해방이다.
<서구합리주의 전통에서 타자에의 개입으로 자기실현에 이르는 과정>
꽃을 본다. - 존재 - 오성의 소유 - 존엄성의 실현 (도덕의 필요)
꽃을 안다. - 인식 - 이성의 지배 - 주체성의 실현 ↑
꽃을 꺽는다. - 개입 - 지성의 성취 - 정체성의 실현
꽃을 가진다. - 사용 - 덕성의 사랑 - 사회성의 실현 ↓
꽃을 느낀다. - 소모 - 감성의 행복 - 문명성의 실현 (윤리의 필요)
※ 도덕은 양심에 기초한 개인적 규칙이며 윤리는 질서에 따른 사회적 규범이다. 타자의 내부로 침투하는 정도가 더할수록 개인적 도덕에서 사회, 문명적 관점의 윤리로 바뀌지만 바탕에서 도덕과 윤리는 하나다.
<아세아적보편주의 전통에서 깨달음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는 과정>
꽃을 만난다. - 상실 / 권태 - 영적 체험 - 자기배달 (해방의 필요)
꽃밭을 만난다. - 소외 / 환멸 - 체험의 공유 - 사회배달 ↑
자연을 만난다. - 고독 / 표백 - 의식의 표백 - 자연배달
진리를 만난다. - 상심 / 무심 - 의식의 각성 - 진리배달 ↓
신을 만난다. - 일탈 / 지평 - 인식의 비약 - 신의배달 (자유의 필요)
※ 해방은 자기와 친구하기며 자유는 신과 친구하기다. 명상은 신과 대화함이며 수행은 자기와 대화함이다. 내면의 영토를 자연으로, 진리로, 신으로 확대해간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얻으려면 누군가의 내부로 침투하여야 하며 필요한 것은 규칙이다. 윤리와 도덕을 잃을 때 상처를 주게 된다. 상실과 소외와 고독과 상심과 일탈을 겪는다. 명상은 상대의 내부로 침투하지 않고 상대의 존립근거가 되는 배경을 얼싸안는 것이다.
[참된 사랑에 대하여]
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더욱 고인다. 비울수록 가득찬다. 물은 다만 거기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물을 취할 때 샘을 잃으며 물을 버리므로서 샘을 취하고 샘을 버리므로서 하늘과 우주를 취한다.
상대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개성과 그러한 인격을 만든 환경과 그로 인한 추억과 눈물까지 포용하자. 누구를 사랑하는 데는 상대가 아름답기 때문에 혹은 좋기 때문에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변한다. 아름다움은 추해지고 좋음은 나빠진다. 그 배경을 받아들일 때 변하는 것은 없다.
꽃의 예를 사람에 대면 사랑이다. 동사의 의미로 '사랑하다'의 사랑은 서구합리주의개념의 꽃을 꺽는 사랑이요 명사의 의미로 '사랑이다'에서 사랑은 동아보편주의개념으로 꽃을 가꾸는 사랑이다. 이때 사랑은 사랑보다 情에 가깝다.
서구의 사랑은 love요 동양의 사랑은 情이다. 꽃을 꺽는 순간 소녀에게 사랑이 스치고 꽃을 가꾼 농부에게는 情恨이 남는다.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나 정은 머무를 뿐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恨이 없는 정은 情이 아니요, 情이 없는 恨은 한이 아니니 정과 한이 어울고서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
진정한 사랑을 사랑으로 부르랴. 서푼짜리 사랑과 동급에 두어 격이 아니다. 자유는 有情에 두고 해방은 無情에 이르러 한을 남긴다. 해방은 나그네되어 떠나니 나그네에겐 情이요 주인에겐 恨이다. 自由는 탕자처럼 돌아오니 주인에겐 情이요 나그네에겐 한이다. 情恨이 한데 어울어지니 꽃을 꺽는 서구적 견문이 넘보지 못하는 한국인네의 참된 보석이다.
[타 수행법과의 비교]
기존의 수행법으로는 석가이전부터 있었으며 카톨릭의 피정이나 마호멧교의 수피즘, 힌두교의 여러 수행법들에 공통된 사마타수행법과 석가의 위빠사나 그리고 선불교의 간화선법 외에 라즈니쉬의 여러가지 명상법들이 있다.
사마타수행(기도, 고행, 주술, 호흡 등을 위주로 하는 유루선정)은 영적체험에 주력하기다. 그러나 영적체험은 일상의 현실에서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지 억지로 꾸며내어 되지 않는다. 영적 체험에서 느낌은 사마타 수행에서 얻는 것과 같으나 깨달음은 느낌이 아니라 일대사건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사념처관으로서 身(몸), 受(느낌), 心(마음), 法(진리)의 네군데를 살피고 있다. 몸을 살핌은 영적체험과 같고, 느낌을 살핌은 체험의 공유와 같다. 마음을 살핌은 의식의 표백에 해당하며 법을 살핌은 의식의 각성에 가깝다. 그러나 心外無法이니 마음밖에 이치가 없어 마음을 살피는 것이 모두 살피는 것이라 몸, 느낌, 진리를 마음과 구분짓는데서 이미 산만하다.
화두를 드는 간화선법은 心外無法의 이치를 반영하여 위빠사나의 번다함을 깨고 마음하나로 통일하였으니 진전된 바 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외부단서를 최대한 없앤다는 즉 연역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법, 곧 의식의 각성과 가까우나 심외무법이라 심과 법을 구분할 이유는 없다.
마음의 이치는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한 자기복제원리에 따라 법(진리)의 이치를 100프로 모사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보는 것이 법을 살피는 것이요 법을 보는 것이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화두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하는 제 1근거와 같다. 그러나 연역은 내부에서의 사전정보만을 인정할 뿐 외부단서는 하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법, 터무니없다. 화두조차 바깥에서 빌어온 것이니 돌려주라.
라즈니쉬의 잡다한 명상법들 중 육체적인 활동은 명상으로 보기 어려우니 수행에 댄다면 영적체험이라 할만하나 놀이일 뿐이다. 깨달음은 일대사건이지 느낌이나 놀이가 아니다. 만약 어떤 것을 느꼈다면 참되지 않다.
수행이 명상과 구분된 뜻은 체험에 기초하는데 있다. 명상으로 족하지 않아 수행을 말함은 두뇌구조상 사용하지 않는 두뇌기능을 사용해주므로서 잠든 두뇌를 일깨우는 의미가 있으니 가만이 앉아 생각하는 것은 수행일수 없다.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은 하나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단계이다. 심외무법의 연역하는 이치에 따라 마음 안에 다 있으니 외부의 단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해방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긴 여행이다.
해방을 얻으면 나그네처럼 떠날 것이요 자유를 얻으면 탕자처럼 돌아올 것이다. 떠날 때 情을 남길 것이요 돌아올 때 恨을 삼킬 것이다. 정과 한이 거울조각처럼 맞추어질 때 신의 미소를 볼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아무것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했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이다' 했다. 삿된 길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 말을 금과옥조로 떠받든다. 참된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단 어떤 것을 알기 이전에 앎을 먼저 알아야 하고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함을 먼저 행해야 한다. 아느냐 모르느냐,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알고 행함에 있어서 그 순서와 방향을 지키는가가 중요하다.
'모른다, nothing, 無' 어떤 명상가는 늘 이 한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곤 한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다. '당신은 아까부터 줄곧 /모른다/ 이 한마디를 언제 써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차있었지 않소?'
'아무것도 모른다'는 귀납적 지식을 이끌어내는 외부의 단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배후에서 모든 것을 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식은 신의 것을 빌린 바 되므로 인간은 알 필요가 없다. 만사는 신이 하는 일이므로 인간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는 신을 친구로 사귀어 둔 사람만 할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의 언어는 100프로 연역의 산물이며 연역은 외부의 단서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내 언어는 모두 나의 지어낸 바 되니 소설일 뿐이다. 나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설을 지어내었을 뿐이다.
진리의 보편성에 의하여 그 소설이 소설의 원리에 맞다면 또한 우주의 원리와도 일치할 수밖에 없으니 구태여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외부와 일체의 접촉을 차단하고 100프로 나의 내부에서 지어낸 소설이 과학자들이 1000년을 연구해서 알아낸 지식과 다름이 없다. 진리가 그렇게 연출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한다]
無知의 知와 無爲의 爲,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사상은 비슷하다. 그러나 남긴 길은 정반대이다. 플라톤과 이후 서양정신사의 계보는 소크라테스의 無知에서 知로 옮아왔다. 장자 이후 동양정신의 계보는 무위에서 실천으로 옮아가지 않고 무위 그 자체를 체화해버렸다.
소크라테스가 있던 집을 무너뜨리고 터를 닦았다면 플라톤은 주춧돌을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둥을 세웠다. 그 위에 지속적으로 층수를 높여온 것이 서양정신사이다. 그들은 힘을 합쳐 거대한 집을 지었다. 동양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두명의 소크라테스는 필요없다. 두명의 노자는 필요없다. 소크라테스가 터를 닦았으면 플라톤은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장자는 노자가 넓힌 터를 더욱 넓혀놓았다. 그들은 영원히 터나 닦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2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플라톤목수의 쓸만한 집은 2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너무 낡고 비좁은 집이 되어 있다. 이젠 깨부셔야 한다. 죄다 헐어버리고 다시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발달된 건축기술이 남아있다. 노자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21세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다시 소크라테스와 노자로 돌아가야 한다. 둘은 손잡아야 한다.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두 정신이 2500년만에 만나 하나된다. 우리에게는 닦아놓은 너른 터와 비축된 에네르기가 있다. 그들에겐 발달된 건축기술이 있다.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이 힘을 합쳐 새로운 정신의 집을 짓는다.
[깨달음에서 실천으로]
산파법이란 무엇인가? 귀납적사고는 반드시 외부에서 유입된 어떤 단서로부터 출발한다. 그점을 잊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추궁한다. 결국 고백한다. 그들이 막연하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단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단서는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리 빛나는 논리도 반드시 씨앗이 되는 어떤 단서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그것은 대개 터무니없는 맹신이었음이 폭로된다.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플라톤은 더욱 많은 단서, 쓸만한 건축자재를 모아왔다. 일견 그럴 듯 해보인다. 25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집짓는 기술은 쓸만하나 집은 가짜다.
노자들은 어떤가? 공자 맹자 목수들이 집을 짓고 있으면 옆에 와서 잔소리를 한다. '이봐요 공목수 맹목수 그게 아니라니깐. 그건 가짜라구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들은 가짜를 비토할 뿐 진짜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서양집이 비록 엉터리이나 건축기술은 남았는데 비해 동양집에는 남은 것이 없다.
딴지걸기에 재미붙어서 안된다. 반대하기 위한 반대여서 안된다. 무위하기 위한 무위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재미들어버렸다. 놀이로 만들어 버렸다. 참된 길은 무엇인가?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진정한 만남이다.
깨닫기 위한 깨달음은 가짜다. 실천하기 위한 깨달음이다. 노자는 하나로 충분하다. 모두가 노자가 되려해서는 안된다. 이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을 한다.
[대승적 자세와 소승적 자세]
플라톤의 계승발전은 대승의 길이요 장자의 훈고답습은 소승의 길이다. 실천에 있어서는 전술적, 대승적자세이어야 하고 삶에 있어서는 전략적 소승적이어야 한다. 자기 앞에서는 노자같아야 하고 타인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아야 한다.
우리 이 둘을 착각해서는 안된다. '모른다, 無, nothing'는 자기자신에게 해야할 말이지 타인에게 할말이 아니다. 무릇 타인 앞에서, 사회 앞에서는 대승적, 전술적이어야 하고 자기 앞에서는 소승적 전략적이어야 한다.
명상법은 타인에게 인사하는 법이요, 수행법은 자기에게 인사하는 법이다. 둘은 하나이나 다르다. 명상은 간단하고 쉬우며 보편적이어야 한다. 수행은 어렵고 치열하며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무릇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기에게 엄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정신의 길은 타인에게 하는 식이요 노자 이후 동양정신의 길은 자기에게 하는 식이다. 우리는 줄곧 이를 혼동해왔다. 양자는 만나야 한다. 우리는 대승적 관대함과 소승적 치열함을 겸해야 한다.
명상법은 간단하다. 정신차리면 보인다. 수행법은 험난하다. 換骨奪胎가 아니고서 안된다. 타인에게는 명상을 권하고 자기에게는 수행을 권한다. 수행은 명상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마저도 깨는 것이다.
판소리꾼은 먼저 배우고 다음 독공한다. 먼저 깨닫고 다음 수행한다. 수행은 필요없다. 돈오돈수다.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은 자는 수행하지 않을수 없다. 미끄러지듯 빨려들어간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소크라테스를 이해한 자는 소크라테스의 길을 가지 않는다. 노자를 이해한 자는 타인에게 노자의 길을 권유하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수행한다. 수행을 통해 깨달은 자는 없다. 수행자는 수행은 권유하지 않는다.
제자가 스승이 갔던 길을 두 번 갈 필요는 없다. 내가 간 길을 가라고 말하는 스승은 가짜다. 나는 수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사로운 체험이다. 이 길을 가라는 것이 아니다. 한번 빠져든 자는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
하나의 구역에 두사람이 산다면 마찰한다. 해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규칙을 정하는 것이 하나이고 영역을 넓히는 것이 다음이다. 규칙정하기가 윤리와 도덕이라면 영역넓히기는 자유와 해방이다.
철학의 법은 자유와 해방의 길이요 과학의 방법은 윤리와 도덕의 틀이다. 해방은 내면의 영토확장이며 자유는 해방의 외화이다. 명상은 자유에 가깝고 수행은 해방에 가깝다. 깨달음은 해방의 완성이자 자유의 시작이다.
윤리, 도덕 그리고 자유와 해방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흔히 수행자는 세속적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진다. 과연 교리나 계율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여기 혼동해서 안되는 미묘한 함정이 있다. 규칙정하기와 영역넓히기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의 세속적 가치를 얻는 길이요 필연 타인의 인생에 대한 개입을 전제한다. 자유와 해방은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의 초극에 이르는 길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획득이다.
깨달음이 사랑과 행복을 준다면 거짓말이다. 깨달아 얻을 것은 없다. 세속적 가치와 명상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세속적 가치를 부인할 수는 없다. 허나 그에 앞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수행을 통해 세속적 가치를 얻으리라는 착각은 말라. 자유와 해방으로서 사랑과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을 버림으로서 자유와 해방에 이른다. 수행의 가치는 인생 전반을 규율하는 보편가치요 사랑과 행복은 어떤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 하나의 행동에 대한 특수가치다.
게임에 비유될수 있다. 그 게임을 할것인가 말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이라면 게임을 하기로 작정한 후 게임에 충실하는 것이 윤리와 도덕이다. 윤리와 도덕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러한 게임을 하지 않는다.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는 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여 관계를 맺었다면 책임져야 한다. 곧 윤리 도덕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지의 여부는 그대의 자유이다.
수행은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개입하지 말라한다. 이미 개입하였거든 그 관계를 최고레벨의 관계로 끌어올리라 한다. 주종관계, 의속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 사랑할수도 있고 행복할수도 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사랑과 행복에 이를수는 없다.
수행의 가치는 따로 있다. 외부로부터의 가치획득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가치성립이다. 수행자는 사랑과 행복을 떠나서 있다. 더 낫다. 그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기 게임에서 승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게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좁은 구역에서 두 사람이 마찰을 피할수 없다면 내면의 영토확장에 나서라.
[해방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의 심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외화하여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의 인격성으로 나타난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은 그 실현이다. 그러나 실패한다. 하나의 구역에 두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누구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긴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모든 사람이 다같이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할 수는 없다. 필연 한사람은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해방이다.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은 해방으로 가는 초극의 코스이며 (영적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은 자유로 가는 깨달음의 코스이다.
수행자들은 내면의 자유를 노래하지만 해방없는 자유는 방종에 가깝다. 두 사람이 한집에 살면서 마찰하지 않기 위하여 영토를 늘리지만 그 넓혀진 영토에서 길을 잃는다. 자유는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며 해방은 자기만의 영토를 가지는 것이다.
해방이 없이 자유가 있는가? 자기만의 영토가 없으면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을수 있는가? 자유의 이름으로 타인의 인생에 부당하게 침임해놓고 책임을 방기하지는 않는가? 삿된 길은 해방없이 자유를 얻겠다는 말이니 거짓된다.
인간은 불행을 미워하고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이 한집에서 살면서 마찰한다는 게임의 규칙을 전제하고서 성립되는 말이다. 영토확장의 방법으로 마찰할 이유가 없는 즉 불행도 행복도 뛰어넘는 또다른 지평이 있다. 초극이다.
[바른 수행의 길]
수행은 내면의 영토확장이니 밖으로는 한걸음도 내디뎌서 안된다. 부처가 되겠다면 이미 밖의 것을 탐냄이니 버려라. 마음의 평정을 얻겠다면 또한 밖의 것을 쳐다봄이니 출발점으로 돌아가라.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타방의 존재에 침투하지 않고 밖의 것을 안으로 끌어오지 않고 스스로 자기자신을 만들어가라.
생각하면 산다는 것은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삶을 임의대로 변형시키기 게임이니 잘하면 인생의 성공이 된다. 부부간이든 부자간이든 혹은 어떤 단체나 회사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자기가 개입한 흔적 뿐이니 관광지에 와서 낙서를 남기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른 수행은 (영적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의 길 뿐이니 이는 하나의 정연한 순서이며 다른 길은 없다. 사마타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법, 간화선법 들이 있으나 정신체계에 기초하지 않아 산만하다. 수행의 본질은 우뇌와 좌뇌로 구성된 두뇌의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일깨우는데 있으니 정신체계의 작동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정신체계도>
(창의력,직관력)(상상력,어휘력)(판단력,사고력)(추리력,이해력)(기억력,인지력)
오성 이성 지성 덕성 감성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
: : : : :
상실 소외 고독 상심 일탈
권태 환멸 표백 무심 지평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
인간은 동물에 없는 창의력 직관력 등 특별한 두뇌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로서 마음이 유도되니 마음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바탕이다. 오성, 이성등의 마음들이 서로 어우러져 인격성을 유도하니 존엄성, 주체성들이다. 소유나 지배는 인격성의 외화로서 자기실현이다.
소유하므로서 존엄해지고, 지배하므로서 주인(주체)되며, 성취하므로서 정체(자기다움)를 얻고 사랑하므로서 사회인되고 행복하므로서 문명인된다. 이는 세속적 가치로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다운 삶을 누구도 부정할수 없다. 인간존재의 불완전성에 기초하여 그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을 지향하는 성질로서의 인격성에 비롯한 욕망의 추구를 통한 자기실현은 건강한 삶이며 명상가는 이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명상이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길은 따로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한 유능한 인간이 있어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에 성공하고 있다면 명상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그리 잘살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하므로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의 추구를 통해 존엄성, 주체성, 정체성, 사회성, 문명성의 획득하고 그러한 자기실현으로서 완전성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다.
잘살고 있는 인간에게 다가가 '인생은 苦海이니라'하고 위협할 필요는 없다. 유복한 인간들에게 인생은 행복이지 고해가 아니다. 우리 그들의 건강한 행복을 질투해서 안된다. 명상이 필요함은 우리 유능하지 못하므로 하여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기암환자에게 그 어떠한 방법도 해결책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답은 없다. 사랑을 잃은 소년에게 진정한 보상은 불능이다. 길은 전혀 없다. 암환자가 요행 수명을 연장한대도 결국 죽을 것이다. 소년이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해도 그것은 별개의 사건이며 한번 지나간 사랑은 다시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든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영역에 있어서 해결책이란 없다. 만약 해결책이 있다면 애초에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단지 해소될 뿐이다. 인생의 근본문제는 패배한 게임을 문제삼지 않음에 의해 해소되는 것이지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인생의 근본문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삶의 의미는 존엄성, 문명성 등의 인격성을 실현하는데 있으나 본질에서 게임이다. 정해놓은 어떤 규칙 안에서만 유효한 상대적 가치일 뿐이다. 또한 그 규칙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 영원한 것은 규칙에 대한 규칙 뿐이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은 인간이 타자의 내부로 개입하여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연 하나가 소유를 얻으면 하나는 상실을 얻는다. 하나가 지배하면 하나는 소외된다. 하나가 성취하면 하나는 고독해진다. 하나가 사랑하면 하나는 상심한다. 하나가 행복할 때 하나는 일탈한다. 하나의 구역에서 두사람이 마찰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문제다.
들판에 한송이 국화꽃이 피어있다면 인간은 그 꽃을 꺽는다. 인간이 꽃을 얻을 때 꽃은 생명을 잃는다. 인간은 기어코 타자의 내부로 개입한다. 꽃을 꺽지 않고 순수하게 꽃의 존재 자체를 기뻐할 수 없는가? 왜 타인의 마음 안으로 침투해서만 안심하는가? 상처를 남기면서 말이다.
왜 꽃을 꺽는가? 꽃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꽃을 인식하기 위해서다. 꽃을 장식하기 위해서다. 꽃을 꺽는다는 것은 꽃을 내게로 가져온다는 것이며 정신의 내부로 침투하게 한다는 것이다. 꽃을 자기 내부 깊숙히 가져올수록 꽃은 상한다.
즉 인간의 두뇌기능 중 오성(꽃의 존재), 이성(꽃의 인식), 지성(꽃의 판별), 덕성(꽃의 사랑), 감성(꽃의 장식)들을 골고루 일시키기 위하여 꽃을 자기내부로 깊숙히 가져오는 것이다. 꽃을 꺽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여서 오성을 일시킬 뿐 이성, 지성, 덕성, 감성들은 할 일이 없다. 그것이 인간이 꽃을 꺽는 이유, 타방의 내부 깊숙히 침투하는 이유이다.
반면 그러할수록 꽃을 피우는 꽃밭, 꽃밭을 가꾸는 날씨, 날씨를 내는 하늘, 하늘을 여는 신에게서 멀어지고 만다. 하나를 자기내부로 가져오므로서 인간의 심성을 두루 충족시키지만 반면 그만큼 그 대상의 실재와 멀어지는 것이다.
해방, 그 내면의 영토확장은 꽃을 꺽지 않으므로서 그 꽃을 키우는 꽃밭과 꽃밭을 가꾸는 하늘과 땅과 우주와 신과 친구가 되자는 것이다. 사회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윤리와 도덕은 상대의 내부로 깊이 침투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이요 자유와 해방은 대신 상대의 존립근거가 되는 배경을 향해 팔을 벌리는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는 꽃을 꺽어 가지는 서구적 교양과 꽃에 손대지 않는 동양적 교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자는 소크라테스의 계보요 후자는 노장의 전통이다. 이치를 인간에게로 가져오는 서구적합리주의전통과 인간을 이치로 가져가는 동양적보편주의 전통을 대비시키고 있다.
꽃을 꺽어 취하는데는 윤리와 도덕의 훈화가 필요하나 꽃을 가꾸는 데는 자유와 해방의 깨달음이 요구된다. 꽃을 취하는 자 행복을 얻고 꽃을 가꾸는 자 자기를 이룬다. 서구합리주의의 자기현시는 흔적을 남겨 증명함이요 동양보편주의의 자기완성은 자기를 감추므로 배경된 신을 드러내기다.
인간은 꽃을 취하므로서 자기존재를 과시하지만 꽃은 꽃잎 떨구고 사라지므로서 자기를 키운 거름과 비와 볕과 하늘과 땅을 증명한다. 전자는 윤리도덕이요 후자는 자유해방이다.
<서구합리주의 전통에서 타자에의 개입으로 자기실현에 이르는 과정>
꽃을 본다. - 존재 - 오성의 소유 - 존엄성의 실현 (도덕의 필요)
꽃을 안다. - 인식 - 이성의 지배 - 주체성의 실현 ↑
꽃을 꺽는다. - 개입 - 지성의 성취 - 정체성의 실현
꽃을 가진다. - 사용 - 덕성의 사랑 - 사회성의 실현 ↓
꽃을 느낀다. - 소모 - 감성의 행복 - 문명성의 실현 (윤리의 필요)
※ 도덕은 양심에 기초한 개인적 규칙이며 윤리는 질서에 따른 사회적 규범이다. 타자의 내부로 침투하는 정도가 더할수록 개인적 도덕에서 사회, 문명적 관점의 윤리로 바뀌지만 바탕에서 도덕과 윤리는 하나다.
<아세아적보편주의 전통에서 깨달음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는 과정>
꽃을 만난다. - 상실 / 권태 - 영적 체험 - 자기배달 (해방의 필요)
꽃밭을 만난다. - 소외 / 환멸 - 체험의 공유 - 사회배달 ↑
자연을 만난다. - 고독 / 표백 - 의식의 표백 - 자연배달
진리를 만난다. - 상심 / 무심 - 의식의 각성 - 진리배달 ↓
신을 만난다. - 일탈 / 지평 - 인식의 비약 - 신의배달 (자유의 필요)
※ 해방은 자기와 친구하기며 자유는 신과 친구하기다. 명상은 신과 대화함이며 수행은 자기와 대화함이다. 내면의 영토를 자연으로, 진리로, 신으로 확대해간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을 얻으려면 누군가의 내부로 침투하여야 하며 필요한 것은 규칙이다. 윤리와 도덕을 잃을 때 상처를 주게 된다. 상실과 소외와 고독과 상심과 일탈을 겪는다. 명상은 상대의 내부로 침투하지 않고 상대의 존립근거가 되는 배경을 얼싸안는 것이다.
[참된 사랑에 대하여]
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더욱 고인다. 비울수록 가득찬다. 물은 다만 거기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물을 취할 때 샘을 잃으며 물을 버리므로서 샘을 취하고 샘을 버리므로서 하늘과 우주를 취한다.
상대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개성과 그러한 인격을 만든 환경과 그로 인한 추억과 눈물까지 포용하자. 누구를 사랑하는 데는 상대가 아름답기 때문에 혹은 좋기 때문에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변한다. 아름다움은 추해지고 좋음은 나빠진다. 그 배경을 받아들일 때 변하는 것은 없다.
꽃의 예를 사람에 대면 사랑이다. 동사의 의미로 '사랑하다'의 사랑은 서구합리주의개념의 꽃을 꺽는 사랑이요 명사의 의미로 '사랑이다'에서 사랑은 동아보편주의개념으로 꽃을 가꾸는 사랑이다. 이때 사랑은 사랑보다 情에 가깝다.
서구의 사랑은 love요 동양의 사랑은 情이다. 꽃을 꺽는 순간 소녀에게 사랑이 스치고 꽃을 가꾼 농부에게는 情恨이 남는다. 사랑은 오고 가는 것이나 정은 머무를 뿐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恨이 없는 정은 情이 아니요, 情이 없는 恨은 한이 아니니 정과 한이 어울고서야 진정한 사랑이 된다.
진정한 사랑을 사랑으로 부르랴. 서푼짜리 사랑과 동급에 두어 격이 아니다. 자유는 有情에 두고 해방은 無情에 이르러 한을 남긴다. 해방은 나그네되어 떠나니 나그네에겐 情이요 주인에겐 恨이다. 自由는 탕자처럼 돌아오니 주인에겐 情이요 나그네에겐 한이다. 情恨이 한데 어울어지니 꽃을 꺽는 서구적 견문이 넘보지 못하는 한국인네의 참된 보석이다.
[타 수행법과의 비교]
기존의 수행법으로는 석가이전부터 있었으며 카톨릭의 피정이나 마호멧교의 수피즘, 힌두교의 여러 수행법들에 공통된 사마타수행법과 석가의 위빠사나 그리고 선불교의 간화선법 외에 라즈니쉬의 여러가지 명상법들이 있다.
사마타수행(기도, 고행, 주술, 호흡 등을 위주로 하는 유루선정)은 영적체험에 주력하기다. 그러나 영적체험은 일상의 현실에서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지 억지로 꾸며내어 되지 않는다. 영적 체험에서 느낌은 사마타 수행에서 얻는 것과 같으나 깨달음은 느낌이 아니라 일대사건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사념처관으로서 身(몸), 受(느낌), 心(마음), 法(진리)의 네군데를 살피고 있다. 몸을 살핌은 영적체험과 같고, 느낌을 살핌은 체험의 공유와 같다. 마음을 살핌은 의식의 표백에 해당하며 법을 살핌은 의식의 각성에 가깝다. 그러나 心外無法이니 마음밖에 이치가 없어 마음을 살피는 것이 모두 살피는 것이라 몸, 느낌, 진리를 마음과 구분짓는데서 이미 산만하다.
화두를 드는 간화선법은 心外無法의 이치를 반영하여 위빠사나의 번다함을 깨고 마음하나로 통일하였으니 진전된 바 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외부단서를 최대한 없앤다는 즉 연역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법, 곧 의식의 각성과 가까우나 심외무법이라 심과 법을 구분할 이유는 없다.
마음의 이치는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한 자기복제원리에 따라 법(진리)의 이치를 100프로 모사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보는 것이 법을 살피는 것이요 법을 보는 것이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화두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하는 제 1근거와 같다. 그러나 연역은 내부에서의 사전정보만을 인정할 뿐 외부단서는 하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법, 터무니없다. 화두조차 바깥에서 빌어온 것이니 돌려주라.
라즈니쉬의 잡다한 명상법들 중 육체적인 활동은 명상으로 보기 어려우니 수행에 댄다면 영적체험이라 할만하나 놀이일 뿐이다. 깨달음은 일대사건이지 느낌이나 놀이가 아니다. 만약 어떤 것을 느꼈다면 참되지 않다.
수행이 명상과 구분된 뜻은 체험에 기초하는데 있다. 명상으로 족하지 않아 수행을 말함은 두뇌구조상 사용하지 않는 두뇌기능을 사용해주므로서 잠든 두뇌를 일깨우는 의미가 있으니 가만이 앉아 생각하는 것은 수행일수 없다.
영적 체험, 체험의 공유, 의식의 표백, 의식의 각성, 인식의 비약은 하나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단계이다. 심외무법의 연역하는 이치에 따라 마음 안에 다 있으니 외부의 단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해방에서 자유로 나아가는 긴 여행이다.
해방을 얻으면 나그네처럼 떠날 것이요 자유를 얻으면 탕자처럼 돌아올 것이다. 떠날 때 情을 남길 것이요 돌아올 때 恨을 삼킬 것이다. 정과 한이 거울조각처럼 맞추어질 때 신의 미소를 볼 것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