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론은 본능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되는 사람은 원래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원래 안 된다. 애들은 되는데 어른은 안 되는 게 있다. 컴퓨터 게임 초창기의 일이다. 꼬맹이가 마구잡이로 자판을 쳐보더니 금방 게임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엥? 외국 게임인데? 삼촌!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 나한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강아지도 생후 4개월에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 시기를 지나면 학습이 안 된다. 올리버 쌤의 네 살 먹은 딸 체리는 영어를 잘하는데 엄마는 못한다. 네 살은 되는데 어른은 왜 안 돼? 구조치가 있다. 그분들도 아기 때 시작했으면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음치, 박치, 몸치 외에 잡기는 다 못한다. 고스톱도 못 해. 짤짤이도 못 해. 나는 한쪽으로만 특화된 게 분명하다. 이것은 학생 때 적성검사에서 확인했다. 백 점 만점에 97점과 7점이 공존해 버려. 구조는 간단하므로 뒤늦게 눈이 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치라는 것을 인정해야 구조가 보인다. 못 본다는 사실을 알아야 다른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영어가 안 된다는 걸 인정해야 문법 위주의 잘못된 일본식 영어교육을 극복하고 잘 되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뭐든 짝이 있어야 한다. 커플들이 사진을 찍어도 다들 짝이 있는데 한 사람만 짝이 없어서 어색하다. 사진 찍는 사람이 빠졌으므로 당연히 한 자리가 빈다. 인터넷에 그런 유머 사진이 많다는 것은 다들 그 장면을 어색하게 느낀다는 거다. 형제가 짝이라면 부모가 있듯이 짝이 있는 곳에는 항상 둘을 묶어주는 더 높은 단위의 존재가 있다. 젓가락 두 짝이 한 쌍이면 잡는 손이 있듯이 둘이 만나야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둘이 만나게 주선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게 보이지 않으면 찾으려고 두리번거려야 한다. 그게 추론이다. 그런데 인간놈의 자슥들이 추론을 안 하고 그냥 태평스럽게 사는 것이었다.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드물게 그런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오청원이 그런 사람인데 신포석을 들고나왔다. 왜 첫수는 항상 소목에 두는가? 잘 보면 그래야 다음 수와 대칭이 맞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3이나 화점에 두면 대칭이 어긋나서 불편하다. 모양이 안 좋다. 생사가 달린 바둑대회에 거액의 상금이 걸려있는데 모양이 예쁜지를 보고 있더라는 말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때도 해설자들이 놀란 게 알파고가 둔 자리가 예쁘지 않았다. 균형이 안 맞고 못대가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X - 바둑은 이겨야 한다. O - 바둑은 예뻐야 한다. 원시인도 아니고 바둑 천재라는 것들이 무슨 개수작이냐고. 그런데 더 크게 보면 3.3이나 화점이 예쁜 자리가 맞다. 바보들이 보지 못할 뿐. 반대편에서 축을 몰아온다면 축머리가 될 확률이 높은 지점은? 왜 오청원의 신포석이 나오고 알파고의 묘수가 나왔는지 알만하다. 더 크게 보라고. 이 부분을 아직 우리나라 바둑계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둑은 대칭을 만드는 게임인데 대칭은 짝수다. 짝수에 홀수를 가둬먹는 게 바둑이다. 짝수는 가두고 홀수는 갇히므로 당연히 짝수가 홀수를 이긴다. 어떤 바둑알과 짝지으면서 반대편 또 다른 바둑알과 짝지으려면? 그 지점은 홀수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화점이나 3.3일 수밖에 없다. 이중의 짝짓기다. 바둑판 전체를 보면 왜 중앙이 중요한지 알게 되는데 내로라하는 일본의 바둑천재들이 귀퉁이만 보고 대칭과 균형을 찾더라는 말씀. 자동차 바퀴가 넷인데 고목이나 소목에서 균형을 맞추면 앞바퀴다. 반대편에 또 다른 대칭을 만들면 뒷바퀴다. 이놈들이 바둑판에 자동차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미친 놈들 아냐? 전쟁이 치열한 판에 장난감 레고 자동차 조립하고 있는 거냐? 일본 바둑이 무려 백 년 동안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지적을 안 해서 중국인이 지적한 게 오청원의 신포석이다. 일본 생각 - 바둑은 대칭과 균형이야. 모양이 예뻐야 해. 소목이나 고목에 한 칸 벌려서 두고 다른 쪽에도 그렇게 두면 네 바퀴가 안정감 있게 커브를 돌잖아. 띠띠빵빵. 좋아좋아. 이런 개초딩 놈들 같으니라고. 왜 중국인 눈에 보이는 게 일본인 눈에는 안 보일까? 그들은 바둑은 미학이라고 생각해서 뇌가 굳어버린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발소 그림과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과 인상주의는 그림의 목적이 다르다. 근본적인 시선의 차이로 인해 대화가 불통이다. 이발소그림 - 행복감을 선물하겠다. 플러스 아카데미 풍 - 하느님의 감동을 선물하겠다. 플러스 인상주의 풍 - 규칙을 깨고 질서를 드러내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 마이너스 인상주의 그림을 잘 보면 이게 산업디자인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프 쿤스나 뒤샹을 잘 보면 야들이 사실은 광고 천재다. 그림은 시큰둥한데 광고빨은 졸라리 잘 받는다. 뱅크시 하는 짓을 잘 보면 이넘이 광고쟁이다. 입소문 만들기 도사. 영화업계에서 스카우트 안 하고 뭐 하냐? 그림이 디자인과 연결하는 통로가 되는 면에서 전통적인 그림과는 관점이 다르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도 대중 어쩌구 하지만 말장난이고 그게 광고쟁이 행동이다. 말로는 대중을 팔지만 대중성 전혀 없고 광고성은 뛰어남. 툴루즈 로트렉은 말할 것도 없고. 브루탈리즘도 광고쟁이 관점이다. 공산주의니 모더니즘이니 하고 떠드는데 다 그냥 갖다붙인 말이고 들여다보면 공산당답게 많은 사람에게 값싸게 대량으로 전파한다.>광고한다. 결국 현대 예술은 광고예술이라는 거. 다단계와 같다. 그림이 관객한테 뭔가 주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똥통들과는 대화가 안 된다. 여기서 오청원의 신포석이 바둑은 예뻐야 한다고 믿는 많은 일본인의 심사를 불편하게 한 것과 인상주의가 결맞음과 결어긋남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당황시킨 것이 일치한다는 것을 자동으로 아실 것이다. 오청원은 대범하게 천원에 두었는데 매너로도 꽝이다. 청나라 사신이 그런 짓 한다. 조선을 얕보고 우리 중국은 중앙이지 하고 천원에 두는 것이다. 그런 설화가 많다. 조선은 변방이니 겸손하게 변에 두어야지 감히 천원에 두다니 이런 호로쌍놈의 자슥을 봤나? 이런 것이다. 천원은 흉내바둑을 둘 수 없는 완전 홀수다. 어느 방향으로 봐도 축머리가 되어 마중 나오는 지점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자. 천원은 절대 홀수다. 어느 누구와도 짝이 안 맞다. 흉내바둑이 안 된다. 그러나 천원이야말로 바둑판의 모든 지점과 대칭이 되는 자리라는 말씀이다. 어느 누구와도 짝이 안 맞으면 모두와 짝이 된다. 연예인이 스캔들 나면 안 되는 이치다. 누구와도 커플이 안 된다. 대신 시청자 모두와 사귄다. 인기 대박 터진다. 물론 꼭 천원에 둘 이유는 없고 일단 중앙에 한 수를 박아서 마중 나오게 해놓으면 나중에 전개하기가 편하다. 부하지하의 원리. 먹을 수 있지만 먹지 않고 나중에 키워서 먹으려면 미리 요충지를 선점해서 나중 마중 나오는 수가 있어야 한다. 바둑은 짝짓기 게임이다. 바퀴와 바퀴가 짝을 짓는다는 생각이라면 초딩이다. 바퀴축과 또 다른 바퀴축과 짝을 짓는 것이며 바퀴는 짝수, 바퀴축은 홀수다. 홀수와 홀수가 만나서 짝수가 되는 게 진짜라는 말씀이다. 이런 감각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나와줘야 한다. 척 하면 삼천리지 입 아프게 그걸 설명해야 하나? 오청원 같은 천재가 한 명 더 있는데 그 사람은 이창호다. 오청원이 포석의 천재라면 이창호는 끝내기의 천재다. 원리는 똑같다. 오청원이 홀수를 만들었다면 이창호도 반집 승 홀수로 끝낸다. 상대방은 언제나 대칭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한다. 오청원이 홀수에 두어 상대방의 대칭을 불편하게 한다. 길목을 막아버려서 상대가 고목이나 소목에 한 칸 벌려 대칭시킬 수 없게 훼방 놓는다. 이창호는 끝내기에서 그런 식의 상대방이 두고 싶은 자리를 미리미리 다 막아버려서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상대가 키워서 먹지 못하게 막아버린다. 보통생각 - 내게 유리한 지점에 둔다. 이창호 - 상대가 두고 싶은 자리를 막아놓는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국면을 단순화시켜 놓는 방법으로 내가 실수하지 않고 상대가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실수는 어차피 확률이니까 확률의 덫에 걸린다. 안 걸리면 어쩌나? 그런데 거의 걸린다. 왜? 시간이 갈수록 압박을 받거든. 초읽기에 몰려 덜컥수를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바둑은 무조건 선수를 두면 이기는데 오청원이 시작의 시작에 강하다면 이창호는 끝의 시작에 강하다. 간단하다. 남들이 짝수를 따라갈 때 홀수를 따라가면 된다. 대신 바둑판 전체를 볼 수 있어야 그런 구조가 보인다. 이쪽만 보면 홀수지만 반대편을 보면 미리 마중 나와 대칭을 예비한다. 남들이 균형의 균형을 맞출 때 불균형의 균형을 맞추면 된다. 불균형 두 개가 마주보면 균형이 되는게 바퀴축 두 개가 마주보면 더 높은 단위의 구조가 호출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론적 확신이다. 구조치라는 말은 대화를 해보면 사람들이 이 부분에 애초에 관심이 없더라는 거다. 더 높은 단위의 세계와 생각을 연결하는 부분에 무관심하다. 예컨대 결혼이라면 그냥 좋아서 결혼한다고 하지 신분상승을 해서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안 한다. 독자적인 하나의 세력권을 가지고 맹주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수들이 해설할 때도 그냥 해설만 한다. 내가 지금 짚어준 부분을 말하지 않더라는 거다. 알파고가 왜 그 자리에 두었는지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냥 컴퓨터니까 미쳤나보다 하는 수준이다. 존나 씨바 알파고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 수준. 왜 알파고의 수에서 오청원의 신포석을 떠올렸다고 해설자는 말하지 않나? 구조론을 시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본질과 관계없는 즉 내 관심사가 아닌 딴 부분을 거론한다. 내가 하이퍼루프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냐 하는 수준이다. 그 사람들은 그냥 확실한 결론이 불안한 것이다. 남들은 다들 소목이나 고목이라는 짝수에 먼저 둔다. 근데 오청원은 왜 홀수 지점에 두냐? 불안하다. 기분이 안 좋다. 근데 내가 봐도 홀수에 두면 좀 불안하긴 하다. 어느 쪽으로 붙을지 애매하다. 그런 자기소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 와야 한다. 정치판도 그런 식의 불안논리다. 내면의 불안함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극복할 문제다. 오륜서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허공에 걸린 한 자 폭의 길을 태연하게 걸어갈 수 있으면 된다고 했다. 상대방이 휘두르는 칼끝을 3센티 차이로 피하면 승리, 30센티 피하면 패배. 하수들의 주장은 3센티로 피하는 것은 아슬아슬해서 불안하니까 확실하게 30센티로 크게 피하라는 말이다. 크게 피하면 반격을 못 하니까 몰려서 결국 죽는데? 메이웨더는 아주 1밀리 차이로 피하던데? 피하지도 않고 상대방 주먹이 스치게 하던데? 지금 정국도 그렇다. 이재명이 3센티로 법원의 칼날을 피해야 하나, 30센티로 크게 피해야 국민이 안심할 수 있냐? 결국 심리싸움이 된다. 이기는 게 중요하지 안심하는 게 중요한가? 여기서 대화가 안 된다. 애초에 방향이 다르면 말이 안 통한다. 불안하다는데 어쩌겠나? 불안하면 집에 가야지 무슨 구조론? 하여간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명탐정 몽크를 보면 됨. 몽크는 비뚤어져 있는 것은 모두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린다. |